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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May 20. 2024

[2일 차] 멀고 먼 순례여행을 온 까닭

I Want to Know What Love Is - 여유롭게 대하자

2일 차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아침 기온이 여전히 싸늘하다. 어제에 이어 짐을 꾸려 배낭을 메고 출발하려는 찰나에 이슬비가 흩뿌린다. 다시 우비와 라텍스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길을 나섰다. 하루 묵었던 페레그리노스 알베르게 광장 앞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거리가 790km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프랑스 루트 공식 거리가 779km이다. 어제 24km 걸은 걸 감안하면 754km 전후일 텐데 의아했다. 자동차 도로 기준이겠거니 넘겨짚었다. 출발하느라 부산한 순례객들은 안중에 없다는 듯 이정표 오른편 너른 초원에서 어미말과 망아지가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 내가 상상한 까미노 중에 만나길 기대했던 목가적 풍경 중 하나였다.


론세스바예스 페레그리노스 알베르게 앞


  출발지인 론세스바예스는 해발 952m, 오늘 목적지인 수비리는 고도 528m. 간혹 짧은 업힐 구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피레네 산맥을 내려가는 하산길이다. 부슬비에 땅이 젖은 진창길이라 걷기가 수월치 않다. 게다가 에로고개에서 수비리까지 마지막 4km 내리막 암반 길은 맑은 날에도 미끄럽다는 평이어서 낙상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비리로 가는 코스는 앙꼬 없는 찐빵처럼 평이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매일 걸었던 모든 순례길이 인상적이지만은 않다. 1년이  지났어도 컬러풀한 스냅샵처럼 뚜렷이 기억나는 코스가 있다. 반대로 무미건조한 음식을 감흥 없이 먹듯, 걸었던 장면을 떠올리려 애를 써도 끝내 흐릿한 일정 또한 꽤 많다. 오늘 까미노는 후자 성격이다. 아마도 피레네를 넘어야 했던 긴박감이 사라진 데서 오는 허탈감과 내일 도착 예정인 순례길에서 만날 첫 번째 대도시인 팜플로나에 대한 기대와 설렘 사이에 낀 어정쩡한 일정 때문이지 싶다. 코스 난이도를 매긴다면 5점 만점의 3점을 줄 만하다. 어제 나폴레옹 루트나 오 세브레이로에 비하자면야 구름을 걷는 듯하지만.


  물론 무색무취한 코스일지라도 순례를 이어가는 의미가 퇴색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로 만난 마을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러 ‘무기여 잘 있거라’를 집필했다고 알려진 부르게테 호텔이 있다. 또한 목장의 울타리를 길동무 삼아 걸으며 어제 짙은 운무로 인해 제대로 보지 못했던 말과 양들을 지근거리에서 보았고  피톤치드가 넘쳐나는 고즈넉하고 인적이 드문 숲 길엔 이루 말할 수 없이 운치 있기 때문이다.


순례객들이 이어서 걸어가는 모습(좌),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부르게테 호텔(우)
넓은 초원지대와 한적한 숲길과 목장


  론세스바예스에는 공립 알베르게 하나뿐이다. 같은 알베르게에서 시차를 두고 출발해서 그런지 순례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띄엄띄엄 무리를 이룬 채 줄 지어 걷는 모습이 재미 있다. 까미노를 걷는 느낌이 물씬 풍긴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저마다 까미노 걷기에 열중했는데 유독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나 노부부가 특히 눈에 들어온다. 순례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나이드신 순례객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비록 걸음은 조금 느려도 서로를 챙기며 다정히 걸어가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생각해 보니 내가 40대까지는 길을 걷을 때 아내 발걸음에 맞춰 손을 맞잡아 걸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손 잡는 걸 잊은 채 아내보다 반 보 앞장서 걷기 일쑤다. 그만큼 애정이 작아진 걸까? 아내가 시골길을 오래 걷는 걸 그다지 즐겨하지 않아 순례를 홀로 떠나왔지만 완주한 다음 귀가해서는 예전처럼 손을 잡고 두런두런 신변잡기를 얘기하며 걸으리라 다짐해 본다.


  7km를 걸어 에스피날 마을에 들어섰다. 첫 번째 카페에서 잠깐 쉬어갔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나는 까미노 중에 오렌지 주스와 코크를 주로 마셨다. 노변에 위치한 많은 카페들이 오렌지를 즉석에서 짠 주스를 만들어 준다. 가격은 대체로 2~3유로 수준. 현지 물가로 싼 편이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 기준으로는 괜찮은 가격이다. 에스피날로부터 7km가량을 더 걸어 비스카레타와 린소아인 초입의 카페를 지나쳤다. 에로고개를 넘어야 하니 중간에 쉬긴 쉬어야 하는데 카페가 보이질 않는다. 쉴만한 곳을 찾았다. 젊은 남녀가 언덕길 초잎에 있는 주택가 앞에 놓은 기다란 대들보로 만든 의자에 앉아 쉬고 있다. 얼핏 보기에도 덩치가 무척 큰 대형견이 그들에게 먹이를 달라고 꼬리 친다. 누나나 나나 모두 개를 무서워하는 편이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앞으로 먹을 곳 찾기 만만치 않을지 모르기도 하거니와 만의 하나 옆에 의지할만한 순례객이 있겠다싶어 용기를 내 자리를 잡았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개들이 눈방울이 동글동글한게 무척 순해 보였다. 평소에도 순례자들에게 먹이를 얻어먹었는지 우리에게도 바짝 다가서서 사뭇 살갑게 먹이를 달라고 칭얼거린다. 등골이 살짝 오싹하기도 했지만 바게트 몇 조각을 떼어 던져주었다. 한참을 더 달라며 주위를 서성이다가 이내 저기 오는 순례객들의 인기척에 그쪽으로 꼬리를 치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진다. 그제야 마음 편히 사과와 바게트를 주섬주섬 챙겨 먹었다.


에스페날의 첫 번째 카페, 에로고개에서 만난 동네 강아지


  허기를 대충 때우고 조금 더 쉴 작정으로 시간을 보내는데 물탱크 뒤에서 길냥이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에 두고 온 반려묘 하쿠와 타타가 벌써 보고 싶어졌다. 아이가 먹을 걸 주고 싶은데 길냥이가 먹을만한 게 없다. 적당한 거리에서 우리와 눈을 맞춘 아이는 흥미를 잃었는지 나왔던 곳으로 들어갔다. 후일담이지만 까미노를 걷는 중에 꽤 많은 길냥이들을 보았다. 대부분 건강하고 주민들이 보살펴 주는 아이들이라 추측되었으나 개중에는 병에 걸려 안타까운 녀석들도 있었다. 까미노의 길냥이들에게도 주님의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본다.


  전세계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고성장하는 일부 후진국들을 제외하고는 글로벌 전반으로 경제성장률이 기조적으로 낮아지는 추세이다. 세계 공통적으로 출산율 저하가 이어지고 있어 고령화 시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한편 MZ세대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좌절도 심각한 지경이다. 반려묘를 키우는 입장에서 자식 같은 하쿠와 타타, 이브가 한없이 사랑스러워 남들이 보기에 필요이상의 돌봄을 하는지 모르겠다. 반려묘를 키우는 입장에서 자신과 함께 사는 려동물을 정성스레 부양하 반려동물권을 강조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반려동물에 관심을 쏟는 만큼 미래 희망을 잃고 있는 청년 세대와 소외계층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남보다 앞장서야 할 사회적 의무가 있다고 여긴다. 다음 세대와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경시하는 동물권은 어불성설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갈등과 좌절에 빠졌던 미국 청소년들을 노래한 록 그룹 Alice Cooper의 ‘I’m eighteen(482)’이 주는 메시지에 주목하고 싶다. 투표권이 없고 술을 마실 수 없는 18살에 베트남 전쟁에 징병되어 끌려가는 미국 청소년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요즘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기 어렵고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에 결혼과 출산을 태업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정부가 제대로 된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수립하도록 성숙한 시민들의 건전한 압력 행사에 나서야 할 때인 것 같다.


Alice Cooper - I'm eighteen(1970년, 482위)


  수비리에 다가설수록 날이 점차 맑아졌다. 언덕을 다 내려와 수비리 초입의 다리가 보일 즈음엔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하늘이 제법 파랗다. 리오 아르가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Bar Valentin에 갔다. 구글 평점이 꽤 높은 소문난 마을 맛집이다. 이 집을 고른 이유가 있다. 한국의 양념치킨과 비슷한 맛이라는 닭봉 튀김이다. 순례에 적응하기 바쁜 초반 입맛을 돋아줄 메뉴로 적당했다. 아쉽게도 가게 사정으로 며칠 동안 주문이 불가하다 하여 로스트 치킨과 폭립으로 대신했다. 닭봉 튀김을 너무 기대한 나머지 대신 주문한 메뉴가 그럭저럭 평범한 맛이다. 그래도 음식을 남기는 게 마음이 꺼려 가급적 다 먹을 요량으로 누나에게도 강권한게 화근이었다. 피곤한 몸에 평소 즐기지 않는 메뉴를 억지로 꾸역꾸역 드셔서 그런지 식사 후 컨디션이 나빠져 저녁을 생략했다. 순례에 필요한 궂은 일은 동생에게 다 맡기고 자신은 마음 편하게 몸만 왔다며 미안해 하는 누나가 순례 기간 내내 무리하고 퉁명스런 요구를 다 받아 주셨다. 순례를 할수록 미안함이 커졌는데 정작 누나에게 이를 표하지 못했다. 다음에 뵐 때는 뒤늦은 사과를 드려야겠다.


수비리 초입 풍경,  다리 바로 옆에 위치한 리오 아르가 알베르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중에 작은 마찰이 있었다. 가게에서 일상적인 순례 행색과 확연히 다르게 모델처럼 화사한 드레스로 치장한 4명의 여성 순례객이 유독 눈에 띄었다.  빈자리가 없었는지 입구 밖 바로 옆 스탠드 테이블에 서서 맥주와 와인을 즐기며 왁자지껄 자기들끼리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중 동양계 혼혈 여성이 입구에 나오는 나를 보지 못하여 나와 살짝 부딪혔다. 내가 피한다고 피했지만 손동작을 과하게 하며 상반신을 움직인 그녀와 서로 어깨가 부딪힌 것이다. 가벼운 사과의 말을 기대했는데 웬걸, 마치 내가 일부러 자기와 부딪힌 것처럼 째려본다. 순간 당황해 제대로 말을 못 하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바라만 보다가 되돌아섰다.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둔 것인데 정체 모를 4 총사와의 악연이라면 악연의 시작이다.


  가능하면 업은 쌓지 말아야 한다. 지금 당시 일을 회상해 보니 내가 나서서라도 먼저 미안하다고 했으면 서로 그리 나쁜 인상으로 기억될 일도 아니었을 것 같다. 집을 떠나 이곳 스페인 북부의 산간 마을까지 순례를 온 목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미국을 대표하는 록 밴드 Foreigner의 ‘I want to know what love is(476위)’의 가사처럼 내가 올랐던 피레네 산처럼 내 어깨를 누르는 세상과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맛보게 되는 상심과 고통으로부터 외로운 삶을 바꾸기 위해 멀고 먼 여행을 왔다면 피치 못해 실수한 순례객에게 먼저 따뜻한 인사를 나눌 정도의 포근한 마음씨를 베풀어야 했던 건 아닐런지 하는 후회를 했다. 하드록에서 더 이상의 진전을 이어가지 못한 이 그룹이 소프트록으로 선회한 결과물이 이 곡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았지만 서구에서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19080년대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1984년 그래미 어워드의 ‘올해의 노래’로 유력했으나 팝스타들의 협연한 USA for Africa의 ‘We are the world’의 돌풍에 밀린 아쉬움이 있다.


Foreigner - I Want to Know What Love is(1984년, 476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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