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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섭리와 계시 사이

빗물을 타고 시작한 산티아고 순례길

by 여운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당연히 종교가 없거니와 편견도 없다. 가능한 한 어느 종교이든 인정하는 편이다. 낯설고 생소하다 하여 배격하지 않는다. 다만 사이비나 이단 혹은 교회를 사유하거나 세습하는 교단을 혐오한다. 세계 도처에서 종교 갈등을 조장하는 그 모든 원리주의를 배격한다. 종교와 신앙에 대한 이런 개방적인 태도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호의를 갖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 뿐이 아니다. 광활한 메세타 초원은 어서 오라며 나를 손짓해 부르는 것 같았다. 거역하지 못할 소명처럼 기회 닿는 대로 언젠가 반드시 까미노 위에 서리라 다짐하게 된 계기였다.


도대체 왜 순례를 하는 걸까? 순례자Pilgrim는 종교적 의미가 있는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이다. Pilgrim은 라틴어 Pereg rinum에서 유래했다. 페레그리넘은 외국인, 순례자를 뜻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로마 시민이 아닌 외국인과 피정복민들을 페레그리넘으로 통칭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이승에서의 삶을 일시적인 여정으로 여겼다.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자라 인식했다. 이로부터 순례의 의미가 성소를 방문하거나 성인의 흔적을 찾으려는 종교적 헌신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앙과 종교가 없는 나는 종교적 의미에서 성지 순례를 희망하지 않았다. 순례길의 강렬한 풍경에 매혹된 탓이다. 메세타 평원이 내 눈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드넓은 밀밭이 온 사방으로 펼쳐져 먼 지평선과 맞닿은 풍경! 한국에서 볼 수 없는 경치다. 세상의 절반이 푸르른 하늘이고 나머지 절반은 황금빛 들판으로 꽉 채워진 몽환적인 세상에 서고 싶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의 심금을 울리는 엔딩 장면이 떠오른다. 누렇게 익어가는 밀알들을 손으로 훑으며 하데스로 향해 걸어가는 러셀 크로우. 그가 연기한 막시무스 데시무스 메리디우스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만났는데 초원에 선 내 앞에 누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막시무스가 건넌 밀밭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였다. 겨울 밀이 한창 농익어가는 오뉴월의 메세타 벌판은 무엇을 연결하는 걸까? 순례자들은 까미노에서 저마다 무언가를 찾으려 고행을 자처한다. 까미노가 일종의 깨달음으로 가는 다리인 셈이다. 그렇다면 까미노는 혹시 불교의 바라밀다가 아닐까? 저 언덕으로 건넌다는 의미의 바라밀다는 차안과 피안을 연결하는 다리다. 우리가 사는 차안, 이 언덕은 탐욕과 진에와 우치,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이 가득한 인토이자 사바세계다. 고통에 물든 이들은 끊임없이 괴로움이 없는 정토의 세계로 가고자 한다. 부처님이 계신 피안, 저 언덕이야말로 신구의 삼업이 정화된 청정의 세계이자 깨달음의 정토다. 까미노가 세상만사의 이치와 진리를 가늠하는 지혜를 깨닫게 해 준다고 말하면 너무 거창한 비유는 아닐런지. 순례길에 한 발 내딛을지라도 차안의 문턱을 넘어선 것과 진배없다. 까미노를 완주해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 피안의 세계에 얼마나 다가설지 궁금하다.


까미노가 보여줄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이방에서 온 순례자에게 목가적으로 다가설 게 분명하다. 하지만 길 따라 걸으며 잠시 멈추기를 반복하는 순례자들은 낯선 이국의 전원생활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현지인들의 고단한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780km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 루트를 무작정 걷고 싶다.


진즉에 순례를 결심했건만 우리네 실정에서 40여 일 가량 휴가 내는 게 만만치 않았다. 작심한 지 20년이 다 돼 간다. 다행히 작년에 2개월간 안식 휴가를 받았다. 직장 생활 내내 연차 휴가를 한 번도 소진하지 못한 내게는 리프레쉬할 소중한 기회였다. 덕분에 꿈에 그리던 까미노 대장정를 도모할 수 있었다. 당초에는 까미노에 휴가를 몽땅 쏟아부을 작정이었다. 프랑스 길을 완주한 다음에 누나를 귀국시킨 후에 포르투로 넘어가 포르투갈 길을 걸으려 했다. 그런데 누나가 이왕이면 순례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자고 나를 설득했다. 고민 끝에 포르투갈 길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대망의 산티아고행 출발일자를 2023년 4월 10일로 정했다. 2022년 9월부터 일정에 맞춰 필요한 예약을 순차적으로 진행했다. 왕복 항공권과 기차표를 일찌감치 티켓팅하고 파리에서 묵을 숙소를 예약했다. 피레네 산맥에서 은하수를 감상하고 싶어 순례 첫날밤을 산중에서 보내기로 했다. 예약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보르다 산장에 이메일을 수 차례 보냈다. 내 정성에 감복한 보르다 주인장이 일순번으로 2인 전용실 예약을 잡아줬다. 엑셀 파일로 일자별 세부 일정과 도움이 될만한 각종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매일 걸을 구간별 상세 지도와 프랑스 루트 전체 내비게이션 정보를 담은 GPX 파일을 구글 드라이브에 업로드했다. 혹시 모를 비상시를 대비해 플랜 B의 일정까지 세워뒀다. 짐 쌌다 풀었다 하기를 수 차례, 8kg대로 배낭 패키징을 마무리했다. 순례 준비가 다 끝났다. 이제 출발하면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예상치 못한 사달이 났다. 순례를 한 달 보름 앞둔 2월 마지막 주말 몸에 이상을 느꼈다. 다음 날이 되어도 예후가 심상치 않았다. 서울대 병원 응급실에 갔다. 나흘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원인은 위장 출혈이다. 20년 전에 수술받은 부위에서 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모두 내 탓이다. 수술로 봉합된 부위는 정상 조직보다 약해 평소 관리를 잘해야 한다. 그럼에도 과도한 스트레스와 허용치를 넘는 음주, 부주의한 식습관 등으로 병인病因을 키웠다. 이번엔 정도가 훨씬 심했다. 빈혈이 겹쳐 처음으로 수혈을 했다. 그것도 3팩씩이나.


불과 한 달 전에 주치의로부터 완치 판정을 받았다. 주치의는 8년간 이어 온 위장약 복용을 중단하자는 반가운 처방을 내렸다. 가끔 불편할 때만 먹으라는 말에 자신감이 생겼다. 지난 2,3년간 입에 댄 적 없는 술을 다시 마셨다. 하루 3,4잔 이상 커피를 들이켰다.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퇴원 후 첫 외래 진료에서 주치의는 평생 위장약을 복용해야 하며 금주도 마찬가지라 경고했다. 달라진 처방에 크게 실망하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예전에 안나프루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8개월 앞두고 출혈이 재발하여 주치의가 반대했던 기억때문이다.


“교수님, 제가 다음 달부터 두 달 가량 산티아고 순례를 가서 많이 걸어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몸도 약해 보이는데 왜 가느냐는 핀잔을 줬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처방약만 잘 챙기라는 답을 얻었다. 가장 어려운 난제를 푼 기분이었다. 출발일까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숙제만 남았다. 출발 예정일까지 40일이 채 남지 않았다. 몸을 추스르는데 필요한 시간을 빼면 정상 컨디션으로 회복하기까지 한 달이 남은 셈이다. 보행 속도가 남들 보다 빠른 편임에도 퇴원 후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이 많은 어르신들보다 걸음이 느렸다.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출발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서둘러 점심을 먹고나서 여의도를 반 바퀴 돌았다. 퇴근길에 집까지 걸어왔다. 이날 12km를 걸었다. 걱정과 달리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토요일에는 느지막이 이촌, 반포 한강공원을 13km 가량 산책했다. 몸에 이상이 없어 마음 놓였다. 예정대로 떠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나를 고무시켰다.


그러나 곧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주말에 2시간 넘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아내가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전주말에 퇴원하기 무섭게 바로 배낭부터 꾸린 내 모습에 진작부터 기분이 상했던 걸까? 내내 화를 눌렀을 아내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나는 반대야. 당연히 안 갈 거라 생각했어, 오빠. 걷다가 또 출혈이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퇴원 후 한 달 밖에 안된 거잖아. 40일 내내 걱정할 내 입장을 생각한 적이 있기는 해? 적어도 올 가을이나 내년에 가야 하는 거 아냐? 오빠 주위 지인들에게 물어봐. 다들 제정신 아니라고 할 거야”


주치의한테 다시 문의해 보겠으며 지인들 의견도 구하겠노라 모기만한 소리로 답했다. 예상 못한 봉변을 모면하고자 간신히 허둥거리며 발버둥 쳤다.


아내의 심한 꾸지람을 듣고 나서야 그간 애써 모른 척해온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과연 산티아고까지 아무 탈 없이 완주할 수 있을까? 출발전까지 충분히 회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나 정말 예전 체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지금 미루면 누나에게 미안 하거니와 수년 내로 다시 도모하기 어려울 텐데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아내가 이리도 걱정하는데 일단 미루라는 천사의 음성과 별일 없을 테니 주치의와 지인들이 반대하지 않는 한 다녀 오라는 악마의 유혹이 심중에서 용쟁호투를 벌였다.


츨혈로 입원하기 전, 뒤늦게 코로나에 감염됐다. 그때만 해도 현지에서 코로나 걱정할 일 없어져 다행이라 웃어넘겼다. 그런데 하필 대장정을 코 앞에 둔 이 순간에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무척 혼란스러웠다. 하늘이 내게 두 가지 선택지를 내밀어 그중 하나를 고르라 명한 것 같았다.


’섭리’란 단어는 이미 정해진 뜻이란 의미 외에 아픈 몸을 돌보라는 뜻이 있다. 혹시 연이은 코로나 확진과 위장 출혈은 순례를 미루거나 취소하라는 신의 섭리일까? 만일 그렇다면 병약해진 몸을 정양하며 회복에 힘쓰라는 조물주의 경고를 거슬러선 안 된다. 한데 그 뜻에 순응할수록 아쉬운 마음 한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게 닥친 곤란한 상황에 결연히 맞서 진정한 순례의 고행을 체험하라는 절대자의 계시다. 거역하기 힘든 준엄한 명령에 단호한 결의가 불같이 타오른다. 갈등은 뫼비우스 띠를 따라 끝없이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어리석은 나는 신의 섭리와 절대자의 계시 중 선뜻 어느 하나 받아 들기를 주저했다.


경도 결정 장애를 가진 내가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다. 번민 끝에 펜을 들었다. A4 지에 두 개의 선을 그어 삼 등분했다. 칸마다 제목을 달았다. 1) 무기한 연기, 2) 부분적인 일정변경. 3) 기존 일정 고수. 주치의 권고와 지인들의 조언을 토대로 세 가지 대안의 장단점을 하나씩 적어 나갔다. 여백을 채우면서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실을 깨달았다. 내 옆에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걱정하고 아껴주는 지인들이 넘쳐난다는 걸 말이다. 아내 외에도 가지 말라는 이들이 절반을 갓 넘겼다. 의견이 이런데도 예정대로 떠나는 건 무책임하다. 그렇다고 일정을 미루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 막상 그때 순례 갈 형편이 될지 장담키 어려워서다.


결국 절충안을 선택했다. 몸을 조금 더 추슬러 출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장고 끝에 섭리와 계시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타협했다. 두 달 여유를 두면 적당할 텐데 6 월 중순 이후엔 태양의 나라 스페인이 활활 타오를 계절이다. 이른 감이 있을지라도 당초보다 한 달 미룬, 우기 끝자락에 들어서는 5월 8일에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에 맞춰 모든 일정을 재조정했다. 보르다 알베르게는 예약을 바꿀 수 없어 포기해야 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다.


산티아고 순례는 일종의 여행이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를 강조한 바 있다. 여행자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지니고 어디로 떠난다. 구체적인 목적과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무엇을 보거나, 혹은 찾거나, 무언가 깨닫기를 원한다. 여행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여행에 만족한다. 산티아고 순례도 마찬가지다. 순례자마다 길을 나선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모두 바라는 공통된 목표가 하나 있다. 무리 없이 순탄한 여정을 이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순례자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순례자들은 자신의 순례가 돌발 변수 없이 계획한 대로 평이하고 순탄하게 이어지길 바란다. 하지만 이렇게 밋밋한 여정은 뇌리에 남을 만한 게 별로 없다. 누구나 원하는, 편안한 순례란 기실 기억에 생생하지 않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여정의 동의어에 불과하다. 그래서 너도나도 고프로와 드론으로 순례를 생중계하거나 핸드폰에 사진과 동영상을 담으려고 분주한 지 모른다. 뭐라도 찍어둬야 예상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결착과 모범생처럼 심심한 추억을 기억할 수 있을 테니.


나 역시 달갑지 않은 난처함과 실패를 겪고 싶지 않아 엑셀 파일을 골똘히 작성했다. 하지만 이렇게 공들여 준비한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미래는 불확실하며 정해진 게 없는데 미리 마음을 졸일 필요가 있을까? 순례 중에 없으면 죽거나 후회할 것들만 준비하기로 했다. 다가올지 모를 불확실한 미래 걱정일랑 쓰레기를 구석에 몰아 놓듯 치워 버리자. 매일의 일상을 민낯으로 즐기자. 그게 즐거운 일이든 애태우는 봉변이든, 떫고 쓴 만큼 달콤한 추억이 될 거라 믿으며.


순례를 떠난다고 하면 주위에서 늘 이렇게 되묻는다.


“왜 가는데?”,

“780km? 정말 대단하다! 고생하겠네. 나를 찾으러 가나?”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어느 명산이든 장거리 종주산행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서울을 떠나 하차하기 전까진 재미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막상 등반을 시작하면 곧바로 왜 왔을까 하는 현타가 찾아온다. 순례길도 마찬가지다. 뭘 깨닫거나 찾겠다는 인식 자체가 사치일 수 있다. 서울 여의도 한복판에서도 쓸데없는 기우가 유별난 나는 어쩌면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 순례를 자청했을는지 모른다. 말그대로 무아지경을 맛보고 싶다. 분초를 다투어 변하는 주가와 조변석개하는 컨센서스, 표리부동한 투자자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 물욕에 절은 껍데기로부터 금선탈각하면 정말 비우고 잊어버린 나를 만날 수 있을까? 메세타 초원에 서겠다는 희망은 순례의 외면적 목표이다. 나를 찾아 헤매는 게 아닌 잠시 묻어 망각에 빠진 심연의 나 자신과 마주하는 내면적 목표도 이루고 싶다.


우리 남매의 순례길은 파리에서 빗물을 타고 시작했다. 도착한 첫날 시가지를 촉촉이 적시는 비를 맞으며 파리 시내를 걸었다. 뮤지컬 영화 ‘Singing in the Rain(1952년)’의 메인 테마를 흥얼거렸다. 주인공은 빗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가운데 행복을 만끽했을 게다. 북부 스페인의 오 월은 우기가 막바지다. 나폴레옹 루트를 넘는 첫날에 비를 맞았다. 순례 초반에도 내리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비와 함께 걸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자아내는 왠지 모를 숙연함, 가슴속 티끌이 씻겨나간 듯한 경건함이야말로 순례와 고행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주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자신이 겪은 소사와 감상을 정리해 기행기를 쓴다. 작가들이 느낀 감정과 소회가 제각기 다르고 문체가 상이해 순례 기행서적마다 독특한 맛이 있어 진부하지 않다. 하지만 하루 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일기 적듯 써 내려가는 천편일률적인 전개엔 늘 아쉬움이 남았다. 누구나 걷는 까미노에서 엇비슷한 경험을 겪을 것이다. 아주 특별한 기행이 아니고서는 동어반복 같은 기행을 회고해야 한다. 하여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적지 않은 강박에 시달려야 했다.


색다른 무언가를 찾으려 궁리하던 와중에 기억에 잊혀진 음원이 떠올랐다.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어렵게 구하고서 처박아 두기만 한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팝송 500곡(2004년)’을 매일 열세 곡 이상 차례대로 듣기로 했다. 명곡을 들으며 떠오른 감상을 이야기 거리로 삼기에 괜찮을 듯싶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거나 심금을 울린 두 곡을 골라 소개하는 것도 의미 있어 보였다. 우리 남매의 순례는 빗물을 타고 시작해 까미노를 잇는 바라밀다 위로 흐르는 위대한 팝송 명곡을 따라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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