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쌀쌀한 아침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짐을 꾸려 배낭을 메고 출발하려는 찰나에 이슬비가 흩뿌린다. 우비와 라텍스 비닐장갑을 착용한 다음에 길을 나섰다. 하루 묵었던 페레그리노스 알베르게 광장 앞에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남은 거리가 칠백구십 킬로미터라 적힌 표지판이 있다. 프랑스 루트의 공식 인증거리는 칠백칠십팔 킬로미터다. 어제 이십사 킬로미터를 걸은 걸 감안하면 칠백오십사 킬로미터 남았을 텐데 의아했다. 자동차 도로 기준이겠거니 넘겨짚었다. 출발하느라 부산한 순례객들은 안중에 없다는 듯 이정표 오른편 너른 초원에서 어미말과 망아지가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는다. 까미노 도중에 만나길 상상했던 목가적 풍경 중 한 장면이다.
론세스바예스 페레그리노스 알베르게 앞
출발지인 론세스바예스는 해발 구백오십이 미터, 오늘 목적지인 수비리는 고도 오백이십팔 미터다. 가끔 짧은 업힐 구간을 만나지만 전체적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부슬비에 땅이 젖은 진창길이라 걷기가 수월치 않다. 게다가 에로고개에서 수비리까지 마지막 사 킬로미터 내리막 암반 길은 맑은 날에도 미끄럽다는 악평이 자자하다. 혹시 모를 낙상을 신경 써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비리로 가는 코스가 전반적으로 앙꼬 없는 찐빵처럼 싱겁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매일 걸었던 순례길이 모두 인상적인 건 아니다. 일 년이 지났어도 컬러풀한 스냅샵처럼 기억이 뚜렷한 코스가 있다. 반대로 간이 안 밴 음식같이 걸었던 장면을 떠올리려 애써도 끝끝내 흐릿하기만 한 일정도 부지기수다. 오늘은 후자에 가깝다. 아마 우중에 피레네를 넘어야 했던 긴박감이 사라진 데서 오는 허탈감과 내일 만날 순례길 첫 번째 대도시인 팜플로나에 대한 기대와 설렘 사이에서 오는 어정쩡한 기분 탓이라 여겼다. 코스 난이도를 매긴다면 오 점 만점에 삼 점을 줄 만하다. 난이도는 어제 나폴레옹 루트나 오 세브레이로에 비하면 구름을 걷는 수준이지만.
물론 무색무취한 코스라 해도 순례를 이어가는 의미까지 퇴색되지는 않는다. 오늘 만난 첫 번째 마을은 헤밍웨이가 묵었다는 부르게테 호텔이 유명하다. 이곳에서 ‘무기여 잘 있거라’를 집필했다고 한다. 길동무 삼아 걸은 목장 울타리 안쪽으로 어제 짙은 운무로 인해 제대로 보지 못한 말과 양들이 지근거리에서 노닐었다. 피톤치드가 넘실대는 고즈넉하고 인적이 드문 숲 길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운치를 만끽했다.
순례객들이 줄 지어 걷는 모습(위 왼쪽)과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부르게테 호텔(위 오른쪽), 넓은 초원과 피톤치드 넘실대는 한적한 숲길과 목장의 양떼
론세스바예스엔 알베르게가 하나 밖에 없다. 한 숙소에서 시차를 두고 출발한 탓일까? 순례객들이 제각기 무리를 이뤄 띄엄띄엄 줄 지은 모습에 미소가 절로 인다. 비로소 까미노에 왔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저마다 까미노에 열중했다. 그중 연세 지긋한 분들이나 노부부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순례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연로한 순례객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비록 걸음걸이가 조금 느릴지라도 서로를 챙기며 다정히 걸어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돌이켜 보니 사십 대까지는 길을 걸으면 아내 발걸음에 맞춰 당연한 듯 손을 맞잡고 걸었다. 요즘은 신경 쓰지 않으면 손 잡는 걸 잊는다. 나도 모르게 아내보다 반 보 앞장서기 일쑤다. 어느새 애정이 작아진 걸까? 아내가 시골길을 오래 걷는 걸 그다지 즐겨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혼자 순례를 왔다.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완주해 귀가하면 예전처럼 다정히 손 잡고 두런두런 신변잡기를 얘기 나누며 산책하리라 다짐해 본다.
칠 킬로미터를 걸어 에스피날 마을에 들어섰다. 첫 번째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나는 까미노 중에 오렌지 주스와 콜라를 주로 마셨다. 노변에 위치한 많은 카페들이 오렌지를 즉석에서 짜준다. 순도 백 퍼센트짜리다. 가격은 대체로 이삼 유로 수준. 현지 물가로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기준으로는 괜찮은 가격이다. 에스피날로부터 칠 킬로 가량을 더 걸어 비스카레타와 린소아인 마을 초입의 카페를 지나쳤다. 또 있겠지 생각했다. 에로고개를 넘기 전에 쉴 참이었는데 카페가 보이질 않는다. 쉴만한 곳을 찾았다.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언덕길이 막 시작되는 주택가 앞에 놓인 기다란 의자에서 쉬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덩치가 큰 대형견이 연인들에게 먹이를 달라는 듯 꼬리 친다. 누나나 나나 개를 무서워하는 편이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용기 내 앉았다. 앞으로 적당히 쉴 곳이 있으리란 보장이 없거니와 만의 하나라도 옆에 의지할만한 남성 순례객이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눈방울이 동글동글한 게 무척 순해 보였다. 평소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먹이를 자주 얻어먹은 것 같다. 우리에게도 바짝 다가서서 사뭇 살갑게 굴며 먹이 달라 칭얼거렸다. 등골이 살짝 오싹해졌다. 그래도 겁먹은 티 내지 않고 바게트 몇 조각을 떼어 던져주었다. 한참을 더 달라며 우리 주위를 서성이다가 다음으로 오는 순례객들의 인기척에 그쪽으로 꼬리를 치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진다. 그제야 마음 편히 사과와 바게트를 주섬주섬 챙겨 먹었다.
에스페날의 첫 번째 카페, 에로고개에서 만난 동네 강아지
허기를 대충 때우고 조금 더 쉴 작정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물탱크 뒤에서 길냥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에 두고 온 반려묘 하쿠와 타타가 벌써 보고 싶어졌다. 아이에게 먹을 걸 주고 싶은데 길냥이가 먹을만한 게 없다. 적당히 거리를 두어 우리와 눈을 한번 맞추고 나서 이내는 흥미를 잃었는지 나왔던 곳으로 되돌어갔다. 후일담이지만 까미노에서 길냥이들을 많이 만났다. 한두 마리 빼고는 모두 건강해 보였다. 개중에는 주민들이 보살펴 주는 마당냥이들도 제법 있을 것 같았다. 병에 걸려 기력을 잃은 안타까운 녀석들도 드물게 있었다. 까미노의 길냥이들에게 주님의 평화와 부처님의 자비가 깃들기를 바랐다.
전 세계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진행 중이다. 고성장하는 일부 후진국들을 제외하고는 글로벌 전반으로 경제성장률이 기조적으로 낮아지는 추세이다. 세계 공통적으로 출산율 저하가 지속된다. 고령화 시대에 대한 우려 못지않게 MZ세대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좌절이 심각한 지경이다. 하쿠와 타타, 이브(2023년 말에 구조한 새끼냥이)가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남들 보기에 필요이상으로 돌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집사 된 입장에서 나와 함께 사는 반려묘를 정성스레 부양하며 그들의 동물권을 강조하는 건 인지상정의 일이다. 그러나 반려동물에 대한 관심 만큼 미래 희망을 잃은 청년 세대와 소외계층에 대해서도 애정과 관심을 기울일 사회적 의무가 있다. 다음 세대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경시하는 동물권은 어불성설이라 믿는다. 이런 맥락에서 갈등과 좌절에 빠졌던 미국 청소년들을 노래한 록 그룹 Alice Cooper의 ‘I’m eighteen(482)’이 주는 메시지에 주목하고 싶다. 투표권이 없고 술을 마실 수 없는 열여덟 살에 베트남 전쟁에 징병되어 끌려간 미국 청소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우며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이 부담되어 결혼과 출산을 태업하는 우리 청소년들을 위해 정부가 제대로 된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수립하게끔 성숙한 시민들이 건전한 방법으로 압력을 행사할 시기인 것 같다.
Alice Cooper - I'm Eighteen(1970년, 482위)
수비리에 다가설수록 날이 점차 맑아졌다. 언덕을 다 내려와 수비리 초입의 다리가 보일 즈음엔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하늘이 제법 파랗다. 리오 아르가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발렌틴 바에 갔다. 구글 평점이 꽤 높은 소문난 마을 맛집이다. 이 집을 고른 이유가 있다. 한국의 양념치킨과 맛이 비슷하다는 닭봉 튀김을 먹기 위해서다. 순례에 적응하기 바쁠 초반에 입맛을 돋아줄 메뉴로 적당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게 사정으로 며칠 동안 닭봉 튀김 메뉴 주문이 불가했다. 로스트 치킨과 폭립을 대신 주문했다. 닭봉 튀김을 너무 기대했나? 주문한 메뉴는 그럭저럭 평범한 맛이었다. 그래도 음식 남기는 게 꺼림칙해 가급적 다 먹을 요량으로 누나에게 강권한 게 화근이었다. 피곤한 몸에 평소 즐기지 않는 메뉴를 억지로 꾸역꾸역 먹은 탓인지 식사 후 누나 컨디션이 나빠져 저녁을 생략했다. 순례에 필요한 궂은일은 동생에게 다 맡기고 자신은 마음 편하게 몸만 왔다며 미안해하는 누나는 순례 기간 동안 무리하거나 퉁명스러운 내 요구를 전부 받아 주었다. 순례를 할수록 미안함이 커졌는데 정작 누나에게 이를 내색하지 못했다. 다음에 뵐 때는 뒤늦은 사과를 드릴 작정이다.
수비리 초입 풍경, 다리 바로 옆에 위치한 리오 아르가 알베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중에 작은 마찰이 있었다. 순례자들의 일상적인 행색과 확연히 다르게 모델처럼 화사한 드레스로 치장한 네 명의 여성 순례객들이 가게에 들어왔다. 이미 만석이라 출입문을 나가 입구 바깥쪽에 비치한 오크통에 둘러섰다. 주문한 맥주와 와인을 즐기며 왁자지껄 자기들끼리 정담을 나누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입구를 나서는 중 동양계 혼혈 여성과 살짝 부딪혔다. 얘기에 심취해 몸을 돌리다 밖으로 나오는 나를 보지 못해 살짝 부딪혔다. 피한다고 피했지만 서로 어깨가 부딪힌 것이다. 가벼운 사과를 기대했다. 웬걸, 마치 내가 일부러 부딪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째려본다. 순간 당황해 제대로 말이 안 나왔다. 굳은 표정으로 바라만 보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그냥 되돌아섰다.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마음 상한 걸 가슴에 새겨 둔 것이다. 정체 모를 사 총사와의 악연이라면 악연의 시작이다.
가능하면 업은 쌓지 말아야 한다. 그때 일을 다시 회상해 보니 내가 나서서 먼저 미안하다고 했으면 서로 오해를 풀 수 있었을 것 같다. 집을 떠나 머나먼 스페인 북부 산간 마을까지 순례를 온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미국을 대표하는 록 밴드 Foreigner의 ‘I want to know what love is(476위)’의 가사가 내가 맞닥트린 상황과 어울렸다. 사람들은 어제 올랐던 피레네 산처럼 묵직하게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세상을 벗어나기를 원한다. 누구나 인생에서 맛봐야 하는 상심과 고통이 가득한 외로운 삶을 바꾸기 위해 멀고 먼 여행을 한다. 자신의 실수를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순례객에게 진에를 퍼불 게 아니었다. 나부터 따뜻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포근한 마음씨를 베풀어야 했다고 후회막심이었다. 이제는 소용없는 후회막급일 뿐이다. 하드록에서 더 이상의 진전을 이어가지 못한 밴드가 소프트록으로 선회해 만든 대표곡이 바로 이 노래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았지만 서구에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팔십 년대를 대표하는 명곡이다. 1984년 그래미 어워드의 ‘올해의 노래’로 유력했으나 미국의 팝스타들이 협연한 USA for Africa의 ‘We are the world’의 돌풍에 밀렸다. 포리너로서는 매우 아쉬웠을 일이다.
Foreigner - I Want to Know What Love Is(1984년, 476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