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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Aug 17. 2024

[14 일차] 청춘 열정

We Will Rock You - 가슴을 뛰게 하는 요동

2023년 5월 24일 부르고스 -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 20.3km


  이제 이른 아침 출발이 익숙해졌다. 게다가 2인 전용실이라 다른 이들 눈치를 볼 필요 없어 한결 수월하게 준비를 마쳤다. Pension Pena을 나와 산타 마리아 대성당으로 향한 시간이 오전 6시 30분. 동트기 전 여명이 사위를 분간하기 충분해 걷기에 적당했다. 순례를 시작한 지 어느덧 이주일이 되었다. 장거리를 걷는 것에 완전히 적응해 20km 남짓한 거리는 설렁설렁 동네 마실 가는 것에 불과하다.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 여유 부리며 천천히 가도 오후 1시 전후로 숙소에 도착할 수 있다. 매일 맞이하는 하루 순례 일정이 점차 정형화되니 시간이 부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내야 할지를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다. 8시 넘어 강우 예보가 있었는데 구름만 듬성할 뿐 하늘이 화창하다. 이런 날은 왠지 기대치 않은 횡재를 만난 기분이다. 더군다나 그토록 고대했던 해발 800 미터가 넘는 메세타 평원에 처음 발 딛는 날이 아닌가? 유쾌한 심정이 사뿐한 걸음으로 이어진다. 가벼운 흥분으로 고양된 활기찬 기운이 온종일 이어져 동명 소설의 씁쓸한 결말로 마무리되지 않기를 바랐다.


  부르고스 도심을 빠져나오기 전에 바에서 간단히 요기를 했다. 육류를 많이 챙기겠다고 다짐했지만 아침엔 불가능하다. 진수성찬이래 봤자 또띠야와 바케트와 생과일주스 정도다. 오늘은 그래도 바나나까지 곁들였으니 고행을 자처하는 순례객에게 어울릴 황후의 밥이겠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지나 부르고스 외곽을 빠져나오자 한적한 비포장길이 우리를 맞이했다. 청람한 하늘 위로 낮게 뜬 구름이 고요히 흘러간다. 흙길을 짚을 때마다 틱틱거리는 등산 스틱 소리와 언제나 감미로운 새들의 합창 만이 들판의 정적을 깨운다. 일견 불협화음처럼 들릴 금속성 소음과 천상의 지저귐 소리가 묘하게 조화를 자아내는 가운데 비얄비야 데 부르고스를 지나쳤다.

   

대성당 옆으로 이어진 순례길을 한 시간 가량 걸어 도심을 빠져 나오면 산티아고까지 501km 남았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반겨준다. 오늘도 키다리 아저씨와 아침 여정을 함께 한다.


  순례에 동행한 누나가 새벽녘 꿈에 나왔다. 누나와 함께 동아리 수련회에 참석했다. 어쩐 일인지 술을 즐기지 않는 누나가 만취해 신발을 분실했다. 그 와중에 선배들과 분란이 생겨 실랑이를 하다 선배 한 분이 거인으로 변해 도망가는 우리를 잡아 가두려 맹렬히 쫓아왔다. 천신만고 끝에 태국에 도착해 순례를 이어가는데 하늘이 뚫린 듯 폭우가 내려 까미노 사방으로 홍수가 범람했다. 가까스로 물난리를 피해 북한에 겨우 도착했는데 경비병에 발각되어 허둥지둥하다가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는 자각을 한 이후에도 한참 동안 졸인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그야말로 극동과 동남아를 종횡무진하는 드림판 로드무비였다. 꿈은 뇌에 저장된 기억이나 정보가 무작위로 재생되는 것이다. 평소에 자주 생각하던 내용이 꿈에 나타날 확률이 높지만 최신 연구에 따르면 각성 시에 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은 기억이나 방어기제가 등장할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까미노를 걸으며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여겼는데 아직 나의 원초아(Id)는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긴장과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했나 보다.


  거인으로 변해 우리를 쫓았던 선배에게서 원주민들이 케찰코아틀의 현신이라 믿었던 코르테즈에게 멸망한 아즈텍 제국을 연상했다. ‘Cortez the Killer(321위)’는 Neil Young이  정복자 코르테즈와 정복당한 아즈텍 문명을 노래한 곡이다. 원주민 처녀에게서 아들을 얻은 코르테즈는 유럽계 백인과 아메리칸 인디언의 혼혈인 메스티소의 시조였다. 프랑코가 통치하던 시절엔 이곳 스페인에서 금지곡이었단다. 내가 만일 음악감독이었다면 이 꿈에 어울릴 메인 테마로 어떤 곡을 택했을까? Queen의 We will rock you(330위)를 꼽았을 것 같다. 이 곡엔 강렬한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다. 드럼과 발구름 그리고 박수로 이어지는 쿵쿵 짝, 삼박자의 단순한 리듬과 프레디 머큐리의 독창에 이은 관중들의 후렴구 합창이 승리를 염원하는 간절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 30초를 남기고서야 등장하는 기타 솔로가 용의 눈동자를 더한다. 생사를 가를 급박한 런어웨이 무비에 어울릴만하지 않은가? 브라이언 메이가 관중과 함께 부르기 위해 만든 이 곡은 팝의 영역을 뛰어넘어 스포츠 응원가, 게임 CF,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었다.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리메이크, 샘플링, 리믹스했을 만큼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을 진저.


Queen - We Will Rock You(1977년, 330위)


  타르다호스를 지나는 길이었다. 작은 둔덕 위에 지어진 조그마한 성당 앞 계단에서 한 순례객이 바나나로 허기를 달랜다. 늦은 아침일까? 이른 브런치일까? 무엇이든 그에게도 나처럼 걸인의 찬이 아니었기를, 오늘도 숙소에 별 일없이 도착하기를 빌었다. 2km를 더 걸어 라베 데 라스 칼사다스에 들어섰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산타 마리나 성당을 지나쳤다. 마을 외곽을 빠져나올 즈음 그라피티 몇 점이 눈에 확 들어온다. 기도하는 이슬람 교인과 기모노를 입은 여인 사이에 순례객이 두 손들어 찬미하는 벽화를 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앞에 작은 수도원이 있다. 1930년 이 수도원 소속의 카타리나 수녀님에게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신 기념으로 순례자들에게 축복 목걸이를 나눠주는 걸로 유명하다. 노 수녀님이 기도를 해주며 작은 축복의 목걸이를 주셨다. 조촐한 기념품이지만 정성을 다한 그 마음이 고마워 소액이나마 기부했다. 변변치 않은 성화 몇 점과 아담한 제단이 전부인 단출한 수도원 예배당에서 산타 마리아 대성당 보다 더 큰 위로를 받았다. 뜻 모를 성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 누나가 감사 기도를 드렸다.


걸인의 찬을 면한 이름 모를 순례자, 그라피티로 멋드러지게 채색된 마을 끝자락에 작은 수도원에서 축복의 목걸이를 걸어주며 고행하는 나그네를 위로해준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메세타 평원이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평원을 가득 메운 끝 모를 밀밭과 청량한 하늘을 온통 하얗게 수놓은 뭉게구름 사이를 가로지르는 까미노 위에 듬성듬성 점 찍힌 순례자. 이 거대한 구도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내가 걸어가는 게 분명한데 정작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 자리 걸음을 하는 내게 주위 풍광이 천천히 다가와 이내 물러간다는 착각이 든다. 내게서 메세타가 종종걸음으로 지나치기를 한 시간여 되었을 무렵 저 멀리 지평선이 구름에 맞닿았다. 낯익지 않은 풍경에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이 가득했다. 남은 거리로 보면 목적지 근처일 텐데.      


  기대가 컸던 만큼 처음 접한 메세타 초원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건조한 초지대와 포도밭이 많았던 나바라 초원이 스케일 업된 버전이랄까? 길은 외줄기 서쪽 오백 리 구름에 메세타 가듯 걷는 나그네에게 지루할 게 무엇이 있으랴! 심심하다 싶으면 맞이하는 둥그런 나무 하나, 불타는 석양처럼 빨갛게 물든 양귀비꽃에게서 평화와 위안을 얻는다. R&B 트리오인 Earth, Wind and Fire가 부른  That’s the Way of the World(329위) 역시 듣는 이의 심신을 위로해 준다. 동명의 영화에서 이들은 카펜터스와 같은 백인들만 주목한 나머지 실력 있는 흑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당시의 음반산업을 비판했다. 정열에 가득 찬 마음이야말로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지만 마음을 평화롭게 해 가슴과 영혼을 진정시켜야 냉정한 세상에서 늙지 않는 젊은 마인드를 간직할 수 있다고 노래한다. 과거의 슬픔에 집착한 나머지 영감이 끊어져 싸늘한 냉소만 흐르는 청춘은 결코 청춘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지평선과 구름이 맞닿는 메세타 고원. 그 위를 듬성듬성 점찍은 순례하는 나그네의 짐 속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고즈넉하고 때론 황량한 메세타를 걷는 기분을 형용할 수 없다


  오래전 일이다. 재직 중인 회사의 대표이사께서 임기를 다해 물러나셨다. 온화한 성품에 역량도 뛰어난 덕장 스타일이라 본부 직원 모두가 존경해 사석에서는 대장님이라 친근하게 불렀다. 퇴임의 변을 대신해 손수 장문의 글을 적어 일일이 나눠주셨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란 시다. 다른 부서에 인사하러 가시자 마자 속독으로 읽었음에도 내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가끔씩 목표를 잃어 나태해지거나 생이 무료하다 여겨질 때마다 이 시를 읽으며 재충전을 하곤 했다. 


  짧게나마 ‘청춘’을 소개해본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하니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한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한다. 영감이 끊기고 정신이 냉소의 눈에 덮여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듯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여든이어도 늘 푸른 청춘이라는 내용이다. 한창 청춘일 때 받았던 이 시를 오십 중반에 다시 읽으며 과연 내 안에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충만한지 되묻게 된다. 욕심을 거두었다는 미명하에 옹골찬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진 않았는지 돌이켜 본다. 혹시라도 그러했다면 메세타를 걷는 고행을 통해 메마른 심정(心)에 청춘이란 물꼬를 다시 트고 싶다.           


Earth, Wind, and Fire - That's The Way of The World(1975년, 329위)


  한참 전에 봤던 지평선에 다 달았다. 메세타 초원을 구릉 삼아 저 아래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가 있다. 초원을 굽이치는 흙길의 여운을 만끽하며 서두르지 않고 마을로 들어갔다. 아침의 부지런함을 제대로 보상받았다. 예약한 알베르게에 첫 번째로 도착한 영예(?)를 얻었다. 순례 이후 처음 맛보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개인 정비를 한 다음에 적당한 바에 들어가 점심을 청했다. 햇빛이 제법 강했지만 다들 선선한 바람을 맞을 겸 야외에서 식사하는 분위기였다. 우리 남매 또한 굳이 예외를 자청할 이유가 없었다. 빈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 대화가 재미있다. 월가에서 왔음직한 남성 순레자가 요즘이야말로 PEF(경영참여형 사모펀드)와 대체 투자의 전성기라며 자신의 성과를 자랑삼아 얘기한다. 동석한 동양계 처자가 학교에서 대체 투자를 수강했다며 격하게 동의한다. 언제 올지 모를 화려한 버블의 낙일이 걱정되면서도 확신에 찬 젊음을 부러워하며 조용히 식사에 전념했다. 간단한 소개를 하고 나서 굳이 대화에 끼지 않는 내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왔다는 중국계 처자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오늘은 부르고스에서 왔다고 답했더니 거기서부터 순례를 시작했냐고 되묻는다. 생장에서 출발했다는 말에 깜짝 놀란다. 얼굴이 하나도 타지 않아 믿기지 않는다며 자기는 거지같이 탔다고 하소연한다. 피부가 금방 타는 체질이라 자전거 탈 때 쓰는 마스크와 팔토시를 써서 그랬다고 일러줬다. 챙기기 귀찮았는데 그래도 가져온 보람이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메세타 고원을 구릉삼은 분지 아래 위치한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오늘 묵을 엘 알파르 알베르게와 꽃 화분이 아름드리 걸려있는 예쁜 집. 오늘도 우리를 맞이해주는 길냥이


  엘 알파르(El Alfar) 알베르게는 그간 머문 숙소 중에서 가장 평온함을 주는 곳이다. 소박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아 정감이 간다. 그늘아래 썬 베드에 누워 아담한 후원 잔디밭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맛갈란 상념에 잠겼다. 초반 발가락 염증으로 고생했던 누나는 컨디션을 점차 회복해 이십여 km를 걷기에 무리 없다. 언제나 동생 덕분에 이 좋은 길을 고민 하나 없이 즐길 수 있다며 고마워한다. 남매지간이라 해도 생활 패턴이나 순례하는 스타일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에 들지 않을 상황이 있었을 텐데도 내색치 않고 내 의견에 동조해 주는 누나의 티 나지 않는 배려 덕분에 지금까지 순탄하게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동생을 위해 좋은 사랑을 베풀어 준 것이다. 몸 상태가 좋지 못해 열병으로 고생할 때 좋은 사랑으로 고칠 수 있다는 The Young Rascals의 ‘Good Lovin’(325위)’에서 누나의 내리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에 호주에서 왔다는 할머니가 짐을 풀고 있었다. 이름이 웬디라 했다. 막 도착해 피곤할 텐데 웃음이 환하신 모습에 내 마음도 푸근해졌다. 걷는 일정이 비슷해서인지 이후로도 순례 막바지까지 자주 웬디와 마주칠 수 있었다. 누나와 웬디와 만날 때마다 서로 반겨해서 보기에도 좋았다. 열정과 모험심에 가득 찬 순례자 웬디. 그녀야말로 젊음의 절정을 이제껏 간직한 청춘일 것이다. 


일찍 도착한 덕분에 한가로운 오후를 맛보았다. 공립 알베르게에 한인 순례자들이 다과를 곁들여 한담을 하고 있다. 산티아고까지 순례하는 검둥이도 무사히 완주하길. 갈비찜 닮은 스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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