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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Sep 27. 2024

[20 일차] 여기서 네 할 일을 하라

 Rocket Man - 로캣맨에게 필요했던 의지와 결단

2023년 5월 30일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 - 만시야 델 라스 물라스 26.3km


  순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기분이 들어 한층 더 심기일전했다. 내일이면 사자의 도시 레온에 도착한다. 이제 메세타 구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알려진 것과 달리 지루하지 않았던 길. 고지대의 대평원과 차분히 작별하자는 마음에 일찍 출발했다. 오전 다섯 시 사십 분에 일어나 간단히 세면을 한 후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헤드랜턴을 적색모드로 켜 베드 주위로 빠진 물건이 있는지 조심스레 살폈다.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 침낭을 둘둘 말아 배낭 위에 얹어 조용히 방을 나왔다. 휴게실로 가는 문이 잠겨 있어 복도에서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유의하며 짐을 정리했다. 곤히 잠든 투숙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새벽에 먼저 떠나는 순례자들이 알베르게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 중 하나다. 동키로 보낼 짐은 아직 잠겨있는 현관 앞에 세워뒀다. 떠나기 전 하룻밤 편히 보낸 라 페랄라 전경을 한껏 눈에 담아 뒀다. 뜨내기손님을 진객으로 환대해 준 주인 할머니께 고마웠다는 가슴속 인사와 함께.  


 아직 여섯 시가 되기 직전이라 사방이 제법 어두웠다. 고요함이 잔뜩 물든 거리 위에 자박대는 안단테 리듬의 발자국이 정적을 깨웠다. 길 따라 밤새 덩그렇게 서있던 가로등이 순례자에게 길을 밝혀 주며 잘 가라 인사했다. 푸르스름한 구름이 낀 새벽,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걷는 기분은 언제 맛봐도 상큼하다. 부지런한 이들은 이 맛에 아침 잠의 유혹을 뿌리치나 보다. 마을을 빠져나와 가도에 들어섰다. 아침 일찍부터 전조등을 켠 빨간색 SUV가 빠르게 지나쳤다. 외길이지만 어딜 그리 바삐 가는지 궁금해 뒤돌아봤다. 구름이 무성한 하늘 아래로 땅끝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동트기 전 짙은 주황색을 머금은 아침노을이 상서롭게 다가왔다. 여명이 시작되기 직전의 신비로운 새벽녘 분위기가 당조의 유명 시인 온정균의 '상산조행(商山早行)'의 시구와 잘 어울렸다.


'새벽 일찍 일어나 말방울 울리며 출발하니

나그네 길은 고향 생각에 슬퍼지네

닭 우는 소리에 지는 달은 초막 위에 걸리고

서리 내린 판자다리 위로 발자취 남아 있네'


  이른 아침에는 딱히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떠올리려 애쓰지 않는다. 인위적인 단상이나 소고에 연연함으로써 고즈넉이 저물어가는 새벽의 흐름을 거스르고 싶지 않다. 서광이 던져주는 그때그때의 감상과 심정에 충실하다 보면 잠시라도 물아일체로 자연에 동화되는 평정심을 음미할 수 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하나씩 차분하게 마주한다. 지나왔던 옛 일은 곱씹으며 마음속 깊이 담아둔 후회는 되새긴다. 순례를 하며 얻은 짧은 성찰과 각오는 잊지 않으려 다짐한다. 하루 중 아주 짧게 허락된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준비해 온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500대 명곡 감상도 피한다. 나중에 얼마든지 들을 시간은 충분하니까.


  구름이 꽤나 성난 것 같다. 해가 뜬 지 한참 지났는데 여전히 잔뜩 찌푸려 있다. 구름에 가려 아직 햇볕이 제대로 달궈지지 않아 빈 속을 데울 음식이 당겼다. 마침 오늘 만나는 첫 번째 마을인 엘 부르고 라네로에 라면 파는 식당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현지인이 맛있게 끓여준다는 리뷰가 많아 들리려던 참이었다. 산티아고 프랑스 루트에서 라면을 제공하는 식당이 내가 알기로 세 군데 있다. 지난번 카스트로헤리스에서 찾았던 오리온 알베르게와 이 마을의 펜션 레스토란테, 그리고 닷새 뒤에 도착할 라바날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 필라다. 이곳은 라면을 스파게티 그릇에 담아내는 게 특징이다. 필라에서는 김치를 제공한다. 현지인이 끓여주는 터라 맛에 대한 기대보다 라면을 먹는 자체에 의의를 두려 했다.


서광을 향해 말방울 울리듯 질주하는 빨간 SUV, 이제 331km 남았다는 이정표, 어지간한 한국 식당보다 맛있게 끓여낸 신라면(물이 적어 약간 짜긴 했다)


  야외 테이블은 MTB 순례자들로 이미 만석이었다. 간판 주위로 자전거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여기는 아니겠지 하며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분필로 적은 입간판 아래에 ‘신라면 + 햇반’이라는 반가운 한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옳다구나. 여기로구나' 아침 먹고 가자며 누나를 가게 안으로 끌었다. 아침에 라면 괜찮지라는 물음에 누나도 반색했다. 그런데 자리가 없다.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망설이던 차였다. 어제 식품점 앞에서 만난 한국 젊은 여성 순례자가 자기는 다 먹었다며 합석을 권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이제 막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주문한 다음에 자리에 앉아 잠시 한담을 나누었다.


  사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십여 일 전이었다. 에스테야 아니면 로스 아르코스로 가던 길로 기억된다. 그녀를 지나치며 인사했는데 냉랭한 답변에 말을 섞기 싫은 거라 넘겨짚었다. 장년의 한국 순례객과 어설프게 말을 나눴다가 예의 없는 하대와 귀찮은 질문에 엮이는 것을 질색하는 한국인 청년들이 꽤 많다는 얘기를 많이 전해 들었다.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 그 이후로 길 위에서 서너 번 더 만났는데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제 식료품 앞에서 다시 만났다. 시스타로 문 닫은 가게가 5시 오픈이라 다들 식품점 주위에 서성이던 참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그녀가 가게 문이 닫힌 줄 알고 우리에게 여기 문 닫았냐고 물어보는 게 아닌가. 아직 오픈 전이니 그늘에서 같이 기다리자 했다. 굳은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게 기억되어 말을 더 잇기 어려웠다. 가게에서 볼 일을 마친 다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누나가 한 마디 했다. '급하긴 급했나 봐. 한국어가 바로 튀어나오는 거 보니.'


  그녀에게 처음 만났을 당시 상황을 얘기했다. 얼굴이 어두워 보여 그 이후에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고. 그녀는 그 무렵 물집이 잡혀 걷는 게 너무 힘들어 경황이 없을 때라 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아직도 썩 좋은 상태가 아니라면서. 한국에서 걷는 연습을 충분히 하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 초반에는 괜히 왔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는 고민이 컸다는 말과 함께. 한 걸음 내지르는 자체가 이미 고통이었을 텐데 생면부지의 사람이 건네는 인사에 신경 쓸 여력이 얼마나 있었을까? 적응하기 어려웠던 저간의 사정을 몰라 크게 오해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했던 말처럼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가 보다. 그러고 보니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던 그때 그녀 행색이 어딘가 지쳐 보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리를 살짝 절뚝이던 거 같기도 했고. 내 마음대로 섣불리 판단했던 확증편향이 미안했다. 진심을 담아 혼자 걷는 일정이니 무리하지 말라 조언했다. 컨디션에 맞춰 걸어도 충분히 완주할 수 있을 거라 격려했다. 라면 덕분에 오해를 풀 수 있어 다행이었다. 라면 맛도 오리온 알베르게보다 훨씬 나았다.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그녀였어도 의지할 지인 하나 없는 낯선 환경과 삼십일 이상을 더 걸어야 하는 일정에 맞이한 최악의 컨디션이라면 과연 산티아고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 매우 의문스러웠을 것이다. 나 역시 미래를 회의적으로 그렸던 시절이 있었다. 어제가 새로운 시작이자 순례의 반환점이었듯 대학원 졸업은 내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이었다. 대학원 이 학기 말이었다. 재무관리 전공에 신임 교수 충원이 있었다. 임용 공고에 응한 후보자들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었다. 경영학과 교수님들을 대상으로 한 공개 PT에 희망하는 석박사 과정 학생의 참관이 허용되었다. 후보 교수 중에서 K 교수와 C교수가 발군이었다. 두 후보자 중 어느 분이 임용되어도 자격이 충분하다 여겼다. 두 분 모두 PT를 진행하는 아우라가 보통이 아니었다. K 교수는 기 발표된 연구실적에서 탁월했다. C 교수는 등재된 연구 건수가 비록 K 교수보다 적었지만 메이저급에 해당하는 저널에 에디팅 중인 톱픽이 있었다. 만일  아티클이 최종 게재된다면 연구 역량의 잠재력을 인정받을만했다. 내심 C 교수가 되길 바랐다. K 교수의 실증 연구도 흥미로왔지만 C 교수가 PT 중에 소개했던 마르코프 체인을 활용한 주가결정모형이 참신했기 때문이다. 이 학기에 상태선호이론과 동태적 자산가격 결정이론, CAPM과 OPM 등을 증명하는 수리 재무이론 수업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벽 하나가 버겁던 차였다. 나를 한 단계 레벨업 시켜줄 깨달음이 올 듯 말 듯 머릿속이 간질거려 속이 탔다. 수리이론 분야에서 정평이 난 시카고 대학 출신의 Ph.D인 C 교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다. 최종적으로 K 교수가 임용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C 교수의 PT는 내게 절망을 주었다. ‘내가 과연 수리 재무이론의 끝을 볼 수 있을까?’ 노력도 해보지 않고 회의가 앞섰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나 구십 년대 초중반까지 미국 대학 교수는 크게 연구 중심 교수와 강의 위주 교수로 대별되었다. 내가 학계에 남는다면 후학을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컸다. 티칭 교수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독창적인 계량모델을 만들 역량이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다. 기념비적인 대작을 남길 자신은 더욱 없었다. 투자론에서 저 PER(주가수익비율, Price to Earning Ratio) 주식의 이례적인 초과수익 현상을 Sanjoy Basu 교수가 처음 입증했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연구실 벽면 가득 채운 주가 수익률 데이터를 눈으로 훑는 것만으로 PER(x축)와 Return(y축)의 점도표를 가늠해 머릿속에서 연구결과를 짐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흉내 내기 어려운 일이다. C 교수도 그런 범주의 인물이라 여겼다. 교육 여건을 제대로 갖춘, 그것도 지방이 아닌 서울 소재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하지만 용케 바늘귀에 통과한 낙타가 되었다 쳐도 스스로 만족할 의미 있는 연구를 수행하지 못할 바에야 더 이상 공부할 이유가 없다 판단했다. 심사숙고한 끝에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에 진학하지 않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것이다. 그럼에도 이왕 교단에 서면 모교에 남고 싶다는 맹랑한 욕심과 학업에 대한 미련의 끈을 아예 놓기도 싫었다. 모교에 임용되기 위해선 아무래도 유학이 필수다. 해서 취업 후 몇 년간 유학자금을 마련해 훗날을 도모하자는 정도의 두리뭉실한 계획만 가졌다. 애석하게도 취업한 지 둘째 해인 1997년 12월, 우리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환율이 급등했다. 유학 자금이 거의 두 배 이상 늘었다. 결국 유학에 대한 미련을 쉽게 저버렸다. 전업 직장인의 삶을 굳히게 된 연유였다.


어쩌면 누구나 이 길의 시작과 끝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길이 불확실해 보이는 것은 티미한 행동의 결단 탓은 아닐까? 가다 보면 언젠가 구름이 걷히고 그 길 끝에 설 것인데


  앞날을 알 수 없었던 스무아홉 살 당시의 나는 과연 학업을 잇는 것에 얼마나 진지했던가? 천재와 수재의 재능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기예라 해도 불굴의 노력으로 정녕 그 격차를 극복하려는 의지에 진심이었을까? 아니 극복 여부의 불확실성을 떠나 석사과정에서 맛보았던 공부 그 자체의 희열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절실함이 있기는 했던 것일까? 지금 돌이켜 보면 아니라 여겨진다. 의지는 나약했고 계획은 흐릿했으며 공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던 것 같다. 스무 살의 내가 그러했듯이 삶과 목표에 대해 진정성이 부족했다. 내 앞에 놓여 있을 미지의 길을 고민만 했지 그 길에 과감히 뛰어들 엄두를 내지 않았다. 김 남주 시인은 '길 2'라는 시에서 우리에게 놓인 길을 회피하지 말고 여기서 네 할 일을 하라고 역설했다.


'길은 내 앞에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길의 시작과 끝을

그 역사를 나는 알고 있다.

그 길 어디메쯤 가면

---- 중략 ----

이 길 어디메쯤 가면

---- 중략 ----

여기가 너의 장소 너의 시간이다. 여기서 네 할 일을 하라

행동의 결단을 요구하는 역사의 목소리가 있다.

그래 가자 아니 가고 내가 누구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랴.

가고 또 가면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되느니

가자 이 길을 다시는 제 아니 가고 길만 멀다 하지 말자

가자 이 길을 다시는 제 아니 가고 길만 험타 하지 말자'


  오늘 산티아고에 서 있는 그녀와 젊었던 내 청춘에 필요한 것은 회의와 불신, 두려움에서 벗어난 의지와 결단이다. 자신 앞에 놓인 그 길을 제 아니 가고 길만 멀고 험하다 탓해서는 안된다.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언제 결단을 내린 바로 이 순간이다. 젊었던 세만큼을 한 번 더 산 오십 중반에 이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내 앞에는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미래가 불투명한 길이 놓여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내 할 일을 미루지 말고 결단해야 한다. 그래야 불확실한 삶의 여정 속에서 로켓맨이 느꼈을 인생의 고독과 고단한 삶의 중압감, 혼란스러운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Elton John은 'Rocket man(242위)'에서 가족이 있는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향하는 우주 비행사가 광활한 우주에서 느꼈을 상실감과 외로움, 인간적 고뇌를 노래했다.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이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표면적인 우주 탐험의 이야기로 은유한, 길을 잃어 하염없이 방황하는 청춘의 표상이 아니었는지.    


Elton John - Rocket Man(1972년, 242위)


  미국의 저명한 코미디언 스티븐 라이트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다 가진다면 그것들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명언을 남겼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는 현실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것이다. 정말 그다. 동키를 보내 무게 부담이 크게 줄었음에도 동키를 처음 보낸 날을 빼고는 누나 컨디션이 평소보다 떨어지는 모양이다. 왼쪽 발목과 족삼리에 경미한 통증이 일어 걸음이 불편하다고 하신다. 적절히 페이스를 조절하여 오후 한 시 즈음에 숙소에 도착했다. 주인 내외가 반갑게 맞이해 줘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점심으로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구글 검색을 했다. 햄버거와 샌드위치가 당겨 평점이 높은 Casa Tono에 갔다. 그런데 점심은 메뉴델디아 풀코스만 가능하다는 게 아닌가! 가격은 인당 십삼 유로라 비싼 건 아니지만 라면을 거하게 먹었던 터라 메뉴델디아는 양이 많아 시키기가 부담스러웠다.  배가 고프지 않으니 풀코스 하나와 단품 메뉴 하나라도 가능한지 부탁했는데 이마저도 안된다고 한다. 남겨도 좋으니 그냥 메뉴델디아 2인분을 시킬까 하는 미련을 잠시 하다가 썩 내키지 않아 결국 가게를 나왔다. 숙소 쪽으로 내려오면서 주변에 문 연 바를 다시 찾았다. 나름 평점이 높은 '라 라구나'에 들어갔다. 가게가 한산했다. 손님은 우리가 유일했다. 무료한 표정의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문어 요리인 뽈뽀와 스페인 전통 스튜인 카요스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왔다. 뽈뽀는 먹음직스러웠다. 그런데 카요스는 아니었다. 우리로 치면 소내장탕과 비슷하게 기름진 데다 향과 맛 입맛에 맞지 않았다.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냐는 질문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장이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했다. 구글 번역기를 쓸까 하던 찰나, 누나가 치킨으로 바꿔주려나보다 일러줬다. 누나가 용케 스페인어를 알아 들었네!  뭔가 미심쩍었지만 '아. 순례 중인 우리를 위해 친절을 베푸시는구나' 싶었다.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흔쾌히 그러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메뉴를 바꿔준 게 고마웠다. 배가 부른 와중에 치킨을 남기면 실례로 생각해 간신히 다 먹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제안하길래 당연한 듯 고맙다고 인사했다. 흡족한 식사를 마친 후에 계산대에 섰다. 사십삼 유로가 나왔다. 예상외의 요금에 당황해 자초지종을 물었다. 카요스와 치킨에 아이스크림, 제공된 생수까지 함께 얹어 계산한 것은 물론이요 뽈뽀도 메뉴에 적힌 가격보다 비싸게 받았다. 단품은 더 받는다는 설명과 함께. 넉넉한 몸매만큼 후덕한 인상이라 별생각 없이 제안대로 따랐는데 결과적으로는 우리 남매가 어리숙한 뜨내기손님이었던 셈이었다. 여우를 피해 제대로 호랑이를 만났다.


오늘 하루를 신세질 알베르게 가이아, 의도치 않게 배불리 먹었던 라구나에서의 점심, 어느새 다 쓴 치약(A치과 사은품이다)


  그러나 냉정하게는 그리 어이없을 일이 아니었다. 순례자를 배려해 잘못시킨 메뉴를 대가 없이 바꿔준다는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이다. 풀코스가 아니었으니 후식도 당연히 추가 주문이라 여겼어야 마땅했다. 어느 틈엔가 나도 모르게 각인된 까미노에 선 순례자에 대한 배려라는 명제는 기실 세상물정 모르는 내 착각에 불과했다. 오리온 알베르게 한국인 여사장이나 라구나 주인장에게 우리는 수많은 손님 중 하나일 뿐이다. 그중 누구를 가객으로 맞을지는 전적으로 그들 마음에 달린 사안이다. 나를 진객으로 대접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책할 근거가 하나 없다. 그럼에도 주민들이 순례자들을 가빈으로 대해줄 거라는 과도한 기대를 당연시했던 것이다. 잘못된 내 기대가 어긋나자 불현듯 The Drifters가 부른 'Money honey(252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돈이 필요해! 나랑 잘 지내고 싶으면’이라는. 라구나 여사장은 ‘내 친절한 서비스를 원해? 그러면 내게 이문을 남겨줘’라는 심정이었겠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은 생존에 직결된 수단이다.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 단지 돈을 추구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비난해서는 안된다. 이기적 유전자의 집합체인 인간이 유전자를 성공적으로 퍼트리려면 결코 돈을 도외시할 수 없다. 특히 여유가 부족할수록 돈만큼 절실한 게 없을 것이다. 돈에 대해 서로의 견해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범주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와 이를 초과하는 부분에 대한 태도이다. 사람마다 원하는 부의 수준이 다를뿐더러 돈에 대한 철학이 다르다. 나는 돈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중산층이 원하는 정도의 노후 자금이면 족하다. 굳이 더 벌려 애쓰지 말고 아주 풍족하지 않아도 안분지족 하며 여생을 즐기고 싶다. 특히 누구와 잘 지내기 위해 돈을 조건으로 하거나, 이것이 매개가 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 관계를 포기하겠다는 입장이다. 물론 도움이 간절할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무조건적이고 자발적인 물질적 도움을 응당 행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The Drifters - Money Honey(1953년, 252위)


  아침에 이어 점심까지 배부르게 먹은 터라 저녁은 간단하게 넘기자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또띠야 하나면 족해 보였다. 침대에서 졸다 깨다 하다가 남들보다 느긋하게 주방 휴게실로 갔다. 순례객들이 테이블에 앉아 서로 준비한 저녁거리를 한창 나눠 먹는 중이었다. 빈자리를 비벼 앉기 주저하던 차에 아르헨티나에서 온 부자와 스웨덴 여성이 앉으라며 선뜻 자리를 비켜 준다. 어제 페랄라에서 강의를 잘 들었다는 농담과 함께. 안면이 익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이들도 자기들은 충분히 즐겼으니 토마토 빈 수프와 샐러드를 양껏 먹으라 했다. 예상 못한 환대에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하며 우리가 준비한 또띠야와 과일을 셰어 하자고 했다. 순례객들끼리 저마다 준비해 꺼내 놓은 단출한 먹거리였지만 모아 놓으니 제법 풍성했다. 낯선 사이임에도 진한 교감을 나누며 힘든 길에서 서로를 가빈으로 융숭히 대접한 정겨운 만찬이 흥겨웠다.


까미노에서 만나는 순례자와 주민들은 각양각색, 천차만별인데 언제나 길냥이는 한결 같이 사랑스럽다. 그런데 과자 먹으면 안된다. 몸에 안좋단다.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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