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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11. 2023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왕세자들

왕좌와 생명의 끈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종묘는 조선 왕과 왕비,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훗날 왕의 칭호를 받은 왕과 그 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왕실의 사당이다. 조선이 오랫동안 유지되기를 바랐기에 건국 당시부터 종묘 건설에 관심이 많았던 태조 이성계 덕분에 종묘는 아직도 남아 조선을 기억할 수 있게 한다. 거대한 조선 왕실의 가계도를 그리다 보면 성리학 중심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소중화를 꿈꾸던 조선은 자신들의 바람과는 달리 왕위 계승에 있어서 순탄치 않은 시간을 보냈다. 두 번의 폐왕과 5명의 왕세자가 폐위되는 사건 속에서도 그들은 왕실을 유지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적장자 승계는 쉽지만은 않았다. 왕위를 이를 아들은 많이 낳아서 당시 위생관념이나 의료기술을 낙후로 단명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조선 왕실의 생명줄을 조금이나마 길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적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했던 조선 왕조에서 27명의 왕 중 적장자는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6명밖에 없다. 특히 숙종의 정통성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되었던 당시 조선 성리학의 대부였던 송시열을 파직시킬 수 있는 힘을 주었으며 그 누구도 숙종의 언행에도 반박하거나 감히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조선 왕실의 정통성은 막강한 힘이 있었으나 적장자 승계를 통해 왕위에 오른 왕들에게는 숙종을 제외하고는 그리 오랜 시간 주어지지는 않았다. 적장자 승계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왕위를 이르려고 했으며 선조는 최초로 방계로 왕위에 오른 왕이 되기도 하였다.


 왕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아들을 낳는 것이었고 조선 왕 중 가장 위대한 성군인 세종대왕은 무려 18명의 아들이 낳았다. 아버지가 왕이었기에 그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왕자로 불리었지만 다 같은 왕자는 아니었다. 어머니의 혈통에 따라 적자, 서자로 나뉘며 다른 대우를 받았고 특히 세자가 아니면 궁궐을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태종의 삼남인 세종대왕도 충녕대군 시절에는 장자 양녕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고 결혼은 하면서 궁궐을 떠나 산 적도 있었지만 형의 비위로 왕세자에서 폐위되자마자 두 달 만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권력의 핵심인 왕실에서조차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왕세자에서 폐위된 왕자들은 거의 대부분 단명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양녕대군은 폐위되었지만 죽지 않고 69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의 바로 밑에 동생 효령대군은 형이 폐위되고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을 노렸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동생이 있음을 알고 난 후 모든 욕심을 버리고 서예와 불교에 심취하여 90세가 넘을 때까지 왕실의 어른으로 살았다. 조선 왕실의 후예 중에 효령대군의 후손이 가장 많은 이유도 왕위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살았기 때문이다. 왕세자가 되지 못한 왕자들은 궁궐을 떠나 살아도 언제나 역모에 휘말릴 수 있었기에 항상 처신을 잘할 수밖에 없었다. 권력의 술수를 피해 한양과 멀리 떨어진 강화도에서 나무를 베며 살았던 강화도령 철종도 이런 연유로 권력의 암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선의 왕세자 중 가장 비운의 왕세자라고 하면 사도세자가 떠오른다. 아버지 영조와의 불화로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어 버린 정말 비극적인 삶을 살은 왕세자이지만 개인적으로 소현세자의 삶이 가장 아쉽게 느껴진다. 조선 왕 중 가장 실리적인 정치를 했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에게는 늘 명분이 필요했다. 사대의 예를 다하려는 명분을 지키고자 청의 진정한 힘을 몰랐고 적절한 대응도 없이 강화도로 피난하고자 했으나 이를 미리 눈치챈 청의 조치로 추운 겨울날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엄동설한에 제대로 된 항전도 하지 못하고 삼전도의 치욕을 맛보았던 인조는 전후 청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왕세자였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내야만 했다.


 자신의 아들들이 청으로 떠날 때 현재 일산까지 찾아와서 청나라 사신들에게 아들들이 추위를 많이 타니 온돌에서 재워달라고 부탁까지 했던 인조는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의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청나라에서 고위층과 교류하며 외교관 역할과 함께 청의 발전된 문물을 직접 경험하고 온 친청파 소현세자는 삼전도의 치욕을 받은 인조에게 눈엣가시이자, 숙적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귀인 조 씨의 이간질로 인해 귀국 후 두 달여 만에 열병으로 몸저 누었다가 의문사한 소현세자는 자신의 손자들까지 귀양 보내고 죽여 버린 인조라는 어리석도 매정한 아버지를 둔 비운의 왕세자였다.


 아버지의 처신에 따라 왕세자의 운명이 결정되었기에 비행을 일삼거나 헛된 꿈을 꾼 왕자의 후손은 묘도 받지 못하고 죽음마저 잊힌 삶을 살았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현명한 처신을 한 왕자들은 권력의 소용돌이를 피해 목숨을 부지하고 왕실의 종친으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자신의 처신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로 억울하게 사지로 내몰린 왕자들도 있었다. 어쩌면 왕이 되는 것보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큰 소망이자 마지막 바람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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