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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07. 2023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부드럽고 디테일한 고구려의 손길

고구려 주변의 나라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던 무적의 철기병, 개마무사의 기개로 만주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 아쉽게도 그들의 흔적을 마주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땅 대부분은 중국과 북한 지역에 속해 있고, 동북공정으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중국의 야욕으로 고구려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체계적인 관리의 어려움으로 도굴이나 개발에 의한 훼손까지 일어나고 있어서 발굴되기도 전에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점점 잊히고 있는 고구려의 역사와 유물들에 대한 아련함과 애틋함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가보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거리적 상실감은 고구려 고분 벽화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고구려의 고분은 약 100기 정도로 초기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국내성 인근에 무용총, 각저총을 비롯해 30기가 있고 장수왕 시대 평양으로 천도하여 그곳에 70 여기의 고분을 만들었다. 국내성 인근에 지어진 고분 속 벽화에는 당시 활발했던 정복 전쟁을 하던 고구려인의 기상과 기개를 표현하기 위한 모습들을 그렸는데 특히 사냥이나 수박도를 하는 활동적이고 강한 고구려인을 볼 수 있고 수, 당나라와 대립하던 시기여서 그런지 자존심 강한 고구려인에게 당시 선진국이었던 중국풍이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척박했던 그들의 생활 터전의 모습처럼 투박한 기교를 보였다.


 하지만 평양 천도 이후 군사적 갈등보다 농업과 교역을 통해 점점 정치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으며 일정 수준의 중국에서 온 물문이나 유행을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6세기 후반에 그려진 벽화는 초기 투박하고 거친 사신의 모습이 아닌 화려하고 디테일한 사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고구려 벽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반복함을 통해 기술을 얻게 된 것처럼 고분 내실 벽에 바르는 석회질도 점점 뛰어난 경지에 이르게 되고 척박하고 광활한 북방의 영토를 호령하던 거친 고구려인의 모습이 아닌 정교한 밑그림과 부드러운 덧칠의 기술로 점점 장인의 경지에 이르는 고구려인의 예술혼을 엿볼 수 있다.


 나는 고구려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고구려의 역사에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어 늘 그들에 대해 알고 싶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적 한계 속에서 문헌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고구려의 흔적은 늘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삼국시대 북방의 강자로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백제와 신라의 방파제 역할을 한 고구려에 대한 짧은 역사적 견해를 보다 깊고 자세한 식견을 가지기 위해서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서 만나고 싶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고 하지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현재의 모든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군사 강국으로만 알고 있던 고구려의 역사에 대한 편협한 시선을 깨고 고구려의 최전성기였던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이후에도 고구려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이후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 무사들의 말발굽 소리와 먼지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외세의 침입을 격퇴한 고구려는 내부의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고구려의 군사적 힘을 나타낸다고 하면 고구려 고분 벽화는 고구려의 예술과 경제의 힘을 나타냄과 동시에 고구려 미술의 자부심이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고분 벽에 석회를 바르고 당시의 생활과 풍속을 그려서 타임캡슐 속에 감추고 후대의 자손들이 고구려를 기억하고 발견하기를 염원하며 고분문을 닫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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