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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18. 2023

발해왕조실록

통합과 융합의 천재

 영화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00만 관객의 쾌거를 이룬 강제규 감독님의 쉬리를 시작으로 수많은 영화가 100만 관객을 넘어 1,000만 관객을 이루는 등 영화의 흥행은 관객 수가 절대적인 영향이 끼친다. 반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정도로 낮은 관객 수로 인해 망하는 영화도 있다. 드라마 분야에서는 허균, 주몽 등 역사적 실존 인물을 소제로 한 경우라도 당시 9시 뉴스보다 높은 시청률을 보이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영화에서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라면 제작 단계부터 역사를 소제로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2005년 역사적으로나 흥행적으로 희귀한 ‘발해’를 모티브로 한 영화,  무영검이 개봉되었는데 5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예상 밖의 흥행을 거두었다. 물론 ‘다모 앓이‘의 주범이었던 이서진 배우 덕분에 일부 관객 동원에 성공했지만 발해의 역사적 사실과 픽션의 조화를 보기 위해 영화는 봤던 관객을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발해라는 나라가 대세도 아니며 역사 교과서에도 가야의 역사만큼 몇 페이지밖에 없어 역사적으로 크게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세’라는 말처럼 일반적인 경우라면 모두가 원하는 것을 따르려는 경향이 강고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특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할 만큼 패자의 역사는 기록으로 남지 않거나 남더라도 폄하 또는 왜곡되어 기록된 경우가 있다. 한반도의 삼국시대, 당시 대세였던 당나라가 그랬다. 자신이 중심이고 자신이 아닌 모든 민족은 야만인이자 오랑캐라고 불렀으며 자국의 역사서에는 단 한 줄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한이 자신들의 신화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자신으로 구별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고대 국가가 태동하였다. 삼국이 각축전을 벌이며 백제,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는 일부 신라로 병합되었으나 광활한 고구려의 북방 영토는 당나라와 북방 민족의 땅이 되어버렸다. 역사적으로나 영토적으로 비어버릴 수 있었던 시기에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요서 지역 영주를 탈출하여 조상들의 땅 동모산에 이르러 발해를 건국하면서 우리의 북방 역사와 영토는 유지될 수 있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며 3만 8,000호에 달하는 고구려 유민을 포로고 끌고 갔는데 대부분 왕족이나 귀족 등 유력 가문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의 불씨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이 매우 강했다.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 중 왕족이 주로 수도인 장안에 배치되고 대부분은 고구려로부터 멀리 떨어진 중국 내륙지역으로 끌려간 한국판 디아스포라였던 중국지역 밖 고구려 유민의 역사이다.


https://brunch.co.kr/@ilikebook/238


당의 견제가 적은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며 고구려의 부활을 꿈꾼 발해는 항상 ‘수수께끼’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역사적인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기에 우리의 역사로 편입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발해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짧은 문장으로 존재하기에 발해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외국의 역사서를 통해 발해의 흔적을 찾아야만 한다. 물론 정조 8년 유득공에 의해 저술된 <발해고>에 발해에 대한 안타까움과 탄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렇게 발해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거의 없다 보니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부터 후대 왕들은 묘호 대신 이름으로 불린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인들은 주변 말갈족과 여진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원수였던 당나라에 끊임없이 대항하며 강국으로 변모하였으며  특히 제10대 선왕 때에는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제국으로 성장했다. 한반도 대부분을 장악했던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룬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이다.


 발해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에 더욱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정효공주묘는 벽돌과 판석으로 축조된 전축분으로 묘지석을 통해 발해 3대 왕 문왕의 넷째 딸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장군총과 같은 석축묘가 고구려 고분 양식이라고 한다면, 전축분은 당의 영향을 받은 발해만의 고유한 고분 양식이다. 건국부터 여러 세력을 통합한 발해는 생활문화에서도 고구려의 것을 중심으로 주변의 것을 받아들여 융합하고 통합한 발해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북방의 나라는 물에 약하다는 편견을 깨버린 발해는 지속적으로 왜 나라와 사신을 교류하며 동경 용원부에서 왜 나라로 가는 뱃길이 존재하였다. 자존심만을 강조하면 고구려의 실수를 답습하지 않도록 주변국과 외교적으로 대화하며 대외정책에서 유연하고 능동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정세 판단력을 통해 주변국과의 관계에 대처하면서 당나라에 대항했지만 당나라의 빈공과에 응시하며 당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발해의 발전에 사용했던 용의주도한 통합과 융합의 나라이다.  


 제15대 대인선왕을 끝으로 급작스럽게 거란에 멸망한 원인이 사료로 남아있지는 않지만 NHK에서는 백두산 폭발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져 거란에서 쉽게 멸망한 것은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방법으로 연대를 확인해 보니 대략 비슷한 시기임이 밝혀져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는 것에 힘을 얻고 있지만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을 더하고 있을 뿐이다.


 거란은 발해의 땅에 동란국을 세워 발해를 복속시키려고 했지만 영화 <무영검>의 소제가 되었던 후발해국, 정안국, 흥료국 등을 세우며 발해의 부활을 꿈꿨다. 그들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절대복종하지 않는 고구려의 기개가 발해인들의 저항으로 부활했으며 고려로 이주하면서 또 다른 다이스포라의 삶으로 발해는 우리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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