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연박으로 재충전한 만큼 일찌감치 다섯 시 반에 일어났다. 어제 순례자가 새로 입실하지 않아 포르투갈 연인들만 자는 중이었다. 간단히 세면만 하고 그림자 물러나듯 소리 없이 방을 나왔다. 공용 주방이 있는 지하 일 층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너무 일러 식당과 복도 조명등이 전부 꺼져 있었다. 아직 오픈 시간 전이지만 공용 주방이 열려 있었다. 불을 켜 단출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짜파게티를 끓이고 계란을 삶았다. 어제 마트에서 산 과일과 음료수를 꺼냈다. 아니다.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다! 재빨리 유리 테이블 아래를 살폈다. 거한 상차림에 다리가 휘지 않아 다행이었다.
모처럼 출발 전 포식에 룰루랄라 배를 두드리며 식당 앞으로 갔다. 길게 늘어선 의자 하나를 골라 배낭을 내려놓고 떠날 채비를 했다. 허리 숙여 신발끈을 졸라맨 후 무심코 옆 의자에 손을 얹었다. 무언가 두툼한 게 만져졌다. 손으로 집어 올렸다. 지갑이다. 누나에게 지갑 떨어뜨렸냐 물었는데 아니란다. 핸드폰 조명을 켜 지갑을 펼쳤다. 캐나다 신분증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도 빳빳한 백 유로 지폐가 수십 장 빼곡하게 한 칸 가득 메웠다. 복도에 불이 꺼졌던 걸로 봐서는 누군가 먼저 왔을 가능성이 적었다. 그렇다면 어제저녁 식사 후 식당 앞에서 노닐다가 흘렸을 공산이 컸다. 일 층 데스크로 갔다. 안타깝게 아무도 없었다.
지갑을 잃은 순례자가 분실한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애가 탈까? 신분증에 여비와 카드까지 몽땅 잃어버리면 앞으로 순례를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다. 낙담해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조차 번거로울 게 틀림없다. 어떻게든 돌려줘야 할 텐데 어쩌나 고민하며 식당으로 되돌아왔다. 그렇다고 주인 찾기 위해 출발을 하염없이 미루는 것도 부담돼 답답하던 차였다. 바짝 애가 타는 순간 식당 안쪽 주방 불이 켜졌다. 아침 준비하는 스태프일 거라 추측했다. 닫힌 유리문을 두드리며 안쪽에 들릴 만큼 문 좀 열어 보라 소리쳤다. 여성 스태프 한 분이 나왔다. 직원이냐 물으니 청소 담당이라 신분을 밝혔다. 사정을 얘기했다. 식당 앞 의자에서 지갑을 주웠으며 캐나다 출신 순례자 같으니 꼭 찾아달라 부탁했다. 여덟 시에 출근하는 데스크 직원에게 전달할 테니 안심하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몇 호실에서 묵었냐 묻길래 112호실에 투숙한 코리안이라 일러줬다. 웃으며 다시 한번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기고 성 프란치스코 알베르게를 나섰다. 레온 대성당을 지나는 길에 부디 주인이 되찾기 바라는 염원을 드린 다음 오늘 하루를 열었다.
레온 대성당을 거쳐 성 마르코스 광장의 순례자 기념비를 찾았다. 광장 옆 로마 다리를 건너 레온 교외를 향해 나갔다.
역시나 레온은 대도시였다. 한 시간 넘게 걸었는데 여전히 레온을 벗어나지 못했다. 주택가를 벗어난 한산한 포장도로 옆에 서 있는 커다란 창고가 눈앞에 들어왔다. 순례객 둘이 막 일어서는 중이었다. 자동차 정비소 앞에 마련된 도네이션 바였다. 마침 여덟 시 직전이라 알베르게에 확인 전화를 할 겸 쉬어 가기로 했다. 커피와 핫초코 믹스 두 잔에 이 유로 오십 센트. 어디서 왔는지 세계 지도에 마크해 보라는 주인장 권유에 서울을 찾아 핀을 꽂으려 했더니 누군가 이미 표시해 놨다. 잔돈이 필요할 거 같아 이십 유로 지폐를 바꿔 달라 부탁했다. 주인장이 건네는 동전을 무심코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여덟 시가 넘기 무섭게 알베르게에 전화했다. 데스크 직원이 받았다. 어제 머문 순례객이라 밝힌 다음에 용건을 말했다. 담당 직원이 업된 목소리로 아침나절에 신원을 확인해 전달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도그라시아스를 연발했다. 걷는 내내 마음에 걸리던 차에 이제 시름 하나를 놓게 되었다. 한껏 기분이 고양되어 신나게 걸었다.
개운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 비르헨 델 까미노에 들어섰다. 제대로 쉴 바들이 많았지만 방금 전에 쉬었던 터라 직진 모드를 이어갔다. 오래전 이곳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의 목을 축여줬을 아기자기한 연못과 낡은 종탑 위의 황새 둥지 그리고 예쁘장한 조형물에게 잘 있으라 가볍게 인사하며 산 마르틴 델 까미노로 향했다. 파란 도화지 위에 새하얀 구름이 점점이 뿌려진 화창한 날, 순례자의 걸음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렇게 비야당고스 델 까미노를 이 킬로미터 가량 남겨둔 호텔 아벤디아 III을 지나갈 즈음이었다.
도네이션 바에서 고양이 면죄부를 15유로에 구입했다. 옛날 순례자들의 목을 축여줬을 아담한 연못과 황새 둥지와 예쁜 조형물을 지나 붉은 지붕 근처 녀석이 잠든 곳으로 나갔다
중간에 점심을 먹어도 넉넉잡아 두 시간 뒤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풀려 어디서 쉴까 궁리하던 차였다. 문득 왼편 길섶에 길냥이가 보이는 거 같아 시선을 돌렸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녀석은 미동도 없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경직된 채 굳어 있었다. 아직 벌레가 들끓지 않은 거 봐서는 생을 다한 지 오래인 거 같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이대로 가기엔 너무 찜찜했다. 묻어주고 싶은데 땅을 팔 만한 도구가 없다. 어찌할까 머뭇거렸다. 앞에 보이는 호텔 근처로 무작정 뛰어갔다. 레스토랑만 근처에 있을 뿐 아무리 둘러봐도 삽을 구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미안하다. 냥이야. 잘 보내주려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넋이라도 따뜻한 곳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지내라며 녀석의 명복을 빌었다. 혹시라도 다시 태어나면 꼭 사람으로 환생해 극락에 가기를 바라며.
하쿠와 타타를 입양하기 전에는 길냥이들에 무관심했다. 아이들이 우리와 가까운 도처에서 힘겹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예 인식하지 못했다. 내가 그랬듯이 대다수 사람들에게 길냥이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다.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삶을 근근이 살다가 그들의 별로 돌아간다. 하쿠와 타타와 한 식구가 되고 나서 아내의 권유로 두 고양이의 집사인 김바다 작가가 지은 '어떤 삶들(2021년)'이란 책을 읽었다. 여기엔 한결같이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천사 같은 집사를 만나 행복한 삶을 잠시 누리고선 주위 사람들의 눈물과 축복 속에 생을 거둔 여덟 마리 길냥이들의 삶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급식소에서 수녀님의 애정 어린 건사를 받았던 태평이의 사연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태평이는 김사라 수녀가 봉사하는 오래된 급식소를 드나들던 길냥이다. 어미에게서 갓 독립한 이후부터 급식소 근처를 맴돌다 수녀님과 교감을 나누며 친해졌다. 급식소가 자리를 옮기게 되어 수녀님은 주변 지인들에게 태평이를 비롯한 십여 마리의 냥이들을 부탁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눈에 밟힌 수녀님은 주일마다 예전 급식소를 찾아 아이들을 챙겼다. 늦가을 어느 날 고양이 집에서 다 죽어가는 태평이를 발견했다. 치명적인 복막염이 상당히 진행되어 기력마저 소진돼 치료가 불가하다는 진단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수녀원에 머물게 된 태평이는 반신불수의 몸으로 한치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수녀님과 봉사자들의 간절한 정성아래 병마와 사투를 벌였다.
미동조차 버거운 태평이는 자신을 성심껏 돌봐주는 이들에게 표정과 소리만으로 깊은 관심과 고마움을 표했다. 육 개월 동안 조금씩 기력을 찾는 모습에 읽는 내내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MRI 검사 결과 바이러스가 뇌에 침입해 차곡차곡 물이 차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간 태평이가 보여준 호전 증세는 어쩌면 수녀님과 봉사자의 치성에 조금이라도 답하려 애쓴 결과였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얼마 후 여느 날처럼 인사도 잘하고 밥도 맛있게 먹으며 수녀님과 눈을 맞추던 태평이에게 원치 않던 그 순간이 찾아왔다. 갑자기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경련이 찾아왔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는 중에 혼수상태에 빠져 이내 고양이 별로 올라갔다. 태평이가 운명을 다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찢어지게 시렸다. 북풍한설의 거센 바람에 동창나 얼음 배긴 것처럼 저며왔다. 후원자들은 태평이가 수녀님에게 위로를 많이 받았을 거라 했다. 김사라 수녀는 오히려 태평이에게서 더 큰 사랑을 찾았다고 했다.
수녀님에게 사랑을 주었던 태평이처럼 길섶에서 죽어간 녀석은 사랑을 나눠줄 사람이 있었을까? 태평이는 마지막 순간에 고통을 잊게 해 준 의지할 수녀님이 곁에 있었는데 녀석에겐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그 옆을 지켜준 누군가 있었을까? 찰나의 명현이 찾아왔을 때 녀석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자신을 낳아준 어미? 고된 삶에 조금이라도 기댈 수 있었던 친구 냥이? 아니면 돌봐주었던 사람? 그도 아니면 따뜻한 은신처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행복했던 기억? 무엇이 되었든 쓸쓸히 홀로 죽음의 공포에 맞서지 않았더라면 좋겠다.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Bill Withers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동네 사람들이 이웃사촌이 되어 서로 도와주는 끈끈한 정을 노래했다. 영혼을 울리는 호소력 짙은 담백한 목소리에 진솔한 가사가 녀석의 주검에 망연자실하던 내 심금을 울렸다. 어쩌면 녀석은 고별에 가서도 제 육신을 묻어달라 내게 기대었을지 모르는데. 늦었지만 태평이와 녀석에게 'Lean on me(205위)'를 들려주고 싶다. ‘네가 힘들 땐 나에게 기대. 내가 네 친구가 되어 네가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줄게.’
Bill Withers - Lean On Me(1972년, 205위)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언제고 죽음을 맞이한다. 불멸의 존재가 아닌 한 죽음은 필연이다. 피할 수 없다면 죽음을 직시해 보는 건 어떠한가. 프랑스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는 그의 저서 '죽음의 역사(2016년)'에서 네 가지의 죽음을 얘기했다.
먼저 길들여진 죽음이다. 역사 시대 이래로 중세 초반까지 인간은 죽음에 친숙했다. 나이 들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운명과 자연의 순리를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생을 마감하는 침상에서 가족과 친지, 친했던 이웃들에 둘러싸여 생전의 기억을 나누며 이별을 고했다. 이처럼 죽음이 친밀하다 보니 아이들까지 서슴지 않게 고인의 임종을 함께 맞이했다.
중세 후기에는 자신의 죽음을 중시했다. 친숙하게 길들여진 죽음에 개인적인 의미가 더해졌다. 이 시기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은 이전과 달라졌다. 망자를 추모하려는 이들이 여전히 침상 주위에서 임종을 앞둔 이를 내려다본다. 그런데 망자는 이들과 눈을 맞추는 게 아니라 자신 곁으로 내려온 천사를 바라본다. 그러고 나서 숨을 거두기 전에 남겨진 이들과 공동체에게 개인적인 바람을 유언한다. 친밀한 죽음과 더불어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고자 한 죽음이다.
17세기부터 타인의 죽음이 보편화되었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내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내가 아닌 타인의 죽음을 낭만적으로 치장하거나 찬양한다. 예전에는 고인과 옛 일을 회상하며 작별을 고했는데 이제는 임종 순간에 도에 넘친 슬픔으로 감정을 승화한다. 남은 이들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담았던 유언장은 사유 재산의 상속을 언급하기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20세기 이후의 금지된 죽음이다. 죽음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다. 중병에 걸렸거나 생사의 기로에 선 사실을 주변에 밝히기 꺼려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가 집이 아닌 병원과 장례식장 등 공공장소로 바뀌었다. 치료와 수명연장이란 미명하에 과도한 의료 행위나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연명치료가 보편화되었다. 죽음이 산업화되자 장례문화가 자본주의 양식에 편입되어 의료장사에 몰두하는 죽음의 시장화가 만연했다. 모두가 죽음을 소외시킨 결과다.
사십 년 전만 해도 서울 곳곳에 장의사 점포가 있었다. 상당수 병자들이 집에서 운명했다. 의사의 권유로 선친께서도 임종 전 퇴원해 가족들 앞에서 돌아가셨다. 어리다는 이유로 나와 동생은 선친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동네 이웃사촌들이 내 일처럼 장례를 도왔다. 이처럼 선친의 죽음에는 여러 죽음이 혼재되었지만 최소한 금지된 죽음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죽음을 맞는 공간이 가정이란 사적 장소에서 아파트가 보급되고 마을 공동체가 약해짐에 따라 요양병원과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가족들 품 안에서 죽기조차 쉽지 않았다. 환자 홀로 절대 고독에 직면해야 했다. 지난날 죽음과 친밀했던 역사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죽음은 부정적 이미지로 격하되어 더 이상 내가 마주쳐서는 안 될 음습한 대상으로 전락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년)'은 남부럽지 않게 품위 있는 삶을 살던 일리치의 죽음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저자는 일리치가 병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죽음에 친숙해져야만 위선과 거짓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진지하게 설파했다. 일리치는 병들어 고통을 느끼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옆구리를 다치기 전 그의 인생은 즐겁고 편안하며 법도에 맞는 삶이었다. 병이 악화돼 기도를 해도 고통을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러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마구 항의했다. 그러다 죽어가는 자신을 정성스레 돌보는 게라심에게 깨달음을 얻었다. 잊었던 어린 시절의 행복을 떠올린 것이다. 소싯적 기억이 되살아 나서야 그간 자신에게 고통받는 가족을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과 가족을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스스로 숨을 멈춘다.
올 2월에 직장 후배 부친의 생존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아직 살아 계시는 와중에 미리 치른 장례식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으신 춘당께서는 일찌감치 연명치료를 거부하셨다. 증상이 악화되기 전, 거동할 수 있고 통증에서 자유로울 때 그간 보고 싶던 어릴 적 친구와 지인, 일가친척 모두 불러 모아 푸짐한 잔칫상을 제대로 대접하려 했다는 것이다. 한사코 조의금을 받지 않은 저간의 사정을 전해 들은 조문객들은 어느 누구 얼굴 붉히지 않고 춘당 어르신의 기지에 감탄했다. 모두가 왁자지껄 당신의 화양연화를 안주삼아 유쾌한 사담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을 기리기 위해 조문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소사에 가끔 헛헛하게 웃음 짓지만 대부분 가슴 한편에 먹먹한 슬픔과 허탈함 그리고 상실감을 지우지 못한다. 그런데 생존 장례식은 참석한 고인이 될 주인공과 상주, 문상객 모두가 fun하게 시끌벅적한 이별 잔치였다.
즐거운 마음을 다시던 중 눈을 떴다. 이 모두가 꿈이었다. 하지만 꿈속 생존장례식에서 죽음은 더 이상 소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래전 잊었던 친밀한 자신의 죽음이었다. 마찬가지로 산티아고 순례길 또한 죽음에 익숙한 길이다. 순례자들은 대성당에 잠든 성 야고보를 기리며 걷는다. 그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까미노 위에서 불귀의 객이 된 길손들이 잠들어 있다. 까미노 도처에 스페인 내전 당시에 희생당한 이들이 묻혀 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금껏 지나온 대부분 마을마다 교외 한적한 곳에 공동묘지가 있다. 중세 분위기가 아직도 완연한 순례길의 마을엔 아직 생존 장례식과 같은 친밀한 자신의 죽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비야당고스 델 까미노에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순례길에서 처음 맛본 수제 햄버거였다. 양이 많아 하나는 그대로 포장해 달라 부탁했다.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에서 동전을 찾았는데 십오 유로가 빈다. 아뿔싸! 도네이션 바에서 잔돈을 바꾸면서 일 유로 동전 다섯 개만 받고 덜 받았나 보다. 나나 주인장 모두 부주의해 벌어진 일이다. 이미 엎지른 물, 십오 유로는 사람으로 환생할 길냥이의 면죄부를 사는 데 쓴 걸로 생각했다. 아니면 녀석이 고 별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노잣돈이겠거니 여겼다. 마을 중심지를 지날 무렵 길냥이 다섯 마리를 만났다. 녀석에게 이런 친구들이 있었다면 외롭지 않았을 텐데. 아이들아 너희라도 부디 아프지 말아라. 힘들 때는 서로 기대어 의지하려무나. 아픔과 슬픔은 나눠갖고 기쁨과 즐거움은 더해 가지렴.
녀석과 헤어진지 30분이 채 안되는 거리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어쩌면 녀석과 아이들은 만났던 적이 있지 않을까? 녀석에게도 친구가 있었으면 덜 외로웠을 것인데.
알베르게 라 후에야에 도착했다. 리셉션 데스크를 겸한 바에 먼저 도착한 순례객들로 부산했다. 경황없이 체크인하는 스태프가 같은 방을 쓸 거냐고 묻는다. 당연한 걸 왜 묻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러겠다고 일렀다. 방에 들어갔다. 문 앞쪽에 있는 침대를 배정받았다. 남성 투숙객들만 있었다. 짐을 정리한 다음 잠시 쉬려 하는데 옆 침대 위칸에 있는 이탈리아 남자가 바지를 벗어 속옷 차림으로 눕는 게 아닌가. 내가 보기에도 민망한데 누나는 오죽하랴! 미안하지만 아래칸에 누나가 있으니 옷을 입어달라 부탁했다. 잠시 후 요기나 하자며 누나와 방을 나왔다. 옆 방을 들여다본 누나가 여자들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리셉션으로 갔다. 여성 투숙객을 위한 방이 따로 있는 거 같은데 바꿀 수 있는지 물었다. 빈 베드가 있어 방을 바꿔주었다. 알고 보니 여기는 다른 숙소와 달리 남녀 구분해서 베드를 배정해 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남자들만 있는 방에 여성이 들어와 편한 옷차림을 방해했다. 돌아가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 당한 이탈리아 순례자에게 사과했다. 남자들만 쓰는 줄 몰랐다고. 누나는 옆 방으로 옮겼으니 이제라도 편히 쉬라면서.
Bob Dylan은 노래 속 주인공 때문에 일이 풀리지 않았다 투덜대는 친구의 배신과 위선을 대놓고 꾸짖었다. 그동안 그가 화자에게 행했던 일들을 언급하며 네가 만족하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 탓이라 얘기했다. 'Positively 4th street(203위)'는 라 후에야의 방 배정 원칙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채 지레 짐작하여 이탈리아 남성을 크게 오해했던 나 자신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약한 자는 복수하고 강한 자는 용서하며 현명한 자는 무시한다던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용기 없는 사자인가 보다.
Bob Dylan - Positively 4th Street(1965년, 203위)
이른 저녁을 먹을 겸 식당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얼마 안돼 자리가 금방 찼다. 주문 후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K 교장 선생님 부자가 홀에 들어섰다. 뜻밖이었다. 분명 라 페랄라에서 하루 더 머문다고 했는데. 합석을 제안하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샤모이 버터그림을 바른 밤까지만 해도 연박을 할 계획이었는데 느지막하게 일어나 보니 발꿈치 물집이 가라앉아 걸을 만했단다. 그래서 예정대로 다시 길을 나서 레온에서 하루 연박한 연후에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다. 고생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사리아 지나면 숙소 잡기 어려우니 K군에게 미리미리 예약하라 일러주었다. 우리는 산티아고를 십 킬로미터 남겨 둔 라보코야에서 멈출 예정이었다. K 교장 선생님 부자가 먼저 입성하는 걸 미리 축하하며 기회가 닿으면 산티아고에서 차나 한잔 하자는 덕담을 나눴다. 상봉지정(相逢之情)의 기쁨이 가득한 후에야의 만찬이었다. 예상밖의 해후 덕분에 저녁노을이 행복으로 붉게 물들어갔다.
녀석의 주검을 뒤로 하고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야 했다. 숲을 지나 저 하늘의 구름을 따라 떠도는 나그네처럼.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저물어 대지를 붉게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