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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 07. 2024
[4일 차] 용서의 전제?!
All Apologies - 과오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우선
4일 차 팜플로나 – 푸엔테 라 레이나
오늘도 비가 많이 내리는 와중에 숙소를 나섰다. 숙소 주변이 번화가였나 보다. 취객들의 흔적이 인도에 한가득이다. 너저분하게 버려진 캔과 플라스틱 컵, 먹다 버린 안주를 피해 조심스레 구도심을 빠져나왔다. 순례자들이 팜플로나 시외로 향하는 가리비 표식과 까미노 화살표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들었다. 운이 좋았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공원을 따라 교외로 접어들 수 있었다. 한 시간가량 빗길을 걸어 도착한 시수르 메노르 마을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바가 문을 닫았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버스 정류장에서 비를 피해 챙겨 온 빵과 사과로 요기를 했다. 시수르 마요르를 지나면서 광활한 구릉지에 온통 밀밭이 펼쳐졌다.
까미노를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 반이 지날 무렵부터 비가 조금씩 잦아들어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까지 그치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자길길에 흘러내리는 빗물이 뿌연 회색이다. 아마 토질에 석회석 성분이 많은가 보다. 노랗게 영글어가는 밀알을 가득 품은, 무릎까지 자란 초록색 밀대와 졸졸 흐르는 탁한 연회색 빗물이 대비된다. 구릉 사이에 낮게 깔린 구름과 녹색의 초원 사이로 이어진 까미노에는 몇몇 순례자들만이 저마다의 길을 걷고 있다. 얼마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가!
팜플로나에서 10.5km 떨어진 구엔들라인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다. 도심을 벗어날 때 얼핏 봤던 아주머니들과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눴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파트리시아 자매다. 한국인 친구가 있어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진 분들이다. 쉴 때마다 자주 마주쳐 초반길에 길동무가 되었다. 특히 파트리시아의 환한 미소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북한에 매우 적개심을 가진 캐나다 노부부 순례객도 만났다. 복잡한 도시가 싫어 밴쿠버 아일랜드에 거주하신다고 했다. 조카들이 밴쿠버에서 유학을 했던 터라 반가워 말을 좀 더 붙였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김정은을 증오한다고 말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핵개발에 올인하는 게 너무도 싫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푸틴처럼 최악의 배드 가이라고 한다. 80년 가까이 이어오는 북한식 전제정치에 한민족으로서 낯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외국인이 북한을 비난하는 말을 들으니 묘한 기분이었다. 나도 북한 지도부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남북이 다른 나라이겠지만 같은 민족으로서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서로가 어색했는지 잠시 말없이 걷다가 먼저 간다며 부엔 까미노의 인사를 남기고 앞서 나갔다.
평화로운 밀밭 길 위에서 북한과 러시아의 독재자, 미국을 분열시킨 전직 대통령이 화두에 올랐다. 하물며 오늘은 초반 순례길의 하이라이트인 용서의 언덕을 넘는 날이 아닌가? 핵무기, 전쟁과 종교갈등, 세계 공존을 위협하는 신냉전. 까미노에는 이런 단어들이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도 가자지구에서 무분별한 군사 작전으로 말미암아 테러와 하등 상관없는 팔레스타인 시민들이 안타깝게 희생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 비난 속에서도 이스라엘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그들에게서 정녕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엿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점에서 George Harrison의 ‘My Sweet Lord(454위)’는 용서의 언덕을 오르는 길에 어울린다. 조지 해리슨은 노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할렐루야), 힌두신 크리슈나를 연호한다(Hare Krishna). 그럼으로써 어떤 종교이건 상관없이 절대자를 믿는 모든 이들이 신을 영접하여 신의 길을 함께 하기를 갈망한다.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반목하다가 끝내 전쟁으로 비화하는 어리석은 인류의 첨예한 갈등이 사라지기를 갈구했을지 모른다.
George Harrison - My Sweet Lord(1970년, 454위)
드디어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교차하는 용서의 언덕에 올라섰다. 언덕 왼편에는 기념비가 조성되어 있고 오른쪽에 청동으로 조형된 12명의 순례자와 말, 나귀가 녹슨 채 세워져 있다. 그 아래로 넓은 초원이 훤하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 오른 순례자들은 모두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왜 용서의 언덕이라 이름 지어졌을까?, 누가 누구를, 무엇을 용서하라는 건지?’
조형물에는 어떠한 설명이 없어서 그 답을 알 길이 없다. 다만 나는 바람의 길이 별의 길과 교차하는 곳이라는 조형물에 새겨진 글귀에서 윤동주의 서시를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다. 시인은 잎새에 이는 미세한 바람결에도 괴로워했다. 사위를 가리는 그믐밤에 빛이 더 발하는 별을 노래했다. 이 같은 섬세한 마음으로 죽어가는 것을 사랑했다. 그는 어쩌면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져야 할 양심과 상식이 흔들려 괴로워하고 하늘로 되돌아가 별이 되었을 넋을 고이 기리는 마음으로 노래했을 것이다. 인간다움과 역사에서 잊힌 이들을 추모하는 마음이 만나는 이곳이 용서의 언덕이 란 생각이 들었다.
용서의 언덕 유래를 알고 싶어 숙소에 도착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용서의 언덕에는 1996년까지 성모를 기리는 낡은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왼편의 기념비가 성당이 철거된 것을 기억하기 위해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야고보를 기리는 순례길이 발흥되자 이 성당은 순례자에게 안식을 제공하고 아픈 이들을 위한 병원을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유럽 각지에서 여기까지 이른 순례자들의 죄를 모두 사해 주었다고 한다. 비록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이르지 못해 객사하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순례를 그만둘지라도 말이다. 용서의 언덕은 결국 신으로부터 순례자가 용서를 받는 곳이었을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은 내가 처한 고통과 상황마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한 일이라며 이를 기꺼이 달게 받아들인다. 불교에서는 어쩌면 상대의 잘못을 덮어주거나 잊는 것 이상으로 이러한 고통을 있게 해 준 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용서라 여길는지 모른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거니와 깊은 수양에서 비롯된 성인의 인품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진정한 용서는 죄를 범한 자가 자신의 죄를 낱낱이 밝히는 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내겐 세속적인 삶에서 참회 없는 용서란 있을 수 없다. 작년 이 언덕을 오르는 내내 살면서 무수히 저질렀을 내 죄를 사하기 위해 과오를 반성하기는커녕 누구를, 무엇을 용서할까 고민했던 나 자신이 무안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용서의 언덕 조형물 앞에서 누나와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 사이에 비구름이 물러나고 구름 사이로 해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내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언덕을 내려가는 계단길 왼쪽 옆으로 정체불명의 커다란 돌기둥들이 둥그렇게 둘러서 있었다. 얼핏 보면 스톤헨지나 고인돌 같은 모양새다. 궁금증이 발동해 안내판을 읽었다. 이 돌기둥들은 스페인 내전으로 정권을 잡은 프랑코 정권에 학살당해 암매장된 92명의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였다.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30년 동안 20여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진다. 가운데 가장 큰 돌기둥은 프랑코 정권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의미한다. 그 주위로 둥그렇게 둘러싼 작은 돌기둥은 인근 마을별로 희생자 이름을 새긴 상징물이다. 용서의 언덕을 지나치는 순례자들 중에 이곳에 눈길을 돌리는 이들이 몇이나 될지 궁금했다. 적어도 한국에서 읽었던 순례자들의 수많은 기행문 어디에도 희생자를 추모하는 이 기념물을 주목하지 않았다. 용서의 언덕이라 명명했다면 마땅히 이곳이 더 부각되도록 세심히 배려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컸다. 하늘의 별이 되었을 억울한 희생자들은 과연 자신을 죽음으로 이끈 프랑코 정권에 부역했던 이들을 용서했을까? 부끄러운 역사라 하여 애써 외면하거나 이를 부정하면 점차 역사를 왜곡했다는 사실에 둔감해지고 종국에는 역사를 날조하기에 이른다. 나치즘을 뼈저리게 반성한 독일과 21세기 한복판에서 대공영의 꿈을 다시 이루려 발버둥 치는 일본이 좋은 예이다. 구태여 이웃나라의 몰염치를 찾을 필요가 없다. 고사성어에 이책인지심 책기(以責人之心 責己) 이서기지심 서인(以恕己之心 恕人)란 말이 있다.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신을 꾸짖고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는 뜻이다. 일본의 과거사 부정을 탓하기 전에 역사적으로 명백한 5.18 민주화 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삐뚤어진 극우가 반면교사해야 할 고사이다. 누구라도 참회 없는 반성은 어린아이에게 쥐어준 칼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오늘 일정의 메인은 용서의 언덕이다. 12인의 순례객 동상과 독재에 맞서다 죽임을 당한 92명의 투사들의 유해가 묻힌 언덕. 자기 성찰과 참회, 용서가 주제일 수밖에 없는 이곳에 어울릴 명곡이 있다. 바로 Nirvana의 ‘All apologies(455위)’이다. 록밴드의 이름은 번뇌와 고뇌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는 열반의 영어식 표현에서 따왔다. 밴드의 리더인 커트 코베인이 부인과 딸을 위해 작곡한 노래이다. 그래서인지 곡 전반에 평화, 평안, 행복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무엇보다 작곡가는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행동에 괴로워하고 반성하며 깊은 사과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가 진심을 다한 참회를 했어도 고통에서 벗어나기 역부족이었기에 자살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Nirvana - All Apologies(1993년, 455위)
하산길에는 비가 그쳤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 가까울수록 그동안 감췄던 파란 하늘이 제 모습을 뽐낸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오는 길은 온통 물기 가득한 자갈밭이라 미끄러질까 조심스러웠다. 숙소에 도착하니 누나 오른발 검지 발톱에 염증이 심하게 올라왔다. 병원에 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옆 침대에 배정받은 한국인 순례객이 선뜻 항생제 연고와 밴드로 아픈 부위를 처치해 주었다. 게다가 며칠을 더 치료해야 한다면서 소염제와 항생제를 두 봉지나 나눠주었다. 우리 일행이 만난 첫 번째 천사였다-아니 그 이전에 이미 만난 천사들을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예상치 못한 고마움에 만찬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파리에 사신다는 아주머니는 아들 둘과 유럽 여행을 하기 전에 자전거로 혼자 순례하는 중이라 했다. 전기 자전거라 그다지 힘들지 않는다고 하지만 보통 용기가 아니다. 성격도 시원시원한 게 누가 봐도 여장부 스타일이다. 도보와 자전거 순례는 속도가 매우 차이가 난다. 당연히 다음 날부터 만날 수가 없었다. 단 하루만의 인연이었지만 그분도 부엔 까미노 했기를 뒤늦게 기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