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perado - 마음의 벽을 허물고 문을 열자
2023년 5월 11일 생장 피에르 포흐 – 론세스바예스 24.2km
어제 순례자 사무실에서 만난 봉사자가 오늘 정상 부근에 눈이 내릴 거라 안내했다. 우리가 머문 알베르게 지트 비데안Gite Bidean 주인장도 뢰푀데르 피크Lepoeder Peak, 1430m의 기온이 영하 2도까지 내려갈 거라 경고했다. 우기 끝자락에 강설 예보라니. 쉬이 믿기지 않았다. 인적 드문 초행길에 눈까지! 살짝 긴장이 일었다.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같이 탄 한국인 남성 순례자-앞으로 김 선배라 부르겠다-가 우연치 않게 같은 숙소에 묵었다. 오전 여섯 시에 기상하여 짐을 꾸린 후 김 선배와 아침을 함께 했다. 출발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궂은 날에 조난당할세라 우비와 스패츠로 중무장했다. 영하의 날씨에 손이 젖으면 큰 일이다. 등산장갑 위에 라텍스 장갑을 덧끼었다. 나폴레옹Napoleon 코스와 우회길 발카를로스Valcarlos 코스의 분기점을 지나는 언덕을 오르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몸이 충분히 예열되어 겉옷을 벗을 겸 길을 멈췄다. 도로변 가정집 차고에서 잠시 거세진 비를 피했다. 우비 안에 껴입은 얇은 패딩을 배낭에 집어넣었다. 숨을 고른 연후에 다시 길을 이어갔다. 누나는 스틱을 처음 사용했다. 걷는 본새가 꽤 어설프다. 아직 노르딕 워킹 자세가 익숙하지 않아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차츰 나아지겠지 하며 앞서 걸으며 스틱 쓰는 법을 재차 일러주었다.
물안개에 가려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길이 연이어진다. 거센 빗자락에 바람마저 세차게 불어제친다. 설상가상으로 안개마저 짙어 생생한 녹음이 우거질 피레네 초원을 볼 수가 없다. 걷는 내내 유람은커녕 물에 빠진 생쥐꼴이다. 그나마 나폴레옹 루트를 걸을 수 있어 최악은 면했다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순례를 준비할 때 나폴레옹 길을 걸으며 피레네 절경에 심취하는 로망을 꿈꿨다. 피레네 산중에서 유려한 은하수를 감상하려던 계획이 일정변경으로 신기루가 된 지 이미 오래, 설마 하는 악천후에 눈에 담기 벅찰 아름다운 경치마저 불가항력이 되었다. 아쉬움을 금치 못하던 차였다.
실의에 빠진 나그네에게 신의 가호가 내렸다. 기적이 일어났다. 조금씩 비가 잦아들더니 자욱한 운무가 어느새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티끌하나 없이 새파란 하늘과 물기 머금어 초록이 완연한 언덕이 눈 앞에 나타났다. 저 멀리 들판 아래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풍광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파산 직전에 로또를 맞은 심정이 이런 걸까? 다행히 소망 하나를 건졌다는 흡족한 마음에 오리손Orisson을 향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오리손에 도착하기까지 해가 쨍했다. 욕심이 났다. 아예 비가 그쳤기를 바랐다. 예정보다 산행이 조금씩 지체되어 세 시 넘어야 론세스바예스에 떨어질 걸로 예상된다. 늦어지는 일정이 불안한 차에 비만 멈춰도 도착 시간을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리손에서 만난 한국인 순례객들 중 한 분이 금시 초문의 얘기를 전한다. 예약을 했어도 3시 전에 도착해야 노쇼가 되지 않는 거다. 긴가민가 했다. 신경 쓰여 조급해진다. 수차례 알베르게에 전화걸어도 연결되지 않는다. 만의 하나 예약이 취소되면 다음 마을인 부르게테Brugete나 에스피날Espinal까지 가야 한다. 초행길에 지칠 누나에게 부담스러울 상황이다. 까친연 단톡방에 문의했다. 이미 선결제 예약을 해서 늦게 도착해도 무방하다는 답변을 받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익숙지 않은 초반 여정에 까친연 순례자 단톡방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뒤늦게나마 감사 인사를 전한다.
순례 첫날의 관심사는 온통 누나에 쏠렸다. 산행을 거의 경험하지 않은 누나가 비가 쏟아지는 피레네를 무사히 넘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다행히 누나가 순례 전, 매일 십여 킬로미터씩 꾸준히 걸은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조금 느릴지언정 기복 없이 꾸준하게 잘 걸었다. 정작 사달은 내게 발생했다. 날씨걱정, 누나걱정에 과도하게 신경 쓴 때문일까? 오리손을 나서자마자 허벅지에 경미한 근육경련이 일었다. 순간 당황했다. 다시 쏟아지는 비에 불안이 엄습했다. 아직 갈길이 멀다. 갈 길이 17km 이상 남은 상황에서 쥐가 나다니. 이제 숙소에 늦게 도착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우중에 조난을 당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수개월 동안 순례에 대비해 몸을 만들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아! 삶의 마지막 찰나에 직면하면 지나온 일생이 영화처럼 흐른다는 말을 절감했다. 애써 참고 걸었지만 종아리에서 시작된 경직이 허벅지에 이르렀다. 근육이 굳어 무뎌진 내 발걸음에 뒤따라오던 순례객들이 내 안색을 살핀다. 웃으면서 괜찮다며 먼저 보낸다. 마침내 대둔근까지 굳어져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아스팔트 길 옆 수풀에 털썩 주저앉았다. 앞선 누나를 불렀건만 듣지 못했는지 점차 간격이 벌어져간다. 에라 모르겠다 급한 대로 어정쩡하게 앉아 다리를 주무른다. 한참을 앞서간 누나가 되돌아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컨디션을 묻는다. 늦어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가자며 내 속도에 맞춰 걸었다. 컨디션이 조금씩 살아나 2시간이 좀 지나자 평소처럼 운신이 가능해졌다.
산을 제법 잘 탄다는 자부심이 충만했던 내게는 놀라운 충격이었다. 한동안 산행에 뜸했어도 이정도일 거라 생각치 못했다. 악천후와 조난. 나와 상관없다고 치부한 달갑지 않은 상황이 현실로 다가올 줄이야. 그것도 죽음의 공포를 선사하며! 산티아고 순례를 다룬 영화 ‘The Way(2010년)’의 한 장면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렇다. 심한 불화를 겪은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멀리한다. 주인공 마틴 쉰은 헤어진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생장 피에드 포트로 향한다. 아들은 프랑스 루트 순례 첫날 피레네 산맥을 넘던 중 악천후에 길을 잃어 조난사했다. 마틴 쉰은 아들의 배낭에서 발견한 까미노 안내서를 꺼내 읽는다. 주인공은 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순례에 나선 까닭을 찾기 위해 자신만의 까미노를 시작한다.
조난의 두려움에 뒤이어 아내와 어머니가 떠올랐다. 순례 여행을 극구 반대했던 아내에게 몹쓸 짓을 한 거 같아 미안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날아올 험한 소식에 황망하실 어머니께 상심을 끼칠게 죄송했다. 자책감이 공포를 짓누르자 신기하게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조난 당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노래 한 소절을 무작정 불러 댔다. 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489위)'란 곡이다. 이 노래는 사실 조난 내지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애인과 헤어진 화자는 혼자 남겨 진다. 외톨이로 지내야 하는 상황이 낯설고 무섭다. 겁에 질린 그녀는 서서히 자아를 깨달아 힘을 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다시 돌아온 연인이 뒤늦은 사랑을 호소하지만 이를 외면한다. 그녀는 당차게 나는 살아남을 거라 외친다는 내용이다. 박력 있는 가사에 역동적인 리듬이 저절로 힘 솟게 한다. 작곡가 디노는 한 때 실직해 경제적으로 곤궁한 나날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예전에 자신이 작곡한 영화 주제곡이 흘러나오는 걸 보았다. 자신의 노래를 들으며 앞으로 매사가 잘 될 거라 확신했다. 재기해 다시 작곡가로 살아갈 자신감을 되찾아 이 노래를 작곡했다는 후일담이 마음에 와닿는다.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자 나도 모르게 후렴구를 자연스레 반복했다. 나는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되뇌며. 노래 덕분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컨디션을 완전히 회복했다. 공포의 미망에서 벗어나자 남은 순례길은 너무나 평이했다. 필요 이상의 걱정과 비상사태를 상정하는 기우의 고통이 아니라면 나폴레옹 루트를 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북한산 아무 코스나 청계산 매봉을 오를 정도의 체력이면 누구나 힘들지 않게 트레킹 할만한 코스다. 1,270m의 높이를 21km에 걸쳐 완만히 지루하게 오르면 된다. 한라산을 등반한 이들은 성판악 코스 초반의 지루함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다.
나폴레옹 루트의 정상인 뢰푀데르 언덕에서 하산할 코스를 다시 확인한다. 대부분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선택하는데 유독 미국인 남녀만 왼쪽 아스팔트 길을 고집한다. 포장길이라 편해 보이지만 새로운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여러 차례 숙지했던 오른쪽 샛길로 내려갔다. 다른 순례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무리 지어 하산했다. 내리막길 막바지에 성당터가 보였다. 경사진 풀밭을 가로지르는 비포장 지름길이 바로 앞에 있건만 아무도 그 길로 가지 않는다. 앞서 걷던 순례자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지그재그로 이어진 포장길로 들어선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다들 그 뒤를 따라간다. 내 전생은 레밍즈였을 게 확실하다.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무작정 무리를 따라 성당터로 향했다. 공터에 도달할 즈음 미국인 남녀를 다시 만났다.
인생이란 레이스도 이와 비슷하다. 우회길을 멀리 둘러 가거나 설령 일순간 뒤쳐지더라도 문제 없다. 페이스만 유지하면 앞서 간 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명심할 사항이 있다. 최후의 승자가 되길 원하면 때로는 인생의 지름길을 과감히 선택해야 한다. 성당터로 가는 막바지 쇼트커트를 선택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회심의 카드는 반드시 승부를 걸 때만 꺼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가진 패를 의심해선 안된다. 손에 쥔 패를 버리고 불확실한 패를 한 번 더 받지 말라. 지금 가진 패가 내게 주어진 최선, 최고의 패라 믿어야 한다.
‘Desperado(494위)’는 미국을 대표하는 락밴드 중 하나인 Eagles의 두 번째 정규앨범 음반에 수록된 곡이다. 이글스 노래들 중에 호텔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가장 애청하는 곡이다. 호텔 캘리포니아 후반부의 몽환적인 기타 리프가 일품이라면 이 노래는 잔잔한 멜로디와 가사가 탁월하다. 절망에 빠져 죽음마저 불사하는 방랑자에게 자포자기식의 방황을 멈추고 제 자리로 돌아와 사랑을 찾으라는 가사가 가슴에 사무친다. 애절한 운율은 부유하는 심연心淵을 가라앉히는 평화를 가져온다. 물질 만능과 부를 추구하는 다이아몬드 퀸을 고집하지 말라 한다. 언제든 우리를 배신할 테니 말이다. 사랑과 연민을 상징하는 하트 퀸이 네 최선의 패라는 걸 잊어선 안된다.
외적 성취에 매달려 목석처럼 감정이 메마른 방랑자에게서 지난 날의 내 삶을 반추해 본다. 내 손에 이미 좋은 패들이 충분한대도 단 한 장만 남은 스페이드 에이스가 떨어지길 바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카드를 뒤집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 멈추는 게 최선이었다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다. 채울 수 없는 탐욕의 끝은 삶의 좌절과 허탈함뿐이다. 젊은 시절 탐진치 삼독에 무수히 빠졌다. 하늘의 명을 깨달을 시기가 이미 절반을 넘은 지 오래다. 몇 년 후면 어떤 말이든 순리에 따라 걸러 들을 나이건만 지금도 과욕에 빠지곤 한다. 이제라도 심연에 견고하게 둘러쳐진 벽을 허물고 마음의 문을 열어 비 온 뒤의 무지개를 맞이하고 싶다. 너무 늦기 전에 말이다.
순례를 다녀온 유투버들이 올린 첫날 영상의 대다수는 생장에서 티바울트 십자가상Cruz de Thibault 구간까지를 촬영한 분량이 전체의 팔 할 가까이 차지한다. 그 이후 구간은 설렁설렁 대충 찍어 넘긴다. 전에는 왜 그런지 알 길이 없었다. 걸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여기까지 십오 킬로미터를 오르는 동안 체력이 상당히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남은 예닐곱 킬로미터의 오르막 길에서 만사가 귀찮아졌을 게 분명하다. 초반에 페이스를 잘 관리한다면 티바울트 십자가상 분기점에서 뢰푀데르 언덕까지 족히 수월하게 갈 수 있다.
우리 남매는 나폴레옹길 정상에서 눈을 맞지 않았다. 예상보다 일정이 늦어진 탓이다. 앞서간 순례객들은 진눈깨비를 맞았다고 한다. 역시 인생은 새옹지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맞이한 저녁은 예상대로였다. 썩 훌륭한 식사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시장기를 속이기에 충분했다. 바로 옆에 앉은 친구들과 같이 왔다는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 세 명과 나눈 담소가 그나마 만찬을 빛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