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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18. 20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단종 세조실록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겠지만 그 사랑이 너무 지나치면 버릇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오직 자식을 위해서 한 일도 후대에 결코 자식을 위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가문의 비극을 가져온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들을 너무 사랑해 상중 고기를 먹으라는 유언을 남긴 태종, 세자가 외롭지 않게 가장 많은 자녀를 낳고 대군들에게 벼슬을 주어 왕궁에 머물게 한 세종대왕, 이들의 넘치는 자녀에 대한 사랑은 훗날 조선 최초 쿠데타를 일으킨 세조를 만들어 낸 원인이라 생각한다.


 세종이 편식으로 인해 병들지 않고 단 몇 년이라도 더 살았다면, 세자가 외롭지만 스스로 왕권을 지키고 형제들이 왕위에 눈독을 들이지 않도록 왕실과 경계를 두도록 조치했다면, 문종이 아버지 세종처럼 10년 전에 아들을 낳아 계유정난 당시 단종의 나이가 10살만 많았더라면 어린 단종이 숙부와 그에 동조하는 신하들 속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뿐더러 강원도 영월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대 재위 왕 중 최초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묘호도 없다가 숙종 때 복위되고 장릉이 조성된 비운의 왕 단종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를 지키는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어서 단종 복위까지 노렸지만 하늘의 뜻이 땅에 닿지 않고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사육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예정된 비극이었겠지만 단종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유배되거나 투옥되고 참수당했다. 심지어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을 역모를 했다고 모함하여 제거해 버리고, 문종의 아내이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도  조선 최초로 사후 폐서인이 되고 능도 개장하여 서인의 무덤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계유정난으로 시작된 세조의 즉위까지 관련된 대부분의 일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노산군일기와 세조실록은 확연히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관점이라는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게 할 정도로 죽은 자를 폄하하며 살아남은 자를 치켜세우는 것은 기본이며 누가 봐도 억지스러울 정도로 명분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문무가 출중한 세조라도 최초의 쿠데타를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따르는 한명회, 신숙주와 같은 신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세조가 즉위 초에 한명회를 장량, 신숙주를 위징이라 했던 것처럼 그에게는 없어서 안 될 존재였고 끝까지 신임했다.


 작은 태종이라 불리는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처가와 사돈까지 죽여버린 그의 할아버지와 달리 공신들에 대한 처우가 좋았으며 끝까지 믿고 중용했다. 특히 정사 이후 가진 크고 작은 술자리에서 대신들이 취기에 실수를 한 것이 있어도 문제 삼지 않고 용서해 주는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세조는 빈번한 공신 책봉으로 소수의 특권층이 세력을 불릴 수 있도록 했으며 한명회라는 청주 한 씨 가문이 외척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씨앗을 심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은 이미 세조 즉위 당시 거의 완성되었지만 완벽을 가하기 위해 수정되다 성종 때 이르러 반포되었지만 세조 때에 거의 모든 것이 완성된 상태였다. 17살의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비정한 숙부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세조는 조선 왕조 최고의 업적 중 하나인 경국대전 제작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도 자신의 업보 덕분에 가려져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한다.


 또한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꿈속에 죽은 현덕왕후가 나타나 괴롭혔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로 세조는 살아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승유억불 정책을 벗어나 불교에 심취하였으며 탑골공원에 있던 원각사를 창건하였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들렀던 상원사의 문수 보살상에서 세조의 어의로 추정되는 피고름 묻는 저고리가 발견되는 등 불안하고 의지할 곳 없는 마음을 불교에 의탁한 왕이기도 했다.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죄를 짓고 못 사는 것처럼 기골이 장대했던 세조의 말년도 병으로 인해 순탄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아들 예종이 즉위한 다음 날 죽었으며 죽은 후에도 조선 왕릉 중 최초로 석분과 석실이 없도록 하여 빨리 썩어 없어지기를 원했다. 조선 왕 중 후궁을 가장 적게 두고 정희왕후와 함께 묻혀 봉분은 하나면서 광중은 둘로 나눈 최초의 동원이강의 양식인 광릉에 잠들어 있는 세조, 그는 살아서도 최조 죽어서도 최초를 가장 좋아한 쿠데타로 즉위한 조선 최초의 왕이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시리즈

https://brunch.co.kr/@ilikebook/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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