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시선
내가 유년기를 보낸 외가의 마당에는 오래된 대추나무가 있다. 언제 심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머니가 어릴 적에도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외할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 심어진 것 같다. 대추나무는 해마다 붉은 대추를 선물해 주었고, 추석 때 맛있는 햇대추를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귀향길 속에서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사람으로 붐볐지만 햇대추를 먹는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매년 추석 때 맛보는 붉은 대추는 일 년 중 가장 고대하고 기다리는 시간 중 하나였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을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문학 시간이었다. 대추를 보고 이런 시상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으며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이과생의 문학적 표현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궁극의 표현으로 사물의 외부를 보고 내부의 사연을 알려주는 것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당시는 문학보다는 국영수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문학적 기법을 배우는 것은 그 자체가 사치였다.
시를 자주 읽지는 않지만 시 속의 함축적 의미에 항상 매료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을 때에는 겉으로는 절대 드러날 수 없는 의미를 시 속에 숨겨두고 그 정서를 아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의미를 숨겨두기도 했다. 시는 정서와 의미의 전달 체계로 사람과 사람에게 이어지는 음률이자, 노래이다. 김소월 시인의 ’ 진달래꽃‘이 시이지만 노래로 불리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서로 다른 의미로 받아 들 일 수 있겠지만 시는 노래로 불러지며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시의 함축적 의미를 볼 때마다 일상 속 사물의 특별함이 나타난다. 이는 평범함 속의 특별함을 보는 작가의 시선과 대상에게 특별함을 선사하는 능력으로 인해 그 대상은 고유함과 동시에 특별함을 가지게 된다. 대추 한 알 속 담긴 태풍과 번개, 벼락으로 붉어지고 땡볕과 초승달을 보며 다듬어짐으로 인해 내가 맛있게 먹던 붉은 대추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지난겨울의 추위와 봄의 태동,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낸 대추나무를 지켜봐야만 알 수 있는 관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 번 본다고 절대 다 알 수는 없다. 자세히 보고 여러 번 봐야 알 수 있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대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글감으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의미 발견자’로 살기 위해 장석주 시인의 시선을 본받고 싶다. 아니 나도 그와 같은 시선을 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