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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Jun 18. 2024

[6일 차] 예정대로 흐르는 순탄한 인생은 없다

Ramble On - 진로를 찾아 떠나는 긴 여행

6일 차 에스테야 – 로스 아르코스


  평소에 비해 아침을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에스테야 도심을 빠져나와 이라체 수도원과 캠핑장을 지나칠 즈음이었다. 구름이 가득 걸린 하늘에 돌연 무지개가 떠올라 빙긋 눈웃음을 친다. 마치 오늘은 즐거운 일이 가득할 거라 일러주기라도 하듯. 햇볕이 구름에 가려 아직 아침 기온이 꽤 쌀쌀하다. 그래도 비 오지 않는 것을 감지덕지한 기쁜 마음이었다. 그론세 닷컴이 매긴 코스 난이도는 별 2개. 그다지 어렵지 않다. 숙소보다 250 미터 높은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까지 오르막 길이 이어지는 게 그나마 난관이라 할 만하다. 출발 전에는 그론세 닷컴의 코스 프로필에서 상당히 경사면으로 표시된 긴 업힐에 긴장했다. 그런데 막상 걸어보니 의외로 힘들지 않았다. 10km에 걸친 완만한 오르막이 부담일리가 없다. 정상 직전 2km에 걸쳐 100미터를 오르는 구간에서 약간 땀이 나고 숨이 차는 정도였다. 일흔을 훌쩍 넘긴 일본인 노부부도 이 언덕길을 무난히 올랐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도 버거워하지 않고 말이다.


  다시 한번 느끼는 바이지만 제발 필요 이상으로 지레 겁먹지 말자. 수리적으로 접근했으면 자명할 일이었다. 이 구간은 밑변이 2km, 높이가 100m인 삼각형과 같다. 따라서 tan(θ)= 100/2000이다. 각도로 치환하기 위해 역 tan(100/2000)를 계산하면 대충 2.86도이다. 서울 남산 국립극장에서 남산타워 아래 버스 정류장까지 이어진 포장도로의 평균 경사가 6도이다. 남산 길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여기는 얼마나 손쉬운 길이겠는가!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이라체 대장간의 쎄요 찍기와 수도원에서 와인 시음이다. 순례길을 완주했다는 증명서를 받기 위해서는 순례자 여권인 크레덴셜에 매일 한두 개의 쎄요를 찍어야 한다. 프랑스 루트를 걸었다는 일종의 증빙도장이다. 이라체 대장간에서 한국인 순례자 일행들을 만났다. 개중에 인천공항에서부터 만났던 육군 대령출신 김 선배와 수비리 다리 근처에서 인사만 하고 지나쳤던 젊은 남녀가 있어 더 반가웠다.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포도주 시음대에서 각자 저마다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평생 금주해야 하는 내게 매우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이곳을 찾는 모든 순례자들은 저마다 기념 삼아 와인을 따른다. 상당한 양의 와인이 필요한 만큼 숙성이 덜 된 와인을 제공할 거라 추측했다. 그래도 보졸레누보 정도의 맛은 되겠지 했는데 마셔본 순례자들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그마저도 못 되는 듯싶다. 탄닌이 강해 너무 떫거나 물에 희석해 맛이 별로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짐작했다. 옅은 와인 색상을 감안하면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역시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나 보다.


위 : 이라체 대장간, 가운데 : 수도원 와인의 샘, 아래 : 햇살 아래 방긋 웃는 무지개


  오늘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광활한 개활지의 아름다운 경관과 순례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한국인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동행을 들 수 있다. 특히 후반부 푸드트럭에서 재회하여 로스 아르코스까지 마지막 5km 남짓 같이 걸었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우선 같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으니 누나와 단 둘이서 걸을 때 보다 힘이 덜 들고 시간도 체감적으로 얼마 안 걸린 기분이었다. 거기에 순례를 떠나온 젊은이들의 생생한 심경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어 그 의미가 더 컸다.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 오르는 길. 언덕에 오를 무렵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위, 왼쪽)


   동행하게 된 젊은이들과 서로 조심스레 자기소개를 했다. 이삼십 년 이상의 나이차를 앞세워 대화를 강제하는 걸 나 스스로 경계했기 때문이다. 수비리에서 만났던 93년생 기혼의 여성 순례객 C. 결혼한 지 3년이 넘었다는 그녀는 2세가 생기기 전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홀로 순례를 왔다고 했다. 조카들 나이뻘에 싱그런 미소가 무척이나 예뻤던 처자다. 수비리에서 그녀와 같이 있는 걸 봤던 탓에 C의 남편으로 오해했던 청년 S. 남편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그녀와 잘 어울리는 포근한 인상을 가졌다. 직업이 프리랜서 디자인이라 했다. AI가 더욱 발달하면 경쟁력을 잃을까 걱정이 많다고 한다.  앞으로의 진로를 재고하기 위해 왔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군대를 제대 후 복학하기 전에 여행 삼아 왔다는 J. 한동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는 이 친구 역시 향후 진로가 최대의 고민이란다.


  디자인이나 컴퓨터 공학은 숫자와 관련된 일을 평생 해온 내게 문외한의 영역이다. 당연히 심도 깊은 의견이나 조언을 해줄 수가 없다. 그저 옆에서 맞장구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문제의식을 이야기할 때는 진심을 다해 공감해 주고 구체적인 진로 방향을 고민할 때는 그간의 사회 경험을 밑천 삼아 내 주관이 아닌 일반론적인 대안을 간략히 제시했다. 재직 중인 회사에 한동대 출신 팀장이 한 명 있었다. 온화한 성격에 사고의 폭이 넓었다. 특히 미래  성장산업을 편견 없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접근하는 장점을 가진 친구였다. 한 명의 사례로 일반화할 수 없다. 그래도 독특한 한동대 학풍이 팀장 같은 유능한 인재를 키워냈다고 믿는 편이다. 그래서 J에게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취직 준비를 하지 말라고 일렀다. 한동대의 강점을 살려보라는 권고를 했다. 필요하면 사회에 진출한 선배들의 조언을 구하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챗GPT가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작업자가 요청하는 노래와 그림을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발전 속도가 놀랍다. 그러나 아직은 학습된 데이터에 기반한 창조이거나 사전에 설정된 여러 조건 내에서 원하는 결과물을 틀에 맞춰 구현하는 수준이라 봐야 한다. 크리에이티브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크리에이티브의 생산성을 제고하는 데 크게 일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근거로 S에게는 디자인 산업의 미래를 너무 어둡게 보지 말라고 충고했다. 김 선배를 제외한 세명은 공교롭게 모두가 남양주 출신이다. 도농, 덕소, 이천. 모두 누나가 사는 구리에서 가까운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누나는 세명의 젊은 순례자들과 더욱 친근하게 신변잡기를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다. 머나먼 타국으로 순례에 나설 정도로 가볍지 않은 젊은이들의 고민을 옆에서 들으며 덜어준 것에 불과했지만 우리의 몫을 다했을 거라 위안 삼는다.

   

위 : 순례자들을 위해 연주하는 주민들과 푸드 트럭, 아래 : 로스 아르코스까지 5km 남은 동행길


  로스 아르코스까지 동행한 6 명의 자유롭게 나눈 대화에서 Led Zeppelin의  ‘Ramble on(433위)’이 떠올랐다. Ramble on은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다 혹은 긴 산책을 한다는 뜻이다. 이 곡은 반지의 제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툴킨의 시를 첫 구절에 인용했고 후반에 골룸, 모르도르가 나온다. 절대 반지를 찾아 떠나는 고행의 여정처럼 평생의 운명적인 인연을 찾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 곡에서 연인을 자신이 찾으려는 희망 진로로 바꾼다면 미래를 찾는 젊은 순례객들에게 어울릴 노래이지 않겠나!

 

Led Zeppelin - Ramble On(1969년, 433위)


  Deep Purple의 대표곡 중에 ‘Smoke on the water(426위)’가 있다. 도입부와 곡 중간마다 반복되는 리프가 무척 유명하다. 이 노래가 담긴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스위스로 간 딥 퍼플은 음반 작업 바로 전날, 사전에 녹음장소로 물색했던 카지노 극장에서 열린 콘서트를 관람했다. 그런데 관객이 발사한 조명탄에 불이 붙어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로 생긴 검은 연기가 제네바 호수를 뒤덮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후일담을 소개했다. 어쨌든 딥 퍼플은 돌발 상황에서 계획된 녹음 장소와 일정을 시급히 변경해 차질 없이 앨범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삼사 년 전만 해도 Open AI의 챗GPT가 일으킨 AI 혁명이 전 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것을 누가 알았으랴! 빅데이터와 AI가 고급 프로그래밍 인력을 거침없이 수요 하건만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또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급변하는 하이테크 시대에 진로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미리 단정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급진전한 기술로 인해 제대 후 복학을 앞둔 청춘의 불확실한 진로에 대한 고민에 연기가 잔뜩 낀 호수가 연상되는 건 지나친 비유일까?


Deep Purple - Smoke on The Water(1972년, 426위)


  한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길을 걷는 도중에 어머니와 영상통화를 했다. 한국 시간으로 오후 5시가 넘는 시각. 막내 누나가 준비한 이른 저녁을 드시고 계셨다. 일주일 만에 식구들을 보아서 그런지 둘째 누나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로스 아르코스에 초입에서 사람 손을 탄 고양이를 만났다. 일행들을 피하지 않고 얼굴을 비비는 게 무척 살갑다. 집에 두고 온 하쿠와 타타가 그리워졌다. 조만간 집에 아내와 연락할 때 하타와도 영상통화를 해야겠다.


  로스 아르코스에서는 사립 알베르게를 예약했다. 평이 괜찮은 아담한 숙소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남성과 벨기에에서 온 80대 할머니와 방을 같이 썼다. 벨기에 할머니는 프랑스 루트를 6 년 동안 세 번이나 완주하셨다고 한다. 체크인할 때 저녁을 함께 예약했다. 1층 다이닝 룸에서 만찬을 신청한 순례객들과 함께 먹었다. 각자 자기소개를 짧게 하고선 가까이 앉은 이들과 주절주절 정담을 나누었다.  출신과 인종이 달라도 까미노를 함께 걷는 공감대가 친밀감을 높여주었다. 빠르게 대화할 때 내용을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고 하고픈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해 약간 답답함을 느껴 아쉬웠다. 그러나 언어소통의 어려움보다 불편한 게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들과 격의 없이 이야기하는 상황이 더 어색했다. MBTI 중 ‘I’ 성향의 한계였다.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지 모르지만 서양인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잘 녹아들어 융합을 하는 거 같다. 누구와도 몇 마디를 나누면 이내 친숙한 사이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한다. 반면에 나는 약간 거리를 둔 익숙함이 편하다. 서로가 녹아드는 화학적 융합보다 기계적 결합에 거부감이 덜하다. 까사 데 아부엘라의 저녁 만찬은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이 까미노에 녹아들어 순례자로 일체화되는 일종의  융합과정이었다. 그런데 내게는 대화의 한계와 내성적 성향으로 인해 퓨전보다 크로스 오버로 다가와 아쉬움이 컸다.


  퓨전이 제대로 적용된 사례가 Elvis Presley의 ‘Blue suede Shoes(423위)’이다. 1956년 발표된 이 곡은 최초의 로커벌리 곡 중 하나로 꼽힌다. 로커벌리란 록과 컨트리 뮤직이 융합된 퓨전 장르이다. 록큰롤이 태동할 무렵에 유행했다. 음악에서는 두 장르가 섞여 새로운 장르로 재탄생하는 것을 퓨전이라 칭한다. 어떤 장르에 이질적인 다른 장르를 섞어 만든 것을 크로스 오버라 부른다. 일종의 융합과 결합의 차이겠다. 원곡은 칼 퍼긴스가 1955년에 도입했는데 썩 유명세를 타지 못했다. 이후 교통사고를 당한 칼을 위로하기 위해 엘비스 프레슬리가 트리뷰트 했다.


Elvis Presley - Blue Suede Shoes(1956년, 423위)


위 : 로스 아르코스 초입 동물농장과 길냥이, 가운데 까사 데 아부엘라 알베르게와 성당, 아래 : 순례자들의 만찬과 예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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