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일 차] 오! 자유여, 그 기쁨이여

Tears in Heaven - 후배의 영면을 기리며

by 여운설

2023년 5월 22일 아타푸에르카 - 부르고스 19.7km


김 선배와 헤어졌다. 숙소 앞뜰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걸음 빠른 김 선배 더러 먼저 가시라 했다. 건강하고 무사히 완주하자는 격려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로그로뇨에서 두어 시간 함께 걸으며 교감을 나누던 순간이 생각났다. 사려 깊고 조용한 성품에 마음이 끌렸는데 앞으로 다시 볼 수 없어 매우 아쉬웠다.


출발하자마자 완만한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철조망으로 둘러 쌓인 초지에 수백 마리의 양 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개중에는 아침부터 그리 바삐 어디 가냐는 듯 지나치는 순례객을 쳐다본다.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서서히 몸이 달궈진다. 바람이 심하고 잔뜩 흐려 쌀쌀한 날씨에도 체열로 후끈하다. 어느 틈에 너덜길로 들어섰다. 길바닥은 울퉁불퉁 불규칙하게 깔린 크고 작은 돌멩이 투성이다. 바위에서 부서져 나온 주먹만 한 자갈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태고적 이 땅에 살았을 구석기인들은 산기슭 어디서나 발에 차이는 이 돌로 소중한 타제석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아직 경미한 발가락 통증이 남은 누나에게 자갈길이 부담될 게 틀림없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 했다. 괜히 발목이라도 다치면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20km가 채 되지 않는다. 체크인 시각도 여유 있게 오후 2시 30분으로 잡아 놨다. 시간은 무척 널널하다. 현재 시각 7시 50분. 설렁설렁 걸어도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상당 시간을 때워야 한다. 양반 행차하는 느긋한 걸음에도 40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언덕 정상 바로 옆에 커다란 나무 십자가가 길쭉하게 세워져 있다. 이곳을 지나치는 순례객들이 자신의 번민을 대속하려 하나둘씩 쌓은 걸까? 십자가 아래에 조그만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십자가를 보는 것만으로 죄를 씻어내 경건해진 기분이다. 한국의 산들은 대체로 정상이 협소하다. 적게는 서너 명 많아야 수십 명이 자리할 수 있다. 여기는 얼핏 봐서 수십만 군중이 모일 법한 평지가 사방에 가득하다. 마치 전쟁의 신 아레스가 우뚝 솟은 산 허리를 칼로 가로 베어 만든 광장 같다. 앞선 순례객이 사라진 너머 아래로 비야발Villaval이 펼쳐져 있겠지.

초지대의 양떼를 지나 새들이 합창하는 길을 오르면 정상 초입에 있는 커다란 십자가가 순례객을 맞이한다. 정상에 펼쳐진 평지 끝자락 아래에 비야발 전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까미노에서 처음 경험하거나 은연중에 인식한 게 몇 개 있다. 우선 유난히 낮게 깔린 뭉게구름이다. 거짓말 좀 보태 저 멀리 보이는 뭉게구름에 다가서면 머리가 닿을 것 같다. 서울에 떠다니는 뭉게구름보다 훨씬 낮은 것 같다. 처음엔 막연히 고지대라서 구름이 낮은 거라 넘겨짚었다. 이내 의문이 든다. 그런 이유라면 남한 제일 봉 백록담이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로 구름이 널려 있어야 했다. 정확한 까닭은 모르겠다. 지형 특성이라 막연하게 짐작했다. 비만 그치면 습하지 않은 날씨에 강렬한 태양 복사열로 쉬이 달궈진 공기가 이슬점을 높게 형성시킨 탓이겠거니 여겼다. 이유가 어쨌든 정수리에 사뿐히 내려앉을 법한 뭉게구름이 낯설어 자꾸 눈길이 간다.


둘째 언제부턴가 귀를 자극하는 새들의 공연이다. 방금도 십자가로 오르는 너덜 비탈길 주변 숲 속에서 한 무리 새떼들이 구성지게 울어젖혔다. 지지배배, 짹짹 서로 한 소절씩 정겹게 주고받는다. 새들의 합창 소리가 피곤에 찌든 순례객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다. 질주하는 버스의 타이어 마찰음,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 지하철이 멈추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굉음 등 도심의 일상에서 귀를 찢는 소음과 천양지차이다. 까미노에서나 맛볼 수 있는 한정판 ASMR이다. 숲길을 지날 때마다 새들의 판타스틱한 삼중창, 사중창이 기다려진다.


끝으로 납작 복숭아를 꼽고 싶다. 이 놈은 처음 보는 낯선 모양새다. 위에서 보면 여느 복숭아처럼 동그랗다. 그런데 옆을 보면 위아래로 눌려 있는 게 정말 납작하다. 도넛을 연상해 보시라. 도넛 구멍을 메우면 딱 요 모양이다. 주먹보다 작은 크기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한입 거리다. 단물이 가득하고 육질은 적당히 물러 식감도 괜찮다. 오뉴월이 제철이라 구하기 쉬워 간식 삼기 제격이다.


서울 도심의 야경을 이루는 장식물 중에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교회 종탑과 십자가들이 제법 많다. 시선이 닿는 곳곳마다 세워진 십자가에 어떤 감흥도 일지 않았다. ‘교회가 이렇게 많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까미노에 와서 조금 달라졌다. 순례길이 지나는 마을마다 대개 조그맣더라도 성당을 갖췄다. 규모가 큰 곳엔 여러 성당이 있기도 하다. 길을 걷다 보면 성당 외에도 가톨릭을 상징하는 건축이나 조각상과 같은 장식물들을 자주 접한다. 성당을 마주치거나 십자가 등을 지나칠 때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들을 바라보기 전, 가슴 한편에 남아 있어선 안될 불결한 무언가를 털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일어난다. 왜 그런지 통 알 길이 없다. 그냥 그런 마음이 저절로 든다. 특히 카미노의 돌무더기 위에 세워진 십자가를 마주 대할 땐 더 그렇다. 나를 돌아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특정하지 못할 수많은 잘못을 돌이켜 참회한다. 찰나의 고백으로 그 죄가 결코 사해 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용서도 바라지 않는다. 단지 고백 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려운 심정이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가족과 친한 지인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무사 안녕을 기원한다. 특히 구순에 이르신 어머니와 암과 싸우고 있는 선후배들의 건강을 간절히 기원했다.


참척慘慽과 단장斷腸의 슬픔을 노래한 이가 있다. 참혹하리만큼 슬프고 창자가 끊어질 고통의 심정이 어떠할지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Eric Clapton은 'Tears in heaven(353위)'에서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을 그려냈다. 에릭의 네 살배기 아들 코너는 동물원에 데려가기로 한 그를 기다리며 유모와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변을 당했다. 가정부가 청소하려고 열어 논 창문 너머로 숨으려다가 베란다에서 추락한 것이다. 코너는 사고 직전 아빠를 사랑한다는 단 한 줄의 편지를 남겼다. 아빠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에릭은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에릭의 답장이 바로 이 노래다. 첫 소절은 에릭이 직접 썼다. 슬픔이 복받쳐서였을까? 나머지 구절은 작곡을 맡은 윌 제닝스에게 부탁했다. 그리운 아들에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려는 각오를 그려달라면서. 아들의 사고가 있기 전 에릭은 사정이 생겨 예약한 헬리콥터를 스티비 레이 본에게 양보했다. 그런데 헬기가 추락하여 스티비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노래를 준비하다가 코너를 기리려 만들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아들의 추모곡이라 상업적으로 이용할 의지가 전혀 없었으며 2004년에 이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단장의 슬픔에서 헤어 나와 그때 감정이 남아 있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MTV 실황 버전인 'Unplugged(1992년)'는 개인적으로 애장 하는 앨범이다. 아끼던 후배가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항암 치료를 무탈히 잘 받고 있다며 산티아고 완주 후 늦여름 즈음에 만나자 했었는데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부음을 받았다. 후배가 보고 싶을 때면 가끔씩 LP를 걸거나 스크린을 내려 에릭이 눈 감고 음유하는 영상을 감상한다.


Eric Clapton - Tears In Heaven(1991년, 353위)


산에서 내려와 비야발을 지났다. 뭉게구름이 높다란 나무 꼭대기 지척까지 내려앉고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햇살은 대지 위를 질주한다. 태양의 아우라에 온세계가 연둣빛으로 호응하니 상서로운 기운이 사위를 가득 채우는 장관이다. 짙은 녹음은 이내 썰물이 되어 일촌광음으로 뒷걸음쳐 물러난다. 차안이 아닌 피안의 세계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실루엣에 가린 미지의 어딘가로 내 몸이 쑤욱 빨려 들어가는 몽환적인 느낌이다. 좀 더 걸어 오르바네하 리오삐코Orbaneja Riopico를 지나 부르고스 공항을 앞두고 갈림길이 나타났다. 공항 오른편 길로 가면 비야프리아Villafria를 경유해 부르고스 도심으로 가는 쇼트커트다. 시간상 여유가 많아 공항 왼편으로 크게 돌기로 했다. 카스타냐레스Castañares를 지나 아르란손강Rió Arlanzón을 끼고 우회하는 공원 숲길을 지난다. 서두르면 후회만 남는다는 교훈을 얼마 전에 알았다. 고즈넉한 산책길을 마다해선 안된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비야발을 지나 오르바네하 리오삐코를 향해 가는데 짙은 구름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내려온다. 연두색으로 물든 밀밭이 황홀하다. 천국이나 신선이 사는 도원이 이런 분위기라 여기졌다.


어느 누구도 내게 부르고스로 가는 갈림길 중 왼쪽 길을 가라 하지 않았다. 오롯이 내가 자유로이 선택을 한 결과다. 에릭 클랩튼과 그리 길지 않은 우정을 나눈 역사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추앙받는 Jimi Hendrix는 'Little wing(357위)'에서 아무 제약이 없는 자유를 이야기했다. 화자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연인이 천 가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그녀는 연신 괜찮다며 자신에게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가져가라고 위로 한다.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자유Freedom라면 어떤 제약도 없는 자유다. 그러니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거리낌없이 마음껏 향유하고 싶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한한 자유는 위험하다. 자유주의 태두라 불리는 존 스튜어트 밀은 남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사적인 행동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의 파레토 최적을 외친 것이다. 다만 그 행동이 사회에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전제하긴 했다. 밀은 인간의 자유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 사회가 이 정도의 불편함을 충분히 감수해야 한다 믿었다. 한 개인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위해危害하다는 조건이 달려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할 자유를 부정한 것이다. 자유에 대한 밀의 견해는 프리덤보다 리버티Liberty에 근사하다. 리버티의 사전적인 정의는 억압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 상태이다. 상기한 내용들을 종합하면 리버티는 자유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동시에 타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제약을 받는 자유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주류 계층은 정부 규제를 비판하거나 시장 원리를 옹호하고자 자유 민주주의의 원칙을 종종 언급한다. 대개 행위의 자유만을 강조하지 자유의 책임을 부각하진 않는다. 이들이 말하는 자유란 freedom일까? liberal 일까? 전자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국가와 권력의 부당한 강압으로부터의 정치적 자유 못지않게 자유의 존재와 정당성을 위협하는 개인의 과도한 일탈을 법률로 제한한다. 프리덤의 과잉에 빠지면 강자존 약자멸强者存 弱者滅, 적자생존의 정글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회에 기여하는 강자를 사회 구성원들이 존중해 주는 강자존强者尊이란 리버티의 이상을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맛볼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강자존强者尊이란 피안의 세계를 그리는 동안 부르고스로 향하는 숲길에 들어섰다. 아르란손 강여울을 건너니 차츰 차안의 세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비야발을 지나며 잠시 접했던 몽환적인 경치가 Eurythmics의 'Sweet dreams(are made of this, 356위)'가 던지는 이미지와 절묘하게 겹친다. 도입 부분의 신시사이저 베이스 리프와 드럼 소리가 환상의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 같다. 애니 레녹스의 중성적인 목소리와 가녀린 코러스도 이런 분위기를 한층 고양시킨다. 이 노래를 듣자면 나도 모르게 몽롱해진다. 달콤한 꿈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 걸까? 인류가 바라는 유토피아는 어떻게 건설해야 하나? 몽환적인 분위기와 달리 이 노래를 만들 때 연인이었던 데이비드 스튜어트와 애니 레녹스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악기와 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출 받아야 할 정도로 재정이 열악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자주 다퉈 둘의 사이가 악화일로에 접어들 즈음에 이 노래를 만들었다. 노랫말 중에 누군가는 너를 이용하길 원하고 누구는 너에게 이용당하기를 원한다는 대목이 있다. 가슴에 무척 와닿았다. 평판을 신경쓰고 작은 것에 연연하는 소심한 성격이라 남에게 해 끼치고 싶지 않지만 누구로부터 피해받는 것도 원치 않는다. 간섭없이 알아서 내 할 일을 제대로 하면 족하는 성향이다. 이런 성격인지라 우리 사회가 구시대의 낡고 천박한 자본주의가 아닌 공정한 경쟁을 담보하는 제대로 된 자본주의로 승화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파레토 최적의 끝없는 개선을 추구하는 경쟁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Eurythmics - Sweet Dreams(Are Made of This, 1983년 356위)


강을 끼고 공원을 관통하는 숲길이 도심 한복판까지 이어진다. 한 주가 시작되어 분주할 월요일인데도 한가로이 산보를 즐기는 시민들이 상당하다. 생면부지 이방인이 'Holla'하며 인사를 건네면 산책 나온 주민들이 환하게 웃으며 순례자에게 'Buen Camino'라 축복해준다. 한결같이 삶에 찌들지 않은 여유로운 표정들이다. 무언가에 쫓기거나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 생경하면서 부러웠다. 지나가는 낯선는 이가 웃음을 건네면 무슨 의도일까 의심을 앞세워 경계하고 무표정히 굳은 얼굴로 멀뚱히 쳐다보는 우리 사회와 너무도 대비되었다. 경제적으로야 북부 유럽에 떨어지지만 이 나라가 그래도 선진국임을 상기하게 해주는 계기 중 하나였다. 공중의식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보행자가 길을 건너면 바로 멈춰 서거나 속도를 낮춰 서행하다 멀찌감치 정지한다. 행인이 몇 미터 앞에 있던 이삼십 미터 넘게 있던 마찬가지다. 무단횡단하는 경우에도 예외가 없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보행자를 무시한 채 쌩하니 지나가는 교통 문화에 익숙해 먼저 가라 손짓을 해도 요지부동이다. 언제 어디서든 보행자를 우선하는 문화가 강력한 규제 탓인지 모르겠다. 원인이야 어떻든 교통약자를 보호하는 교통문화가 몸에 밴 시민의식이 부러웠다.


오르바네하 리오삐코와 카스타냐레스를 잇는 숲길을 따라가면 부르고스 공원 산책로를 만난다. 공원 규모가 상당하다. 넓은 공원에 시민들이 듬성듬성 한가롭게 산책을 즐긴다.


이런 조그만 경험들이 쌓여 스페인에 대한 편견이 많이 깨졌다. 2011년, 남부 유럽 국가에 닥친 재정 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세상은 이들을 남부의 돼지들이라며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라 조롱했다. 공교롭게 이 네 나라들은 모두 한때 세계를 제패한 제국이었다. 스페인은 다스리던 강역 중 어느 한 곳은 반드시 해가 떠있어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다. 허나 제국은 영원하지 못했다. 신대륙에서 약탈한 금과 은에 과도하게 의존하다 쇠락한 영욕의 세월을 겪었다. 화려한 제국의 낙일은 결코 장려하지 못했다. 관객 없는 무대 위에서 홀로 쓸쓸히 은퇴공연을 하는 연극배우 마냥 네덜란드와 영국에 밀려 역사의 무대 뒤로 내려가야 했다. 부르고스 대성당을 가기 위해 공원을 빠져나왔다. 부르고스 시청 광장에 레콘키스타Reconquista의 주역 중 한 명인 엘 시드El Cid 기마상에서 훗날 도래할 제국의 풍모를 엿볼 수 있었다.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국토 회복을 주도한 카스티야 왕국은 세계를 경영하는 제국으로 거듭날 스페인 통일 왕국의 초석이었고 부르고스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다.


부르고스 대성당에 도착했다. 정오를 갓 넘은 시각, 작렬하는 태양으로 이글거리는 광장이 한산하다. 햇볕을 쬐는 고양이 마냥 한참 동안 벤치에 앉아 대성당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순례에 지친 나그네동상 옆에 앉아 사진 찍은 다음 적당한 바를 찾아 타파스로 가벼운 점심을 먹었다. 체크인 시간에 맞춰 예약한 호스텔로 갔다. 알베르게가 아니라 그런지 세탁기가 구비되지 않았다. 코인세탁소에 갈까 하다가 시립 알베르게로 빨래 원정을 가기로 했다. 관리인이 입구에서 제지할까 봐 가슴이 콩당콩당 요동쳤다. 다행히 걱정과 달리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순서를 기다렸다. 차례가 되어 세탁물을 세탁기에 넣으려는 찰나 젊은 한국 여성이 다가온다. 우리가 세탁을 시작하면 빈 곳이 없다. 이미 돌고 있는 세탁기들도 이제 막 가동한 터라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처음 보는 사이지만 괜찮으면 같이 세탁하겠냐고 제안했다. 우리가 지불할 요금은 어차피 똑같고 세탁 용량이 한참 남아 일인 분의 세탁물을 더 돌려도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녀는 우리 제안을 고마워하며 흔쾌히 수락했다. 이는 작은 호의에 불과해 천사의 선행이라 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제대로 된 선행은 다음 기회로 넘겼다. 저녁을 평점 높은 맛집에서 모르씨야Morcilla, 스페인 순대와 깔라마리Calamari로 해결했다. 알코올을 입에 댈 수가 없어 누나가 상그리아 마시는 걸로 대리 만족했다. 지난 오 년 동안 마신 콜라보다 여기서 12일 동안 마신 양이 더 많은 거 같다. 카페인과 탄산 덩어리인 콜라가 그래도 알코올보단 위장에 더 낫겠거니 애써 위안하는 중이다.


부르고스를 창시한 디에고 로드리게스 포르셀로스와 레콘키스타의 영웅 엘시드 조각상을 지나 부르고스 대성당에 도착했다. 부르고스에 들어서야 영욕의 스페인 역사를 제대로 실감했다.


대성당 광장에서 한참을 노닐었다. 타파스로 오찬을 하고서 숙소에 들어가 잠시 쉬다가 빨래를 하러 시립 알베르게에 갔다. 저녁은 모르시야와 깔라마리 세트. 보기보다 양이 많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