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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Aug 22. 2022

와인의 추억

내 인생 최고의 와인들

2006~07년 즈음으로 기억된다. 오디오 중고 장터로 유명한 와싸다 닷컴의 오디오 게시판에서 실용 오디오 논쟁이 한창 불이 붙었던 적이 있다. 실용 이슈는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뜨거운 논박과 설전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다. 인간의 가청 능력상 구분이 안될 주파수 대역까지 비싼 돈 들여 선재와 스피커, 앰프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실용파와 단지 고가라는 감성적인 소구 이상으로 실제로 소리를 구별할 수 있는 청취자들은 물론이요 어쨌든 오디오 성능에 차이가 있는 만큼 가능하다면 고가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하이엔드파 간의 말싸움이 늘 그렀듯이 끝내 감정싸움으로 이어지곤 한다.


양진영에서 굳이 따진다면 다소 실용주의에 가까운 나는 어느 한쪽 편을 들기보다 결국 오디오를 취미로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클래식, 팝, 재즈, 가요 같은 음악 감상에 있으니 서로를 비난하지 말자는 취지로 섣부른 중재를 했다. 내 의견에 동조하는 동호인들이 많았지만 여전히 양진영으로부터 힐난을 받기도 했었다. 당시 실용 논쟁에 끼어들면서 와인과 주식을 오디오에 비유하기도 했다. 대중들이 가치주라고 믿는 XX회사가 실은 가장 리스크가 많은 회사라며 장기 투자를 한다면 이런 기업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와인도 비슷하게 세평과 등급만이 정답이 아니라면서 내 인생 최고의 와인은 보르도 1등급 와인이 아닌 떠오르는 신성 도멘의 'David Duban Echezeaux'였고 두 번째 베스트는 어이없게도 미국 나파밸리의 로버트 몬다비 보르도였다고 고백했다.


와인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라투르나 마고, 무통 로췰드 같은 1등급 와인을 먹어보지 않았으니 하는 얘기라거나 경험한 와인 스펙트럼이 제한된 수준의 결론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마셔보지 못한 특급 와인이라면 프랑스로 국한할 때 보르도 계열에서는 페트뤼스, 오브리옹 정도였고 부르고뉴 쪽으로는 DRC의 로마네 꽁티와 같이 한 병에 수백만 원 이상하는 브랜드 정도다. 어느 정도 고가의 특급 와인을 제법 마셔봤다. 그럼에도 내 인생 최고의 와인을 꼽는데 다비드 듀방의 에세조를 서슴지 않고 꼽을 수 있다. DRC의 로마네 꽁티가 아마도 이런 스타일임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주었다. 마치 꽃밭에 앉아 다채로운 아로마를 맡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땄던 무통 로췰드의 그레이트 빈티지인 2005년 세컨드가 명함을 내밀지 못할 수준이었다. 세컨드라지만 2005년이면 '신의 물방울'의 세라 말대로 유아 살해를 넘어선 태아 살해였으니 공평한 테이스팅이 아니긴 했다.


사실 와인은 기본적으로 가격에서 품질을 유추할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그랑퀴르 5등급 와인이라도 2급이나 1급에 필적하기란 매우 힘들다. 과장컨데 바늘 구멍에 낙타가 들어갈 확률이다. 그랑퀴르 이하라면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와인이 재미있는 것은 간혹 하늘이란 기후, 땅이란 테누아르의 잠재력에 인간이란 샤토의 노력이 삼위일체 할 경우 특급 와인에 못지않은 괴물을 왕왕 탄생시킨다는 점이다. 다비드 듀방의 에세조가 그런 셈이다. 홍콩에서 20만 원에 구입했던 이 에세조가 한국에서라면 대략 50만 원 이상 호가했을 것이다. 보르도에 비해 부르고뉴 와인들이 국내에서 더 비싸게 거래된 탓이다. 당시 그 감동을 못 잊어서 홍콩 출장 중에 짬을 내어 홍콩 갈 때마다 가끔 들르는 침사추이 하버시티의 와인숍에서 다비드 듀방의 생볼 뮤지니를 사 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와인 모임 장소에 달려가 잠깐 칠링을 하고 따 봤는데 에세조의 감동을 얻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칠링이 너무 과하게 되어 향이 제대로 살아나기도 전에 다 마신 탓인지 모르겠다.


요즘 한국 시세로 7~10만 원 정도인 로버트 몬다비 보르도가 어떻게 라투르, 마고, 무통 로췰드를 이겨내어 생애 두 번째 베스트 와인으로 꼽히게 되었을까? 물론 기본적으로 맛있긴 했지만 특급 와인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러나 그 와인을 마셨던 장소와 멤버, 추억은 23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존경했던 대표이사님이 퇴임한 다음 첫 송년 모임에서 대표님을 초대했다. 서여의도에서 조그맣게 개업한 오마카세 일식집을 통째로 빌려 전임 대표님 포함 주식운용본부 임직원 6명이 단출하지만 행복하게 연말을 보낸 자리에서 딴 와인이었다. 내 생애에서 마주왕 말고 제대로 된 와인을 처음 경험했던 자리이기도 했다. 6명이 세프를 둘러싼 바에 앉아 좋아했던 상사, 후배와 함께 한 시간에 취했던 기억이 특급 와인을 제친 이유였을 것이다.


요즘은 한국에서 보졸레 누보를 찾기 힘들다. 15년 이전만 해도 보졸레 누보가 프랑스 와인을 대표한다는 듯이 막 병입 된 보졸레 누보를 마시지 않으면 와인 애호가가 아니라고 치부될 정도로 유행한 적이 있다. 사실 보졸레 누보의 이상 열풍은 마케팅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보졸레 누보는 우리 식대로 표현하자면 김치 겉절이에 불과하다. 겉절이는 제대로 익혀 숙성된 맛을 볼 정도의 깊은 맛이 없다. 식전에 바로 무쳐 먹는다. 입 속에서 아싹하게 씹히는 생생한 식감과 상큼한 맛이 장점이다. 보졸레 누보도 마찬가지다. 그랑퀴르에서나 느낄 수 있는 병입 된 지 얼마 안 된 와인의 강력한 탄닌을 느낄 수 없다. 세월이 흘러 그 탄닌이 풀려 아름다운 아로마를 깊은 풍미도 없다. 이처럼 샤토의 클래스란 차이가 있을 밖에 없다. 하지만 전술했다시피 꼭 클래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천지인의 삼위일체에 마시는 시음자의 주관적 심리 상태가 더해진다면 내 기억 속의 베스트 와인이 와인 평론가들의 랭킹과 굳이 일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할인마트에서 데일리 와인을 즐기는 지인들에게 가끔 이런 얘기를 한다. 실속 있고 가성비가 훌륭한 데일리 와인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경제적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와인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10번 데일리 와인을 마실 경험을 포기하고 10만 원 남짓의 중고가 와인을 잘 골라서 마셔보라고 권한다. 나도 모르게 굴레를 씌운 와인이란 잠재력을 넓히기 위해서는 가끔이라도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와인을 경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10만 원짜리를 무분별하게 마신다면야 사치이겠지만 1만 원짜리 10번을 아껴 한 병 산다면야 경제적으로는 등가이겠고 그간 느끼지 못했던 무언가를 얻고 경험할 수 있다면 플러스알파 아니겠는가?


하쿠와 타타와 한 식구가 된 지 이제 1년이 되어간다.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금단의 영역이 있었다. 내 서재이자 음악방이다. 내가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한두 시간 음악을 듣고 있자면 아이들이 문밖에서 운다. 못 들은 체 대꾸 없이 시간을 보내고 나오면 아이들이 문 앞에서 미동도 않고 앉은 채 기다리기 일쑤다. 마음이 못내 저미어 결국 올봄부터 오픈해줬다. 내가 음악 들을 때 하쿠는 CD장 꼭대기에도 올라가고 스피커 위에서 뛰어 논다. 오디오 기기가 망가지거나 흠집 나는 걸 포기한 지 오래지만 혹여라도 애써 버리지 못하고 보관 중인 와인 공병들을 떨어트려 다칠까 봐 걱정이 많았다. 결국 라벨이 예뻐 15년가량 모아 왔던 와인병을 주말에 분양 보냈다.


한 병 한 병, 이런저런 모임에서 친한 이들과 마셨던 추억만이 내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그 기억이 잊힐까 봐 부랴부랴 사진을 찍어두었다. 당시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과 어떤 감정들이었는지를 와인과 함께 싸이월드에 기록해두었다. 싸이월드가 폐쇄되어 접근이 불가하다가 얼마 전에 복구가 되어 들어가 봤다. 달랑 사진만 복구되었고 정작 추억이 방울방울 아로새겨진 게시물은 사라지고 없다. 공병 사진은 남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와인의 추억은 안개 낀 듯이 점점 희미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 게다. 추억할 일이 많으면 앞으로 기억될 일들이 적을 게 인생의 순리이지 않을까? 와인의 추억은 가볍게 놓아주지 않으면 된다. 남은 반평생 더 잊지 않아야 할 일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사랑스러운 아이들 : 하쿠와 타타]


[내 생애 최고의 와인 : 1위 다비드 듀방 에세조(좌), 3위 샤토 까농 - 아내보다 한 살 어린 빈티지 (중), 4위 샤토 라투르 - 보르도를 대표하는 절대강자, 굳건한 성과 같은 이미지]



[북미 컬트 와인 제외 시 절대강자인 오퍼스원, 라투르, 무통 로췰드, 마고(시계방향 순)]



[보르도 1급 샤토의 세컨드 와인 : 르 쁘디 슈발(슈발블랑), 르 페티트 무통(무통 로췰드), 파빌롱 루즈(마고)]



[생떼밀리옹의 슈발블랑에 필적하는 1급 와인 샤토 앙젤루스, 파돈 드 앙젤루스(앙젤루스 세컨드), 1급에 필적하는 슈퍼 세컨드인 꼬스테스투르넬, 피숑 롱그빌 꽁테스, 바론 라랑드]



[남미의 강자 몬테스 알파 M, 알마비바]



[제이 코드레이 비조 에세조, 파트릭 클라르제 에세조, 병이 예쁜 스페트레제, 밸렌타인에 어울릴 칼롱 세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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