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n on Me - 힘들지! 내게 기대
2023년 6월 2일 레온 - 산 마르틴 델 까미노 24.6 km
연박으로 재충전한 덕분에 일찌감치 5시 반에 일어났다. 포르투갈 연인들이 깰까 그림자 물러나듯 소리 없이 빠져 나와 지하 1층 공용 주방으로 내려갔다. 오픈 전이라 식당과 복도에 조명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지만 공용 주방은 열려 있었다. 불을 켜 짜파게티를 끓이고 계란을 삶았다. 어제 마트에서 산 과일과 음료수를 꺼내니 진수성찬이다. 재빨리 유리 테이블 아래를 살폈다. 다행히 거한 상차림에 다리가 휘어지진 않았다.
모처럼 아침에 포식한 배를 룰룰랄라 두드리며 식당 앞 벤치로 가 떠날 채비를 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끈을 졸라맨 후 무심코 옆 의자에 손을 얹었다. 무언가 두툼한 게 만져졌다. 손으로 집어 올리니 지갑이다. 누나 지갑이냐 물었는데 아니란다. 핸드폰 조명을 켜 지갑을 펼쳤다. 캐나다 신분증이 보였다. 빳빳한 백 유로 지폐 수십 장이 빼곡히 수납돼 있다. 복도에 불이 꺼진 걸로 봐서 누군가 새벽에 분실했을 개연성은 희박하다. 어젯밤 식당 앞에서 노닐다가 흘렸을 공산이 크다. 1층 데스크로 갔다. 리셉션에 아무도 없었다.
지갑을 잃은 순례자가 분실한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애가 탈까? 신분증에 여비와 카드까지 몽땅 잃어버리면 순례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조차 힘겨울 게 틀림없다. 어떻게든 주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출발을 하염없이 미루는 것도 부담돼 답답했다. 애가 바짝 타는 순간 식당 안쪽 주방에 불이 켜졌다. 아침을 준비하는 스태프라 추측했다. 닫힌 유리문을 두드리며 안쪽을 향해 문 좀 열어 보라 외쳤다. 여성 스태프 한 분이 나왔다. 직원이냐 물으니 청소 담당이라 신분을 밝혔다. 저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8시에 출근하는 데스크 직원에게 전달할 테니 걱정말고 안심하란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몇 호실에 묵었냐 묻길래 112호실에 투숙한 코리안이라 일러줬다. 다시 한번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기고 성 프란치스코 알베르게를 나섰다. 지나는 길에 레온 대성당을 들러 부디 주인이 되찾기를 기원드리고 나서 하루를 열었다.
레온이 크긴 컸다. 한 시간 넘게 걸어도 시계市界를 벗어나지 못했다. 주택가를 벗어난 한산한 아스팔트 도로에 들어섰다. 순례객 둘이 자동차 정비소 앞에 마련된 도네이션 바를 막 나서는게 보였다. 마침 8시 직전이라 알베르게에 확인 전화를 할 겸 쉬기로 했다. 커피와 핫초코 믹스 두 잔에 2 유로 50 센트. 어디 출신인지 세계 지도에 핀을 마크해 보라는 주인장 권유에 서울을 찾으니 이미 표시돼 있다. 잔돈이 필요할 거 같아 20 유로를 냈다. 주인장에게 거스름돈을 받아 맞겠지 하며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8시가 넘기 무섭게 알베르게에 전화해 데스크 직원에게 용건을 말했다. 담당 직원이 업된 목소리로 아침나절에 신원을 확인해 잘 전달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도 그라시아스를 연발했다. 걸어오는 내내 마음에 걸렸는데 시름을 놓게 되었다. 한껏 기분이 고양되어 신나게 걸었다.
개운하게 길을 나섰다. 라 비르헨 델 까미노La Virgen del Camino에 들어섰다. 문을 연 바가 많았지만 방금 전에 쉰 터라 직진 모드를 이어갔다. 그 옛날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의 목을 축여줬을 아기자기한 연못과 낡은 종탑 위의 황새 둥지 그리고 예쁘장한 조형물에게 잘 있으라 가볍게 인사하며 산 마르틴 델 까미노로 향했다. 파란 도화지에 새하얀 물감이 점점이 뿌려진 화창한 날, 순례자의 걸음에 거칠 게 없었다. 그렇게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Villadan gos del Páramo를 2km 가량 남겨둔 호텔 아베니다 IIIHotel Avenida III을 지나갈 즈음이었다.
중간에 점심을 먹어도 넉넉잡고아 2시간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얼핏 왼편 길섶에 길냥이가 보이는 거 같아 반갑게 다가섰다. 헌데 녀석은 미동도 없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강직된 채로 굳어 있었다. 아직 벌레가 들끓지 않은 걸로 봐서는 오래 전에 생을 다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애잔했다. 이대로 가기엔 너무 찜찜했다. 묻어주고 싶은데 구덩이를 팔 도구가 없다. 앞에 있는 호텔 근처로 무작정 뛰어갔다. 주위를 둘러봐도 레스토랑만 있을 뿐 삽을 구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미안하다. 냥이야. 잘 보내주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넋이라도 따뜻한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지내라며 녀석의 명복을 빌었다. 혹시라도 다시 태어나면 꼭 사람으로 환생해 극락에 가기를 바라며.
하쿠와 타타를 입양하기 전에는 길냥이들에 무관심했다. 아이들이 우리와 가까운 도처에서 힘겹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 길냥이는 내가 그랬듯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삶을 근근이 살다가 그들의 별로 돌아간다. 하쿠, 타타와 한 가족이 된 후 아내의 권유로 고양이 집사인 김바다 작가가 지은 '어떤 삶들(2021년)'을 읽었다. 이 책엔 한결같이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천사 같은 집사를 만나 잠시 행복한 삶을 누리고선 주위 사람들의 눈물과 축복 속에 생을 거둔 여덟 마리 길냥이들의 삶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태평이의 사연이 눈시울을 붉게 했다. 태평이는 김사라 수녀가 봉사하는 오래된 급식소를 드나들던 길냥이다. 어미로부터 갓 독립하여 급식소 근처를 맴돌다 수녀님과 교감을 나누며 친해졌다. 급식소가 이전하게 되자 수녀님은 주변 지인들에게 태평이를 비롯한 길냥이 십여 마리를 부탁했다. 아이들이 눈에 밟힌 수녀님은 주일마다 예전 급식소를 찾아 아이들을 챙겼다. 어느 늦가을에 고양이 집에서 탈진한 채로 다 죽어가는 태평이를 발견했다. 치명적인 복막염이 심해 치료가 불가하다는 진단이었다. 할 수 없이 수녀원에 머물게 된 태평이는 수녀님과 봉사자들의 간절한 정성아래 한치도 움직이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몸으로 병마와 사투를 벌였다.
미동조차 버거운 태평이는 자신을 성심껏 돌봐주는 이들에게 표정과 소리만으로 깊은 관심과 고마움을 표했다. 6개월 동안 조금씩 기력을 찾는 모습에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MRI 검사 결과 바이러스로 인해 뇌에 물이 차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간 태평이가 차도를 보인 게 수녀님과 봉사자의 치성에 조금이라도 답하려 애쓴 결과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여느 날처럼 인사 잘하고 밥도 맛있게 먹으며 수녀님과 눈을 맞추던 태평이에게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갑자기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경련이 찾아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는 중 혼수상태에 빠져 고양이 별로 돌아갔다. 태평이가 운명을 다하는 장면에서 가슴 찢어지게 시렸다. 북풍한설의 거센 바람에 동창이 나 얼음 배긴 것처럼 저며왔다. 후원자들은 태평이가 수녀님에게 위로를 많이 받았을 거라 했다. 김사라 수녀는 오히려 태평이에게서 더 큰 사랑을 찾았다고 했다.
수녀님에게 사랑을 준 태평이처럼 녀석은 사랑을 나눠줄 이가 있었을까? 태평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할 수녀님이 곁에 있었는데 녀석이 아픈 숨을 거둘 때 그 옆을 지켜준 누군가 있었을까? 찰나의 명현이 찾아왔을 때 녀석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자신을 낳아준 어미? 고된 삶에 조금이라도 기댈 수 있던 친구 냥이? 아니면 돌봐주던 사람? 그도 아니면 따뜻한 은신처에 배불리 먹던 행복한 기억? 무엇이 되었든 홀로 쓸쓸히 죽음의 공포에 맞서지 않았더라면 좋겠다.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Bill Withers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동네 사람들이 이웃사촌이 되어 서로 도와주는 끈끈한 정을 노래했다. 영혼을 울리는 호소력 짙은 담백한 목소리에 진솔한 가사가 녀석의 주검에 망연자실하던 내 심금을 울렸다. 어쩌면 녀석은 고별에 가서도 제 육신을 묻어달라 내게 기댔을지 모르는데. 태평이와 녀석에게 'Lean on me(205위)'를 들려주고 싶다. ‘네가 힘들 땐 나에게 기대. 내가 네 친구가 되어 네가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줄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언제고 죽음을 맞이한다. 불멸의 존재가 아닌 한 죽음은 필연이다. 피할 수 없다면 죽음을 직시해 보는 건 어떠한가? 프랑스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는 그의 저서 '죽음의 역사(2016년)'에서 네 가지의 죽음을 얘기했다.
먼저 길들여진 죽음이다. 역사 시대 이래로 중세 초반까지 인간은 죽음에 친숙했다. 나이 들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운명과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생을 마감하는 침상에서 가족과 친지, 이웃사촌에 둘러싸여 생전의 기억을 나누며 이별을 고했다. 죽음에 친밀하여 아이들도 고인의 임종을 함께 맞이했다.
중세 후기에는 자신의 죽음을 중시했다. 친숙하게 길들여진 죽음에 개인적인 의미가 더해졌다. 이 시기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은 이전과 다르다. 망자를 추모하려는 이들이 침상 주위에서 임종을 앞둔 이를 내려다본다. 그런데 망자는 이들과 눈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 곁으로 내려온 천사를 바라본다. 그러고 나서 숨을 거두기 전에 남겨진 이들과 공동체에게 개인적인 바람을 유언한다. 친밀한 죽음과 더불어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고자 한 죽음이다.
17세기부터 타인의 죽음이 보편화되었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내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해 내가 아닌 타인의 죽음을 낭만적으로 치장하거나 찬양한다. 예전에는 고인과 옛 일을 회상하며 작별을 고했는데 이제는 임종 순간에 도에 넘친 슬픔으로 감정을 승화한다. 남은 이들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담았던 유언장은 사유 재산의 상속을 언급하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20세기 이후 금지된 죽음이다. 죽음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다. 중병에 걸렸거나 생사의 기로에 선 사실을 주변에 밝히기를 꺼린다. 죽음을 맞는 장소가 집이 아닌 병원과 장례식장 등 공공장소로 바뀌었다. 치료와 수명연장이란 미명하에 과도한 의료 행위나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연명치료가 보편화되었다. 죽음이 산업화되자 장례문화가 자본주의 양식에 편입되어 의료장사에 몰두하는 죽음의 시장화가 만연했다. 모두가 죽음을 소외시킨 결과다.
40년 전만 해도 서울 도심안에 장의사 점포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집에서 운명을 맞았다. 선친께서도 임종 전 의사의 권유로 퇴원해 가족 곁에서 돌아가셨다. 나와 동생은 어리다는 이유로 선친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동네분들이 내 일처럼 장례를 도왔다. 선친의 죽음에는 여러 죽음이 혼재되었지만 최소한 금지된 죽음은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아파트가 보급되고 지역 공동체가 약해짐에 따라죽음을 맞는 공간이 가정이란 사적 장소에서 병원과 장례식장으로 변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가족 품 안에서 죽기조차 쉽지 않았다. 환자 홀로 절대 고독에 직면해야 했다. 지난날 죽음과 친밀했던 역사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죽음은 부정적 이미지로 격하되어 더 이상 내가 마주쳐서는 안 될 음습한 대상으로 전락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년)'은 남부럽지 않게 품위 있는 삶을 살던 일리치의 죽음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저자는 일리치가 병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죽음에 친숙해져야만 위선과 거짓에서 벗어난 참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진지하게 설파했다. 일리치는 병들어 고통을 느끼고 나서야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옆구리를 다치기 전 그의 인생은 즐겁고 편안하며 법도에 맞는 삶이었다. 병세가 악화되어 기도를 해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자 주변 사람들에게 푸념하며 막무가내로 항의했다. 그러다 죽어가는 자신을 정성스레 돌보는 게라심에게서 잊었던 어린 시절의 행복이 떠올랐다. 소싯적 기억이 되살아 나서야 그간 자신에게 고통받는 가족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과 가족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스스로 숨을 멈춘다.
올 2월에 직장 후배 부친의 생존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아직 살아 계시는 와중에 미리 치른 장례식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으신 춘당께서는 일찌감치 연명치료를 거부하셨다. 증상이 악화되기 전, 거동이 자유롭고 아프지 않을 때 보고 싶은 친구와 지인, 일가친척 모두 불러 모아 푸짐한 잔칫상을 융숭히 대접하려 했다는 것이다. 조의금을 정중히 거절한 저간의 사정을 이해한 조문객들은 누구 하나 얼굴 붉히지 않고 춘당 어르신의 기지에 감탄했다. 모두가 당신의 화양연화를 안주삼아 왁자지껄 유쾌한 사담을 나눴다. 문상객들은 고인을 기리기 위해 조문한다. 재미있는 소사에 가끔 헛헛한 웃음을 짓지만 대부분 가슴 한편에 먹먹한 슬픔과 허탈함, 상실감을 지우지 못한다. 그런데 생존 장례식은 고인이 아닌 주인공과 상주, 문상객 모두가 fun하게 시끌벅적한 이별 잔치였다.
흥겨운 마음을 다지던 중 눈을 떴다. 이 모두가 꿈이었다. 하지만 꿈속 생존장례식에서 죽음은 더 이상 소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래전에 잊힌 친밀한 자신의 죽음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역시 죽음에 익숙한 길이다. 순례자들은 대성당에 잠든 성 야고보를 기리며 걷는다. 그를 만나려고 집을 나섰다가 까미노 위에서 불귀의 객이 된 길손들이 잠들어 있다. 까미노 도처엔 스페인 내전 당시에 희생당한 이들이 묻혀 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나온 대부분 마을마다 교외 한적한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아직도 중세 분위기가 완연한 순례길엔 생존 장례식처럼 친밀한 자신의 죽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비야당고스 델 까미노에서 점심을 먹었다. 순례 중 처음 맛보는 수제 햄버거다. 양이 많아 하나는 먹지 않고 포장을 부탁했다. 계산하려고 지갑을 꺼내니 15 유로가 빈다. 도네이션 바에서 거스름돈으로 1 유로 동전 5개만 받았나 보다. 나나 주인장 모두 부주의해 벌어진 일이다. 이미 엎지른 물, 15 유로는 사람으로 환생할 길냥이의 면죄부를 구입한 걸로 생각했다. 아니면 녀석이 고 별로 돌아가는데 쓸 노잣돈이려니 여겼다. 마을을 벗어날 무렵 길냥이 5마리를 만났다. 녀석에게 이런 친구들이 있었다면 외롭지 않았을 텐데. 아이들아 너희는 부디 아프지 말아라. 힘들 때는 서로 기대어 의지하려무나. 아픔과 슬픔은 나눠갖고 기쁨과 즐거움은 더해 가지렴.
알베르게 라 후에야Albergue La Huella에 도착했다. 리셉션 데스크를 겸한 바에 주문하는 순례객들로 부산했다. 바쁘게 체크인하는 스태프가 같은 방을 쓸 거냐고 묻는다. 당연한 걸 왜 묻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러겠다고 일렀다. 방에 들어갔다. 문 앞에 있는 침대를 배정받았다. 남성 투숙객들만 있었다. 짐을 부리고 잠시 쉬려는데 옆 침대 위칸의 이탈리아 남성이 바지를 벗어 속옷 차림으로 눕는다. 내가 봐도 민망한데 누나는 오죽하랴! 미안하지만 아래칸에 누나가 있으니 옷을 입어달라 부탁했다. 어색한 분위기에 요기나 하자며 방을 나왔다. 누나가 옆방엔 여자들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리셉션으로 갔다. 여성 전용실이 따로 있는 거 같은데 바꿀 수 있는지 물었다. 빈 베드가 남아 방을 바꿔주었다. 알고 보니 여기는 다른 숙소와 달리 남녀 구분해서 베드를 배정한다. 그것도 모르고 남자 숙소에서 편히 쉬려는 투숙객에게 괜히 투정을 부렸다. 돌아가서 아닌 밤중에 봉변 당한 이탈리아 순례자에게 사과했다. 남자들만 쓰는 줄 몰랐다고. 누나는 옆 방으로 옮겼으니 이제라도 편히 쉬라면서.
Bob Dylan은 노래 속 주인공 때문에 일이 풀리지 않았다 투덜대는 친구의 배신과 위선을 대놓고 꾸짖는다. 그동안 친구가 화자에게 저지른 일들을 언급하며 네가 만족하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닌 바로 너 자신 탓이라 지적한다. 'Positively 4th street(203위)'는 라 후에야의 방 배정 원칙을 모르고 지레 짐작하여 이탈리아 남성을 오해한 내 이야기 같다. 약한 자는 복수하고 강한 자는 용서하며 현명한 자는 무시한다던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용기 없는 나약한 사자인가 보다.
식당이 오픈되어 자리를 잡기 무섭게 만석이 되었다. 주문한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K 교장 선생님 부자가 홀에 들어섰다. 뜻밖이었다. 분명 라 페랄라에서 하루 더 머문다고 했는데. 합석을 제안하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샤모아 버터그림을 바를 때까지만 해도 연박할 계획이었는데 다음날 발꿈치 물집이 가라앉아 걸을 만했단다. 그래서 다시 길을 나서 레온에서 하루 연박한 연후에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다. 고생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사리아Sarria 이후부터는 숙소 잡기 어려우니 K 군에게 미리 예약하라 일렀다. 우리는 산티아고를 10km 남겨 둔 라보코야Lavacolla에서 멈출 예정이다. K 교장 선생님 부자가 먼저 입성하는 걸 미리 축하하며 기회 닿으면 산티아고에서 차나 한잔 하자는 덕담을 나눴다. 상봉지정相逢之情의 기쁨이 가득한 후에야의 만찬이었다. 예상밖의 해후 덕분에 저녁노을이 행복으로 붉게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