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몽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운설 Apr 12. 2024

조국혁신당의 돌풍을 바라보며

후배에게 부쳤던 편지

  22대 총선이 끝났다. 이번 총선의 특징을 몇 가지 꼽자면 1) 여당인 국민의 힘의 참패, 2) 민주당의 과반을 훨씬 상회하는 압승, 3) 3당으로 떠오른 조국혁신당의 돌풍, 4) 진보세력의 한 축을 형성했던 정의당의 궤멸과 진보당의 재기, 5) 야권이 안정적인 입법권을 장악했으나 정부 독주에 제동을 걸 마지노선을 넘지 못한 현상의 고착을 들 수 있다.


  창당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국혁신당이 정치권에 커다란 반향을 올렸지만 이에 부정적인 시선들 역시 상당하다. 20~30대 남성들은 자녀 입시비리에 여전히 기득권의 일탈과 불공정의 아이콘으로 인식한다. 사회를 바꾸자면서 어떻게 조국혁신당에 지지할 수 있냐며 거세게 반문한다. 또한 검찰 정권의 독주를 막자는 비전을 강조한 나머지 다방면으로 산재한 사회 과제를 해결할 정책들이 개발하지 못한 일회성 정당에 머물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조국혁신당이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하며 구태의연한 정치권을 혁신할 세력으로 부상할지를 바라보는 것도 유의미한 관전 포인트이지 않을까 싶다.


  작년 12월 11일 친한 후배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토대가 상부를 결정한다'는 제목으로 말이다. 후배는 6년 전 태안발전소에서 근무 중 산업재해로 사망한 고 김용균 씨 관련 재판 결과에 분노를 표했다. 당시 대법원은 원청업체인 서부발전의 무죄를 선고했다. 원청이 지급한 500여만 원의 월급을 받은 하청업체가 정작 고 김용균 씨에게는 최저시급인 220여 만원만 지급하고 근 300만 원을 수수료로 떼어간 부조리에 분개하면서 말이다. 비록 판결문을 찾아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청업체가 맺은 도급 계약이 법규를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했다. 당시 나는 조국 씨가 저술한 '디케의 눈물'을 읽는 중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어설프게 다듬어 후배에게 메일을 보냈다. 메일에서 나는 고민 끝에 자연인 조국에 대한 재평가를 하기로 다짐했다.


  메일에서 왜 내가 조국 씨가 가고자 하는 길에 동참하게 되었는 지를 미력하게나마 표하였다. 조국에 대한 지지가 여전히 20~30대에게 납득이 되지 않는, 기성세대의 삐뚤어진 동조로 다가설 수 있음을 안다. 내가 원하는 것은 20~30대와 세대 논쟁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젊은 세대가 느낄 시대의 좌절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충분히 인지하면서 같은 위치에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대안을 찾고 싶기도 하다. 다만 한 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조국에 대해 분노하듯 똑같이 공평하게 모든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서 젊은 이들이 편견 없이 당당히 맞서 싸워달라고 제안하고 싶은 것이다.


  주장하는 바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다소 장황스런 편지에도 불구하고 방문해 주신 브런치 회원분들이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토대가 상부를 결정한다.


  노동 현장에서 운명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A가 제기한 파견직, 도급직(하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기형적인 노동계약 조건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자본에 우호적인 사회 환경과 풍토가 만들어낸 현상이라 규정하겠어. 가혹한 중간착취 형태가 현행 법규상 합법인 상황하에서 서로 짬짬이로 눈 가려 아웅 하거나 일부 담당자들의 개인 비리가 뒤섞일 수 있어. 그렇지만 본질은 이러한 법 체계가 존재하는 한 사법부가 노동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이야.


  법 테두리 내에서 서부 발전소의 태안발전본부가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맺을 때 총 계약금 기준으로 입찰 경쟁을 시키는 구조가 월급의 절반이 중간에 사라져 최저 임금을 간신히 상회하는 급여가 되는 원인이지. 도급업체를 유지할 관리비와 이윤을 모두 '0'으로 제시하여 근로자가 받아가는 임금에서 자신의 이윤과 관리비를 챙겨야 하는 구조인거지. 도급업자가 태안발전 본부에게 수주를 받으려면 가능한 한 입찰규모인 도급계약금을 낮춰야 하는 게 문제의 핵심이잖아. 당연히 태안발전본부가 이러한 관행을 모를 일이 없겠지.  단지 회사 입장에서는 어찌 되었든 정규직 부담을 줄이면서 보통 10% 전후되는 도급사업비(이윤, 관리비)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 이익이 생기게 되니까 애써 눈을 감아 주는 게 당연하겠지. 도급업자 입장에서는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미비한 걸 악용하여 원청의 노동 조건에 비해 열악한 수준의 임금을 지불하면서도 손쉽게 지원자를 뽑을 수 있는 고용시장이 존재하는 한 이를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일 테고.


  결국 고용시장에서 노동력을 공급하는 노동자들과 노동력을 수요 하는 자본과 기업이 공정한 조건하에 노동시장에서 수급을 맞춰 임금을 결정하지 못한 현실에서 일어난 이 같은 부조리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규정되는 토대가 사회적 법규, 문화와 같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다시 한번 곱씹게 하는 사안이야. 노동자, 노동여건에 대해 좀 더 우호적인 환경이었다면 당연히 이러한 모순들이 일어나지 않았겠지. 


  보수언론에서는 구미 선진국이 한국보다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우니 기업 경쟁력을 위해 우리도 해외의 본을 받아야 한다고 주창하지. 미국이 한국보다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운 건 명백한 사실이야. 그러나 미국 사회가  평균 소득과 임금 구조를 감안하면 제조업 임금 수준이 단순 직종의 최저 임금보다 꽤  높다는 사실을 도외시하는 것이 문제야. 또한 어느 정도 틀이 잡힌 기업일 경우 한국과 달리 해고 시 조기 퇴직 보상금(ERP)을 제공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그 보상 수준 또한 상대적으로 더 높다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어. 언제나 강조하고자 하는 하나의 사실만을 부풀려 말하는 폐단이 답습되고 있어. 유럽의 경우는 해고의 조건이 미국보다 까다롭고 한국보다 덜 제한적이지만 사회보장이 잘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또한 우리와 애플 투 애플로 비교하기 어렵겠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안전장치를 제공해주지 않은 채 단지 비용절감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국내 분위기에서 입법을 책임지는 국회가 늘 그렇듯 사건이 발생할 때만 '앗 뜨거워'하는 냄비근성에 머무르는 것이 문제 중 하나야. 쟁점이 발생할 때마다 비판 여론이 비등한 걸 의식해 서둘러 입법에 나서는 시늉을 하지만 정작 시일이 적당히 흘러 사람들의 관심이 잦아들면 여러 이해관계자와 이익단체 요구사항을 이리저리 넣고 빼어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어 통과시키거나 그 마저도 보류시키는 관행에서 안주하고 있어. 이 역시 유권자들의 의식과 관심이 높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거야.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정당의 이념이 중요하고 그 이념을 실천할 구체적인 힘이 필요해. 노동 현장을 주목하는 민노당과 정의당이 더 발전적으로 성장하지 못해 무척 아쉬워. 청년 실업이 보편화되고 제대로 된 일자리가 줄어드는 작금의 현실에서 이들을 규합하고 이끌어줄 마땅한 NGO나 사회단체, 내지는 정치 세력이 부재한 것도 답답한 일이겠고.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 한두 명의 국회의원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턱없는 현실이니 뭔가를 시도하기 조차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지. 


  나부터 그러하겠지만 사람들은 돌을 던지는 걸 무척 좋아하나 봐. 아니 어쩌면 인간이란 동물은 환경에 따라 남을 짓밟거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구경하는 걸 즐겨하는지 몰라. 조국 씨가 쓴 '디케의 눈물'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거긴 한데. 그는 책을 통해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낳고 자라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한국 사회에서 나름 상위계층에 있는 사람으로서 자녀 교육에 있어 소수가 누리는 사회적 특권을 활용하여 입시를 챙긴 점에 대해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자기 고백을 하며 스스로가 부족하고 잘못했다는 진지하게 반성했어. 남들이 비난조로 언급한 '강남 좌파'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지 않기도 해. 그러면서 비록 자녀 입시에서 과오가 있었고 살아가는 환경이 남들보다 윤택하다 하더라도 자기는 여전히 유럽에서 보편화된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가 최고라고 믿는다는 고백을 하지. 어떻게 해야 이 사회를 좀 더 살기 좋고 모순이 덜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말이야. 


  이런 조국을 또 누군가는 위선자라 비하할 거야. 나 또한 처음 조국 스캔들이 터졌을 때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 자녀 문제가 거론되는 순간 개혁의 동력이 상실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 성찰의 시간을 가져달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어. 그가 문득문득 SNS에 정치적 소견을 펼쳐 진영 간에 논란의 꼬투리로 부상될 때마다 가벼워 보이는 처신에 마음이 들지 않아 눈이 찡그려진 일도 많았어.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나는 얼마나 죄가 없어 조국에 돌을 던질까 하는 자문을 하게 되더라고. 한 번 낙인찍으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주홍글씨를 그의 이마에 새겨 놓고는 어떠한 그의 변명도 귀담아들을 생각을 하기는 한 걸까 자책하면서.


  죄 없는 자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처럼, 부족한 조국을, 보수 언론의 융단폭격으로부터 너덜너덜해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을 그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던 건가?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재판정을 이끄는 판사의 성향에 따라 유리한 증거마저 부인되는 현실에서 과연 판사가 양심에 따라 조국일가를 판결하기는 한 걸까?라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는 내가 왜 그에게는 냉정한 태도를 취했을까? 내 주위의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서? 아니면 나 역시 50대를 훌쩍 넘어서는 나이에 점차 보수화가 되어서? 디케의 눈물을 읽으면 여전히 조국을 비난하고 그가 또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거나 겸허한 반성을 하지 않았다는 이들이 여전히 많을 거야. 그러나 나는 비록 그가 정갈하게 답을 내놓지 못했지만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었어.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그는 아직도 젊은 청춘이라 여겼어.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그에게 미력한 내 힘을 약간이라도 보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어. 그것이 어떠한 방법과 수단일지는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30여 년 전 조국이 꿈꿨던 사노맹의 꿈은 사라졌어. 한국에서 사회주의 낙원을 당장 실현하자는 주장은 지금에서는 얼치기가 주연하는 블랙 코미디 같은 비현실적인 일이야. 그러나 조국 씨가 그러하듯 사회(민주)주의적인 가치의 깃발을 오롯이 세워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어려운 용기마저 비현실적이라 치부하지는 못하겠어. 아직 우리는 인간의 욕망마저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진정한 고도화된 생산력을 갖춘 사회를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이 같은 인식에 부합될 만한 정치세력에게 물을 주며 그 씨앗이 띄울 시간을 기다려 보고 싶어.

 

  이 것만이 고 김용균 씨를 포함해서 노동현장에서 명을 다한 고인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위로이지 않을까?

고마워.


XX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누가 이강인 선수에게 돌을 던지라 했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