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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Feb 08. 2021

해귀당신의 곡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내 청춘의 자화상

해귀당신 : [해:귀당신] 명사. 얼굴이 어울리지 아니하게 넓으며 복스럽지 아니하게 생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2021년)


  대학 1 학년 때 나를 일컬을 만한 순우리말이 없을까 하여 국어사전을 뒤적거린 적이 있다. 체형에 비해 얼굴이 적은 내가 해발라지지 않았음에도 복스럽지 않다는 말에 끌려 해귀당신을 애칭으로 삼았다. 내가 걸어왔고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 그다지 복된 삶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약간의 자학 코드를 지닌 내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었다. 당시 국어사전의 해귀당신 설명은 이랬다.


해귀당신 : 명사, 얼굴이 해발라지고 푼더분하지 못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1987년) 


  해발리지다, 푼더분하다. 사전을 한 번 더 뒤적거릴만한 단어다. 국어 대사전이 요즘 잘 쓰이지 않는 말을 순화시켜 의미가 바로 와 닿도록 설명해주는 게 무척 마음에 든다. 


  나를 형상화할 수 있는 우리말을 찾으려고 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활동하는 야학에서 연례행사로 학예회를 준비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문예지 발간이었다. 야학을 다니는 학생과 교사들 중에서 희망자들이 글을 기고하기로 했다. 나도 뭔가를 쓰고 싶어 자진해서 손을 들었다.


  무엇을 쓸까 고민을 하던 차에 '나'를 얘기하기로 정했다. 야학이 있던 옥수동, 내가 살던 왕십리 산 동네. 인근의 금호동과 신당동. 어릴 때부터 친숙했던 동네들이다. 6.25 종전 이후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생긴 저소득 계층이 살던 지역이다. 성인 두서너 명이 어깨를 접하여 함께 걸어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길이 굽이굽이 미로처럼 온 사방으로 펼쳐진 난개발 된 동네. 초가지붕이 없을 뿐 기와집이면 다행이고 타르로 기름칠된 두꺼운 먹지위에 시멘트 슬레이트로 지붕을 마감한 집들로 빼곡했다. 그나마 양옥이라 불릴만한 단층, 이층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다. 


  그렇게 친숙했던 동네에도 재개발의 기운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행정구역상 하왕십리동에 속한 우리 집에서 5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신당동 접경지역도 재개발 조합이 들어섰다. 소문에 임대를 들었던 사람들이 딱지(입주권)를 못 받고 쫓겨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져 나갈 무렵이었다.


  얼굴을 모른다지만 어릴 때부터 살던 이웃과 다름 아닌 이들이 자신의 생활 터전에서 힘없이, 재개발 조합이 고용한 (깡패와 다를 바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철거반원들에게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에 울분을 누르던 차였다. 나를 표현해줄 우리말을 찾아서 이런 울분과 치기를 쏟아내고 싶었다.


  요즘도 재개발, 재건축 예정지에서 갈등이 심심치 않다. 갈등이 채 조정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철거를 시도하다가 사상자가 발생하는 경우가 지금도 일어나곤 한다. 아마 당시는 갈등의 양상과 정도가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스무 살 객기가 가득 찼을 젊은 이에게 얼마나 부조리하게 보였을까? 이런 마음을 담으려고 했던 것 같다.


  1987년 야학 문예지를 잃어버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간혹 생각나 서재에 꼽혀 있을 법한 칸들을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불필요한 책들을 버리면서 묻어 나갔구나 여겼다. 어제, 5년 전에 출자했던 비상장기업 주식매수 계약서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다 우연찮게 문예지를 발견하고 너무 기분이 좋았다. 잃어버린 자식 혹은 기억을 찾는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행여나 또 잊을세라 사진을 찍고 잊지 않을 곳에 꽂아 두었다. 치기와 객기가 그득한 시. '해귀당신의 곡'이다.




해귀당신의 


포클레인에 집을 잃고

정겨웠던 신당동 판자촌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거렁뱅이 취급을 받으며 떠돌다

문득 쳐다본 시청 위 달빛이

겨울바람 탓인지 왠지 처량하다


고된 노동으로 갈라지고 찢긴

내 손가락 마디마디와도 같이

거리의 네온 등에 찢긴 그 달빛 아래서

영영 돌아가지 못할

어머니의 집을 그리워한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막노동으로 곤한 나를 위해서

내게로 부산히 달려오는 집이 있었건만

이제는 내가 그리워하여

달려가야 할 집조차 없다.


나를 위해 묻어 줄 

한 뼘의 땅도 마련치 못한 나는

어머니가 내 몸에 남겨주신

생명 어린 탯줄의 흔적같이

내 몸에서 떨쳐낼 수 없는 

한 몸뚱아리, 신당동 옛 집을 되찾기 위해

피를 토하며 죽는 그 날까지

가뿐 숨 몰아쉬며 이 땅 위를 내달려야 한다. 


그러다 언제인가

험한 세상 타고 넘는 곡예 끝에

마침내 내 죽으면

광희문을 지나 매봉산 기슭에 묻혀

살았던 신당동 옛집과

죽어서 갈 저승을 눈물로 적시며

불타다 만 소나무가 있는 그 동산이

내 집인 듯 눕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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