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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May 17. 2024

[1일 차] 지레 겁먹은 피레네 산행

Desperado - 마음의 벽을 허물고 문을 열자

  둘째 누나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완주한 감흥을 제대로 맛보고 나서 천천히 정리하자고 했는데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다. 정말로 쏜살처럼 일촌광음의 시간이 지났다. 1년이 지나도 하나하나 또렷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는 반면 벌써 기억이 가물 거리거나 헷갈리는 순간들이 있다.  더 이상 늦추면 안 된다는 의무감에서라도 뒤늦은 기행문을 쓰려한다.


  본문 중에 삽입될 롤링스톤지 선정 위대한 팝송 500대 명곡을 무손실 음원으로 업로드했다. 브런치 회원들께서 재미있게 감상하시기를 바란다.




2023년 5월 11일 생장 파에르 포흐 – 론세스바예스 24.2km


  어제 순례자 사무실 봉사자가 내일 정상 부근에 눈이 내릴 거라 안내했다. 숙소인 지트 비데안 주인장 또한 피크에서 내일 영하 2도에 눈이 올 거라 경고하였다. 우기의 끝자락에 강설 예보가 쉽게 믿기지 않았다. 정상보다 500미터가량 낮은 목적지 론세스바예스의 날씨 예보가 최고 8도에 그치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초행길에 눈이 내린다고!’ 살짝 긴장이 왔다. 주인장이 코스 얘기를 해준다며 저녁신청을 권했다. 미리 봐둔 식당이 있어 외식하겠다고 하니 밤 9시에 1층 응접실로 오라 했다. 약속시간에 내려갔다. 그런데 웬걸, 정작 주인은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신청한 숙박객들과 사담 나누기 바빴다. 나를 보곤 이내 귀찮은 듯이 종업원을 불러 대신 코스를 설명하라고 한다. 뭐 다른 게 있나 했지만 순례자 사무소의 설명과 똑같았다. 만찬을 신청받으려는 낚시였나 보다. 앞으로도 순례객을 배려하는 듯한 호객을 얼마나 겪을는지.


  인천공항과 스키폴 공항 환승 게이트에서 만났던 순례자 김 모 선배가 우연찮게 같은 숙소에서 머물렀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짐을 꾸리고 김 선배와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출발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궂은날에 조난을 당할세라 우비, 스패츠에 장갑 위로 라텍스 고무장갑으로 중무장했다. 나폴레옹 코스와 우회길인 발카를로스 코스의 분기점을 지나 언덕이 이어지자 예열되었는지 누나가 잠시 정비하자고 하신다. 도로변 가정집 차고에서 비를 피할 수 있어 껴입은 옷을 배낭에 넣어 재정비한 다음 다시 길을 나섰다. 누나는 스틱을 처음 써본 터라 걷는 본새가 좀 어설펐다. 아직 노르딕 워킹 자세로 스틱을 쓰지 못해 불편해 보였다. 차츰 나아지겠지 하며 앞서 가며 스틱 쓰는 법을 재차 알려드렸다.


  끝없을 듯한 언덕이 이어지는데 비는 거세고 바람마저 세차게 불기 일쑤, 설상가상으로 안개가 짙어 생생한 녹음의 피레네 초원을 보기가 어려웠다. 걷는 내내 경치는커녕 비를 쫄딱 맞을 생각에 나폴레옹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자며 스스로에게 위안을 했다.


  한국에서 순례를 준비할 때 몇 가지 나름의 로망이 있었다. 첫째 나폴레옹 길을 걸으며 피레네의 절경을 심취하기. 둘째 피레네에서 하루를 묵으며 은하수를 감상하기. 셋째 콤포스텔라 대성당 광장에서 멍 때리며 성당을 바라보기. 넷째 세계 2위의 와인 생산국인 스페인에서 가성비 일품인 와인과 맥주, 커피를 원 없이 즐기기. 예상치 못한 건강 문제로 마지막 희망은 일말의 여지없이 무산되었다. 순례길을 완주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목표이기도 해서 1박 2일의 피레네 산행에 거는 기대가 무척 컸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일정 변경과 혹시나 했던 날씨에 눈에 담기 벅찰 정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포기해야 함을 못내 아쉬워하던 차였다. 조금씩 비가 잦아들다가 멈춘 후 운무가 순식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티끌하나 없이 새파란 하늘과 물기 머금어 더욱 짙어진 초록색 초원과 언덕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악천후 속에서 로또를 맞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하나는 건졌다는 마음에 오리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생장 피에르 포흐에서 오리손 산장 가는 길


  오리손까지 해가 쨍하게 나자 아예 비가 그쳤기를 바랐다. 그간 조금씩 지체된 탓에 론세스바예스에는 빨라야 세 시가 넘어 도착가능했기 때문이다. 잠시 쉬면서 만난 한국인 순례객 중 한 분이 예약을 했어도 3시까지 가야 노쇼가 되지 않는다고 일러줬다. 처음 듣는 정보라 긴가민가 하는 불안감이 스쳤다. 수차례 알베르게에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 된다. 예약이 취소되면 몇 km 더 걸어야 한다. 누나에게 부담이 클 거란 걱정에 답답한 나머지 까친연 단톡방에 문의했다. 선결제 예약을 해서 늦게 도착해도 침대배정을 받는다는 안내를 받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순례에 익숙지 않은 초반 여정에 까친연 순례자 4, 5월 단톡방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조언을 해주신 분들께 뒤늦게 고마움을 전한다.


  순례 첫날의 관심사는 온통 누나에 쏠렸었다. 산행 경험이 거의 없는 누나가 비가 쏟아지는 피레네를 무사히 넘을 수 있을지 우려했던 탓이다. 순례 몇 개월 전부터 누나가 매일 10km 내외를 꾸준히 걸었던 효과가 있었다. 속도가 조금 느릴지언정 기복 없이 꾸준하게 잘 걸었다. 정작 사달은 내게서 일어났다. 날씨걱정, 누나걱정에 신경을 쓴 때문일까? 다시 내리기 시작한 비와 지체된 시간에 신경이 곤두선 가운데 오리손을 나서자마자 허벅지가 경미하게 떨리는 근육경련 징후가 나타났다. 순간 당황했다. 아직 갈길이 17km 넘게 남았는데 쥐가 났다. 숙소에 늦게 도착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비를 맞는 와중에 조난을 걱정해야 했다. 수개월 동안 순례를 준비할 몸을 만들어 왔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아! 삶의 마지막 찰나에 지나온 일생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말을 절감했다. 참고 걸어가지만 점차 발걸음이 무뎌진다. 뒤 따라오던 순례객들이 괜찮냐고 물으며 앞서나간다. 경련이 점점 심해져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아스팔트 길 옆 수풀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나를 불러 보아도 듣지 못했는지 점차 간격이 벌어져갔다. 어쩔 도리가 없어 다리를 주무르고 있을 때 멀찌감치서 누나가 돌아봤다. 곧 되돌아와서 걱정 어린 시선으로 괜찮냐고 물으신다. 늦어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가자며 내 속도에 맞추어 걸으셨다. 2~3km 걸었을까? 경사가 이어진 언덕길에 잠시 너른 평지가 보여 잠시 숨 고를 공간에서 자리를 잡았다. 행동식을 먹고 스트레칭을 했다. 비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컨디션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두 시간이 좀 지나자 평소처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라이딩에 빠져 산행에 뜸하지만 나름 산을 제법 잘 탄다는 자부심에 충만했던 나로서는 꽤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악천후와 조난. 두 단어가 현실로 다가와 죽음의 공포를 선사할 줄이야!  산티아고 순례를 다룬 영화 ‘The Way’의 한 장면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부자간의 불화로 아들과 사이가 멀어진 주인공이 프랑스 루트 순례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던 중 악천후에 휩쓸려 길을 잃어 사망한 아들의 소식을 듣고 생장 피에르 포흐로 향한다. 아들의 배낭에서 까미노 안내서를 읽은 후 그는 아들이 죽을 수도 있는 순례길을 나선 까닭을 찾기 위해 자신만의 까미노를 나선다는 내용이다. 조난의 두려움 다음으로 순례 여행을 반대했던 아내와 먼 타국에서 날아올 험한 소식에 황망하실 어머니가 떠올랐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공포를 짓눌러서인지 조금씩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난을 당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노래 한 소절을 무의식적으로 불렀다. 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489위)란 곡이다. 이 노래는 사실 조난 내지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애인과 헤어져 혼자 살아야 하는 무서움에 겁이 난 노래 속 주인공이 자아의 힘을 발견해 결국 다시 돌아온 연인을 외면하면서  나는 살 거란 자신감을 얻는다는 가사이다. 여기에 무척이나 역동적인 리듬이 저절로 힘을 내게 하는 곡이다.  실직해 어려운 나날을 겪던 작곡가 디노가 예전에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 주제곡이 TV에서 흘러나올 때 앞으로 매사가 잘 될 거라 믿음에 다시 작곡가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얻어 작곡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나 역시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게 되자 후렴구를 너무나도 자연스레 불렀다. 나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되뇌면서. 자신감이 되살아 컨디션 마저 회복되었다. 그래서인지 남은 순례길은 생각보다 평이했다. 필요 이상의 걱정과 비상사태를 상정하는 마음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나폴레옹 루트를 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북한산 백운대를 오를 정도의 체력이면 누구나 힘들지 않게 트레킹 할 수 있는 코스라 여겨진다. 단지 1,270 미터 가량의 고도를 21km에 걸쳐 완만히 지루하게 올라야 한다. 한라산을 오른 이들이라면 성판악 코스의 지루함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다.


글로리아 게이너 - I Will Survive(1978, 489위)


티바울트 십자가상 분기점


   나폴레옹 루트의 정상인 뢰푀데르 언덕에서 하산할 코스를 다시 확인했다. 대부분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선택하는데 미국인 남녀 순례자들은 왼쪽의 아스팔트 길을 고집한다. 포장길이라 편해 보였지만 새로운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여러 차례 숙지했던 샛길로 내려가며 여러 순례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무리를 지어 하산했다. 하산길 막바지에 눈앞에 성당터가 보였지만 무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 지그재그로 이어진 길을 따라 성당터로 내려갔다. 성당터에 도달할 즈음 미국인 남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인생이란 레이스도 이와 같다. 뒤쳐지거나 우회길을 꽤 멀리 둘러 가는 것처럼 보여도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앞서 간 경쟁자를 따라잡아 추월할 수 있는 것이 우리네 평범한 삶이다. 좀 더 빨리 도착하려면 막바지 쇼트커트를 선택했어야 하는 것처럼 인생의  지름길은 꼭 승부를 걸어야 만 때에만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내가 가진 패를 의심하지 말고 최선, 최고의 패라 믿어야 한다.


   ‘Desperado(494위)’는 미국을 대표하는 락밴드 중 하나인 이글스의 두 번째 정규앨범 음반에 수록된 곡이다. 내가 이글스 노래들 중에 호텔 캘리포니아와 함께 최애 하는 곡 중 하나다. 호텔 캘리포니아의 몽환적인 느낌을 좋아한다면 절망에 빠져 죽음마저 불사하는 자포자기의 악당이 방황을 멈추고 제 자리로 돌아오게끔 심연의 평화를 주는 멜로디와 가사가 마음에 와닿는다. 다이아몬드 퀸을 고집하지 말고 하트 퀸이 너의 최선의 패라는 걸 외면하지 말라는 구절에서 지난날의 내 삶을 반추하게 된다. 내 앞에 충분히 좋은 패들이 놓여 있는데 가질 수 없는 것들만 바라고 있으면 느끼게 되는 건 이룰 수 없는 탐욕에서 비롯되는 삶의 좌절일 것이다. 젊은 시절에도 무수히 그러했지만 하늘의 명을 깨달을 시기가 절반이 지나 수 년내로 모든 말을 순리에 따라 들을 수 있을 요즘도 과욕에 시달리는 경우가 심심치 않다. 가사처럼 이제는 심연에 견고하게 둘러쳐진 벽을 허물고 마음의 문을 열어 비 온 뒤의 무지개를 맞이하고 싶다. 너무 늦기 전에 말이다.


 이글스 - Desperado(1973, 494위)


  순례를 다녀온 유투버들의 첫날 영상 중 대개 생장에서 티바울트 십자가상까지 촬영한 분량이 전체 영상의 2/3에서 3/4  가량을 차지한다. 그 이후는 설렁설렁 대충대충 찍는데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막상 걸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15km 정도를 걸으면서 체력이 상당히 소진되어 남은 6~7km 오르막 길에 만사가 귀찮아졌을 게 분명하다. 초반에 페이스를 잘 관리한다면 티바울트 십자가상 분기점에서 뢰푀데르 언덕까지 수월하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남매는 나폴레옹길 정상에서 눈을 맞지 않았다. 예상보다 일정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앞서간 순례객들이 전하기론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한다. 역시 인생은 새옹지마이다.


  론세스바예스에서의 저녁은 예상대로였다. 썩 훌륭한 식사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시장기를 속이기에는 충분했다. 옆 좌석에 앉은 친구지간으로 세 명의 프랑스 순례자들과 나눈 담소가 그나마 만찬을 빛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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