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운설 May 13. 2024

[순례길은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을 타고]

빗물을 타고 시작한 산티아고 순례길

  2023년 4월 10일 출발하기로 예정되었던 43일간의 산티아고 순례일정이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2023년 5월 8일로 한 달가량 순연되었다. 아내와 지인들의 만류를 받아들인 결정이었다. 그간 순례 준비에 도움을 받았던 네이버 카페 ‘까미노의 친구들 연합(까친연)’에 기행이 뒤로 밀린 안타까운 소식을 올렸다. 4월 13일 피레네를 같이 넘기로 약속했던 까친연 동호 회원들에게 내 사정을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한 달 동안 체력 회복을 위해 8~9 kg으로 행장을 꾸린 배낭을 메고 한강을 20여 km 남짓 서너 차례를 걸었다. 보행 속도가 점차 올라와 평소와 크게 뒤떨어지지 않아 까미노 장정에 힘이 부치지 않으리라는 희망이 엿보였다. 복잡한 심경을 적어갈 때엔 5월이 언제 올까 싶었는데 화살촉처럼 금방 지나 어느새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5월 8일 공방에 들러 아내와 짧은 작별 인사를 한 후 어머니 댁으로 가서 점심을 했다. 작년에 구순이신 어머니께서 한 달 넘게 외유를 떠나는 남매를 위해 손수 만두를 빚어주셨다. 언제 먹어도 시원하고 개운한 개성만두로 속을 채운 뒤 막내 매형과 누나와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까지 배웅해 준 막내 누나 내외와 쿨하게 헤어진 후 앞으로 43일의 순례를 동행할 둘째 누나와 곧장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탑승까지 시간이 꽤 남아서 마티나 라운지에서 이른 저녁을 해결하고 가볍게 휴식을 취했다.


  이번 파리행 구간은 암스테르담을 경유하는 노선이다. 경유지인 스키폴 공항은 평소 정체되기로 악명이 높다. 게다가 환승 대기시간이 1시간 20분에 불과해 파리행 비행기를 체크인하기 빠듯한 일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암스테르담행 출발 시간이 30분가량 지체되니 경유기를 놓칠까 조바심을 지울 수 없었다. 늦어진 일정을 만회하고자 비행 속도를 올렸는지 암스테르담 공항에 착륙할 즈음 15분가량 연착한 상태였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한 이후에 계류장까지 세월아 네월아 하며 시간을 허비하며 이동하니 환승 마감 시간까지 30분이 채 남지 않았다. 혹시라도 도착이 지연될 걸 감안해서 기내 수화물로 처리하고 추가 요금을 지불하여 컴포트 좌석 맨 앞칸을 예약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운항 중 미리 알아 둔 환승 절차를 떠올리며 누나와 부리나케 뛰어 간신히 마감 시간 이삼 분을 남겨 두고 게이트에 도착하니 웬걸 탑승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간신히 숨을 돌리고 나서 탑승 수속을 기다렸다. 이윽고 10 분 즈음 지나자 인천공항 탑승구에서 보았던 50대 후반 순례객이 모습을 보였다. 비행기를 놓치는 줄 알았다며 우리가 어떻게 빨리 나왔냐고 묻는다. 다 같이 헐레벌떡했던 해프닝이 인연이었는지 순례길 초반 1/3 가량을 동행하게 되었다.


  5월 9일 아침 8시(이하 현지시간 기준)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전자입국 수속을 밟아 번갯불에 콩 볶듯 공항을 나왔다. 공항이 붐빌 시간대라 공항철도가 혼잡했지만 별 탈없이 지하철로 환승하여 숙소 인근인 몽파르나스 터미널 역에서 하차했다. 역을 나서니 파리는 시원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출구 근처에서 레인커버를 씌우고 우비를 꺼내 입고 몽파르나스 인근을 둘러보며 하루 머물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 다음 쌀국수로 끼니를 해결하고 주변 지리를 익힐 겸 10여분 거리에 있는 데카트론 매장에서 누나가 쓸 스틱을 샀다.

 

  초에 마크롱 정부가 단행한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지속되면서 TGV 운행 일정이 매일 급변하여 수시로 출발 정보를 확인해야 했다. 우리가 출발하는 10일에 파업이 진행될까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파리 도착한 날까지 스케줄 변경 예보가 올라오지 않았다. 바욘행 열차가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이라 사전 답사 겸 몽파르나스 앞 식당에서 나름 유명한 양파 수프와 수제 버거로 저녁을 먹고 역사를 둘러보며 탑승구 위치를 확인했다. 호텔을 나설 때는 저녁 후 에펠탑 구경을 가기로 했었는데 막상 터미널을 나온 다음에 만사가 귀찮아졌다. 누나도 선뜻 패스에 동의해 호텔로 돌아와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피로를 풀었다.



  5월 10일 아침 7시 8분. 한국에서 여정을 준비할 때는 열차 결항을 그렇게 걱정했었는데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도심을 빠져나와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순례가 임박했음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4시간을 달려 바욘에 도착했다. 눈이 시린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날씨가 이와 같다면야 어떤 고생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의욕이 넘친다. 생장 피에르 포흐 행 열차 출발까지 1시간 반 가량 시간이 남아 바욘 역 바로 옆 카페에서 음료와 다과를 마시고 잠시 산책을 하는 여유를 부렸다. 드디어 생장 피에르 포흐에 도착했다. 바스크 양식의 주택들이 줄지어 들어선 순례자들의 마을이다. 순례자 사무실을 찾았다. 앞선 순례자들 수속을 기다린 후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시알과 순례자라면 빠트리지 않는 가리비 껍데기를 구입했다. 서울에서 만들어 간 가죽 가리비와 같이 묶어 배낭에 매달 심산이었다. 39일간 힘들고 지칠 때마다 가리비가 위로해 주리라 믿으며 말이다.


  4월에 출발했다면 보르다 알베르게에서 묵었을 것이다. 피레네 산맥에서 은하수를 보고 싶다는 열망에 작년 하반기부터 보르다 알베르게에 이메일로 시즌 오픈하면 바로 알려달라 부탁했었다. 내 정성이 갸륵했는지 오픈 직전에 나에 한해 미리 사이트를 열어 주어 원하는 날짜에 독실 예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원치 않았는지 출발이 미뤄지며 5월 하순까지 풀 부킹이 되어 예약이 불가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오리손 예약마저 주인장의 태만으로 분란을 겪으며 취소하니 남은 대안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평이 나쁘지 않은 지트 비데안으로 숙소를 정했다. 알베르게에서 하루 머물 짐을 풀고 난 다음 마실을 나갔다. 중세 시대에 지어졌을 법한 성곽 위에서 본 마을 정경이 환상적이다. 이국적이고 고즈넉한 경치가 일품이다. 쾌청한 날씨가 바람에 물러나기 시작한다. 어두운 구름이 몰려 드니 내일 일정이 여의치 않을 듯하다. 바스크 스타일 생선요리로 저녁을 먹고 순례의 첫 발을 디딜 내일을 위해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이번 순례길은 파리에서 빗물을 타고 시작했다. 도착한 첫날 그리 많이 흩뿌리지는 않았더라도 우비를 충분히 적시는 비를 맞으며 파리 시내를 걸으니 뮤지컬 영화의 메인 테마 ‘Singing in the Rain’이 읊조려졌다. 주인공은 빗속에서 노래하며 춤을 주고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5월 초중순의 스페인 북부는 우기 끝자락이다. 내일도 비를 맞으며 산을 넘을 것이고 순례 초반은 비와 함께 할 공산이 크다. 우리 남매는 빗속에 순례를 하며 비가 자아내는 경건함 속에서 순례의 의미를 찾을 것 같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저마다의 일정과 감상을 블로그에 글로 남긴다. 다양한 순례기를 읽자면 모든 사람들의 감정이 제각기 다를 것이어서 하루하루 일기 적듯이 적어 내려가는 비슷한 형식에도 진부하다 여겨지지 않지만 다소 천편일률적인 전개는 늘 아쉬움이 남았다. 나 역시 비슷하게 기행을 회고할 텐데 뭔가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이 적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이번 순례길에 한국에서 바쁘다는 핑계로 음원을 받아 놓고 나서 제대로 듣지 않았던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팝송 500곡을 매일 13곡씩 걸으면서 듣기로 했다. 그리고 당일에 가장 인상 깊은 곡을 감상한 소회도 같이 풀어낼 작정이다. 나의 순례는 빗물을 타고 시작해서 500대 명곡을 타며 진행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 미뤄진 순례일정 : 섭리와 계시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