평소보다 아침을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에스테야 도심을 빠져나와 이라체 수도원과 캠핑장을 지나칠 즈음이었다. 구름이 가득 걸린 하늘에 돌연 무지개가 떠올랐다. 마치 오늘 하루 즐거운 일이 가득할 거라 일러주려는 듯 방긋 눈웃음친다. 쌀쌀한 날씨에 햇볕도 추위를 타는지 구름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그래도 비 오지 않는 것에 감지덕지했다. 매일 기쁜 마음으로 까미노를 걷는다. 그론세 닷컴이 매긴 코스 난이도는 별 2개. 이 정도면 쉬운 축에 속한다. 숙소보다 이백오십 미터 높은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까지 이어진 오르막 길이 그나마 난관이라 할 만하다. 출발 전에는 그론세 닷컴의 코스 프로필에서 제법 경사지게 표시된 긴 업힐 구간에 긴장했다. 그런데 막상 걸어보니 의외로 힘들지 않았다. 하긴 십 킬로미터에 걸친 완만한 오르막이 부담될 리 없다. 정상까지 이 킬로미터에 걸쳐 일백 미터를 오르는 업힐에서 약간 땀이 나고 숨이 찬 정도였다. 일흔을 훌쩍 넘긴 일본인 노부부도 이 언덕길을 무난히 올랐다. 무거운 배낭을 버거워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필요 이상으로 지레 겁먹지 말아야 한다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수리적으로 접근했으면 자명할 일이었다. 이 구간은 밑변이 이 킬로미터, 높이가 일백 미터인 삼각형에 비유할 수 있다. 역 tan 함수로 각도를 구하면 대충 2.86도가 나온다. 서울 남산 국립극장에서 남산타워 버스 정류장 구간의 평균 경사도가 6도이다. 쉬운 축에 속하는 남산 남측 등산로의 절반도 안된다. 얼마나 오르기 손쉬운 길이겠는가!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이라체 대장간의 쎄요 찍기와 수도원에서 와인 시음이다. 순례길을 완주했다는 증명서를 받으려면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셜에 매일 한두 개의 쎄요를 찍어야 한다. 쎄요는 프랑스 루트를 걸었다는 일종의 증빙도장이다. 쎄요가 예쁘기로 유명한 이라체 대장간에서 한국인 순례자 일행들을 만났다. 개중에 인천공항에서부터 만났던 육군 대령출신 김 선배와 수비리 다리 근처에서 잠시 만났던 젊은 남녀가 있어 더 반가웠다.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포도주 시음대에서 각자 저마다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평생 금주해야 하는 내게 매우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기념 삼아 와인을 따라 마신다. 상당히 많은 와인을 수요 하는 만큼 숙성이 덜 된 와인을 제공할 거라 추측했다. 그래도 보졸레누보 정도의 맛은 되겠지 했는데 마셔본 순례자들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그마저도 못 되는 듯싶다. 담근 지 얼마 안돼 탄닌이 너무 강하거나 물을 너무 많이 타 맛이 별로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짐작했다. 옅은 와인 색상을 감안하면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역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나 보다.
위 : 이라체 대장간, 가운데 : 수도원 와인의 샘, 아래 : 햇살 아래 방긋 웃는 무지개
기대했던 하이라이트보다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광활한 개활지의 아름다운 경관과 순례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한국인 순례자들과 구간 일부를 함께 걸었던 동행이 손꼽힌다. 특히 마지막으로 쉬었던 푸드트럭에서 재회해 목적지 로스 아르코스까지 오 킬로미터를 같이 걸었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우선 여럿이 어울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으니 힘이 덜 드는 기분이었다. 누나와 둘이서 걸을 때 보다 체감적으로 시간이 얼마 안 걸린 것 같기도 했다. 순례를 떠나온 젊은이들의 생생한 심경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어 그 의미가 더 컸다.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 오르는 길. 언덕에 오를 무렵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위, 왼쪽)
동행하게 된 젊은이들과 서로 조심스레 자기소개를 했다. 이삼십 년 이상의 나이차를 앞세워 대화를 강제하는 걸 나 스스로 경계했기 때문이다. 수비리에서 만났던 93년생 기혼의 여성 순례객 C. 결혼한 지 삼 년이 넘었다는 그녀는 2세가 생기기 전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혼자 순례를 왔다고 했다. 조카들 나이뻘에 밝은 미소가 어울렸던 처자다. 수비리에서 그녀와 같이 있는 걸 본 탓에 C의 남편으로 오해했던 청년 S. 남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그녀와 잘 어울리는 포근한 인상을 가졌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다. AI가 더욱 발달하면 경쟁력을 잃을까 걱정이 많다고 했다.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왔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군대 제대 후 복학하기 전에 여행 삼아 왔다는 J. 한동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J 역시 향후 진로가 최대의 고민이란다.
디자인이나 컴퓨터 공학은 숫자와 관련된 일을 평생 해온 내겐 문외한의 영역이다. 심도 깊은 의견이나 조언을 해줄 건더기가 없다. 그저 옆에서 동조하며 맞장구치는 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의식을 이야기할 때는 진심을 다해 공감해 주었다. 당장 시급하게 진로를 고민하는 S에게 그간의 사회 경험을 밑천 삼아 굵직한 방향성을 조언했다. 무지한 분야에 오지랖이 될 만한 주관적이며 디테일한 조언을 가급적 배제한 채. 재직 중인 회사에 한동대 출신 팀장이 있었다. 보기 드물게 사고의 폭이 넓은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편견 없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미래 성장산업을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주목하는데 특화된 장점을 가졌다. 한 명의 사례로 일반화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대의 독특한 학풍이 우리 팀장 같은 유능한 인재를 키워냈다고 믿는 편이다. 그래서 J에게 취직 준비를 천편일률적으로 접근하지 말라 충고했다. 한동대 강점을 살려보라 권했다. 필요하면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보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챗GPT가 이 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작업자가 요청하는 노래와 그림을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발전 속도가 경이롭다. 그러나 아직은 학습된 데이터에 기반한 창조이거나 사전에 설정된 제약 조건 내에서 원하는 결과물을 구현하는 수준이다.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클 거라 확신한다. 자유도 백 퍼센트인 AI가 나오려면 인간 감정과 자아가 프로그래밍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장은 불가능에 가깝다. 당분간 AI의 역할은 크리에이티브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크리에이티브의 생산성을 제고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을 근거로 S에게는 디자인 산업의 미래를 너무 어둡게 보지 말라고 충고했다.
공교롭게 김 선배를 제외한 세 명 모두 남양주 출신이다. 도농, 덕소, 이천. 다들 누나가 사는 구리에서 가깝다. 더군다나 도농댁은 누나의 외동딸과 동갑이다. 그래서인지 누나가 세명의 젊은 순례자들을 살갑게 대했다. 나보다 더 편하고 친근하게 신변잡기를 얘기 나누며 길을 걸었다. 머나먼 타국으로 순례에 나설 정도로 젊은이들의 고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들의 번민거리를 공유하며 덜어준 것 만으로 우리 몫을 다했을 거라 스스로를 위안했다.
위 : 순례자들을 위해 연주하는 주민들과 푸드 트럭, 아래 : 로스 아르코스까지 5km 남은 동행길
로스 아르코스까지 동행한 여섯 명이 자유롭게 나눈 대화에서 Led Zeppelin의 ‘Ramble on(433위)’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Ramble on은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다 혹은 긴 산책을 한다는 뜻이다. 이 곡은 반지의 제왕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졌다. 툴킨의 시를 첫 구절에 인용했으며 후반에 골룸, 모르도르를 언급한다. 절대 반지를 찾아 떠나는 고행의 여정처럼 평생의 운명적인 인연을 찾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 곡에서 '연인'을 자신이 찾으려는 '희망 진로'로 바꾼다면 미래를 찾으려는 젊은 순례객들에게 어울리지 않겠나!
Led Zeppelin - Ramble on(1969년, 433위)
Deep Purple의 대표곡 중에 ‘Smoke on the water(426위)’가 있다. 도입부와 곡 중간마다 반복되는 리프가 무척 유명하다. 이 노래가 담긴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스위스로 간 딥 퍼플은 음반 작업 바로 전날, 사전에 녹음장소로 물색해 두었던 카지노 극장에서 콘서트를 관람했다. 그런데 관객이 발사한 조명탄에 불이 붙어 그만 화재가 발생했다. 공연장을 삼킨 검은 연기가 제네바 호수를 뒤덮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어쨌든 돌발 상항에 직면한 딥 퍼플은 녹음 장소와 일정을 시급히 변경해 차질 없이 앨범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삼사 년 전만 해도 Open AI의 챗GPT가 일으킨 AI 혁명이 전 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것을 누가 알았으랴! 빅데이터와 AI가 고급 프로그래밍 인력을 거침없이 수요 하건만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이 언제까지 이어질 거라고 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급변하는 하이테크 시대에 진로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미리 단정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급진전한 기술로 인해 제대 후 복학을 앞둔 청춘이 불확실한 진로를 고민하는 모습에서 연기가 잔뜩 낀 호수를 연상하는 건 지나친 비유일까?
Deep Purple - Smoke on the Water(1972년, 426위)
길을 걷다가 한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어머니와 영상통화를 했다. 한국 시간으로 오후 다섯 시가 넘는 시각. 막내 누나가 준비한 이른 저녁을 드시는 중이었다. 일주일 만에 식구들을 보아서 그런지 둘째 누나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로스 아르코스 초입에서 사람 손을 탄 고양이를 만났다. 일행들을 피하지 않고 얼굴을 비비는 게 무척 살갑다. 집에 두고 온 하쿠와 타타가 그리워졌다. 조만간 집에 아내와 연락할 때 하타와도 영상통화를 해야겠다.
로스 아르코스에서는 사립 알베르게를 예약했다. 평이 괜찮은 아담한 숙소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중년 남성과 벨기에에서 온 팔십 대 할머니와 방을 같이 썼다. 벨기에 할머니는 프랑스 루트를 육 년 동안 세 번이나 완주하셨다고 한다. 체크인할 때 저녁을 함께 신청했다. 일층 다이닝 룸에서 예약한 순례객들과 만찬을 함께 했다. 각자 짧은 자기소개를 마치고나서 가까이 앉은 이들과 주절주절 정담을 나누었다. 출신과 인종이 달라도 까미노를 함께 걷는 공감대가 친밀감을 높여주었다. 빠르게 대화를 나누다 되면 내용을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어 아쉬웠고 하고픈 표현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 때가 있어 답답했다. 정작 언어소통의 어려움보다 불편한 점이 따로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들과 격의 없이 이야기하는 상황이었다. 상당히 어색했다. MBTI 중 찐 ‘I’ 성향의 한계다.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지 몰라도 서양인들은 대체로 붙임성이 좋다. 생면부지 사람들과 잘 녹아들어 융합한다. 누구와도 몇 마디를 나누면 어느새 친숙해졌다는 듯이 거리낌 없이 웃으며 얘기한다. 반면에 나는 약간 거리를 두는 게 익숙하고 편하다. 서로가 녹아드는 화학적 융합보다 기계적 결합에 거부감이 덜하다. 까사 데 아부엘라의 저녁 만찬은 제각기 출신지가 다른 이방인들이 까미노에 녹아들어 순례자로 일체화되는 융합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대화의 한계와 내성적 성향으로 인해 퓨전보다 크로스 오버에 그쳤다. 안타까웠다.
퓨전이 제대로 적용된 사례가 Elvis Presley의 ‘Blue suede shoes(423위)’이다. 1956년 발표된 이 곡은 최초의 로커벌리 곡 중 하나로 꼽힌다. 로커벌리란 록과 컨트리 뮤직이 융합된 퓨전 장르이다. 로큰롤이 태동할 무렵에 유행했다. 음악용어 중 두 장르가 섞여 새로운 장르로 재탄생하는 것을 퓨전이라 칭한다. 어떤 장르에 이질적인 다른 장르를 섞어 만든 것을 크로스 오버라 부른다. 일종의 융합과 결합의 차이겠다. 원곡은 칼 퍼긴스가 1955년에 도입했는데 유명세를 타지 못했다. 이후 교통사고를 당한 칼을 위로하기 위해 엘비스 프레슬리가 트리뷰트 했다. 대박이었다.
Elvis Presley - Blue Suede Shoes(1956년, 423위)
위 : 로스 아르코스 초입 동물농장과 길냥이, 가운데 까사 데 아부엘라 알베르게와 성당, 아래 : 순례자들의 만찬과 예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