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
내 글은 내가 봐도 재미없는 축에 속한다. 왜냐고? 내가 재미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말을 해도 주위를 배꼽 잡게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갑분싸 하게 만드는 용하디 용한 재주가 넘치는 이도 있다.
글에는 작가의 체취가, 살아온 이력이, 배우고 익혔던 잡다한 지식과 사상이, 결정적으로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가가 선택한 단어에서 그의 지성과 사고의 지평을 엿볼 수 있다. 독서와 학습으로 단련된 어휘가 적재적소에 배치돼야 글에 후광을 더한다. 그가 써 내려간 문장은 작가가 키워온 세계관의 향내가 배어있다. 아무리 다르게 포장해 그 향기를 가리려 해도 은연중에 자신의 향신과 아로마를 감추기 어렵다. 문장의 리듬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전개하는 사고와 행동의 습성들이 문장 내에서 독특한 운율로 버무려진다.
익숙한 먼발치에 보이는 뒤태만으로 그가 누구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문체만으로도 이 글을 누가 썼는지 쉽사리 유추해 낼 수 있다. 글은 육화된 나 자신이므로 젊은 시절 내 글은 재미없었을 뿐더러-지금도 매한가지다-, 염세에 찌들었고, 자주 현학적이었으며, 나르시스 한 기운이 물씬했다.
유머러스하지 못한 천성이 내글을 앍는 이들이 미소 짓는 것에 인색하게 만들었으며, 십대 시절 이문열을 탐닉한 탓에 은근슬쩍 잘난 체 어투가 체화되어 버렸고, 잘 벼린 역심을 감당하기엔 굳건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관점이 세상을 등지게 하거나 삐뚤어진 자기애를 돌출시켰던 것이다.
한강 작가의 많은 작품들 중 오늘에서야 단 한 편의 중편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아직 2부와 3부의 연작을 읽지 않은 상태이지만 글에서 한강 작가가 어떤 취향인지, 어떤 스타일인지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주인공 영혜의 꿈과 이야기에서, 남편의 독백에서 소설이 우울하거나 기괴하다던가 읽기 어렵다 한다.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 각오를 다졌었는데 의외로 잘 읽혔다. 아! 나도 그레이하고 그로테스크한 인간이구나. 하긴 내 세상은 늘 글루미 하다 여겼으니 소설에서 전개되는 문체가 유난히 어둡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단지 영혜의 꿈에서, 회상에서 한강은 무얼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작가의 가슴에 새겨진 상흔이 무엇에 기인했으며 어디까지가 그녀가 겪은 직접 체험이고 어느 부분이 학습과 창조에 의한 간접적 경험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글을 쓴다는 것, 한강을 읽는다는 것. 이들은 결국 이런 궁금증에 답해야 하는 나를 돌아보고 관조하며 침잠해 있는 나를 건져내는 일련의 과정이다.
내게 한강의 소설은 쉽게 읽히지만 상처받은 등장인물들에 내재된 컴플렉스와 트라우마-이것이 깊든 얕든, 많든 적든간에-로부터 야기된 호기심어린 생각의 여운이 꼬리를 물게 한다. 맨부커 심사위원들은 이 점을 높게 산 건 아닐는지. 물론 단 한 편의 중편만 읽은 내 선입관의 서투른 판단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