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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14. 20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 : 세종 문종실록

능력만렙의 왕도 할 수 없던 일

우리나라 역대 왕 중 묘호에 대왕이 들어가는 왕은 단 세 명뿐이다. 광활한 영토 확장을 하여 중국마저 떨게 만든 북방의 강자, 고구려의 광개토태(대)왕과 삼국통일의 업적을 이룬 문무대왕, 그리고 조선왕조의 최전성기이자 훈민정음 창제부터 다양한 업적을 이룬 세종대왕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터를 닦았다면 태종은 기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세종대왕은 벽을 쌓아 지붕을 올려 문과 창을 내어 드라마 제목처럼 조선왕조가 역사라는 땅 위에 깊게 뿌리내리도록 만든 조선의  최고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다.


 적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하는 성리학 중심 정치 풍토 속에서 2번의 폐왕세자를 만들며 왕세자가 된 충녕대군은 2달 만에 왕위에 오르며 준비가 되지 않은 왕이라는 우려와 함께 그의 정치 인생이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태상왕에 오른 아버지 덕분에 재상들의 견제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내세울 줄 알았으며 성리학이 표방하는 덕치 정치보다 공정하고 모두에게 기본이 되는 법치 정치를 추구하였다. 항상 책을 가까이하며 배움에 힘썼고, 왕이라고 하면 모두가 싫어할 만한 경연을 가장 즐기며 신하 입장에서 준비를 미흡하게 하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게 만드는 질문을 잘하는 왕이었다.


 특히 신분보다는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으로 장영실 같은 천민 출신을 중용하여 측우기, 혼천의 등 과학기술 발전에 힘쓰며 농사와 천문 관측 등에 정확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뿐 아니라 군사 무기 개발을 통해 북방 영토 확장과 왜구 토벌 등으로 국방력을 강화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세종대왕은 인재를 귀히 여기었고, 적재적소의 자리에 앉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만개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최상의 성과를 만들도록 하였다. 고려 때부터 이어온 집현전을 조선 최고의 브레인 센터로 만들어 학문 연구와 발전의 중심이 되도록 만든 사람도 바로 세종대왕이다.


 똑똑한 왕을 모신 신하들의 삶은 정말 피곤하였는데 학문 연구에 힘쓰던 집현전 학자의 일상을 알려주는 신숙주 일화도 잠들어 버린 신하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자신의 곤룡포를 덮어준 미담이기도 하지만 이면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완벽히 아니면 선택을 하지 않았던 세종대왕의 성향이 신하들 마저도 완벽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고 실험하는 자세를 만들었기에 그 모든 업적도, 조선 전기의 사회, 학문, 기술, 국방 분야의 발전도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너무 많아 일일이 언급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명과의 외교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당시 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소국의 한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일을 자행했지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세종대왕조차도 명과의 사대 관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역대 최고의 업적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룩한 능력 만렙의 세종대왕에게도 명과의 외교와 같이 매정하다고 평가될만한 것이 있었다. 바로 세자빈 폐위에 관한 사건으로 무려 2명의 세자빈을 폐위한 왕이었다는 사실이다. 후대를 이을 왕자를 낳고 그 왕자가 잘 성장하고 후계자 수업을 받아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왕의 마지막 업적이었기에 자신은 준비되지 않은 왕세자였지만 자신의 아들 문종만큼은 완벽한 후계자 육성의 사례로 만들었다. 뛰어난 아버지를 본받아 문종도 훈민정음 창제부터 출판 등 완벽한 서포터를 활약하며 세종대왕의 업적 달성에 숨은 공신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렇게 완벽한 후계 구도를 만들었지만 그것을 뒤흔들 불행의 씨앗을 남겨 놓은 조선 임금 중 가장 자녀를 많이 둔 세종대왕은 자신은 18세에 아들을 낳았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 문종은 28세에 아들을 낳아, 단종이 10년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계유정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역사적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자녀에 대한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세조도 세종대왕의 차남으로 형인 문종과 함께 아버지의 업적을 도운 완벽한 서포터의 역할을 했던 사람이지만 왕위에 대한 욕심이 너무 많고, 아버지와는 달리 난폭하고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성리학의 예를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강조하던 당시 풍수지리설에 의해 묏자리를 정하는 것을 금기시했지만 뒤에서는 거액의 돈을 주고 명당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성행했던 조선의 풍습은 세종대왕도 마찬가지였다. 자손이 단명하는 자리라는 주장에도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헌릉 인근에 안장되었는데 이 묏자리는 ‘절사손장자’로 최악의 자리였다. 실제 문종이 단명하고 문종의 아들 단종도 죽임을 당하자 예종 때에 지금의 영릉, 여주로 이장하였다. 해동요순이라고 불리던 세종대왕도 죽음 앞에서는 백성들과 다름없는 인간이었다.


 아버지를 쏙 빼어닮은 문종도 성군의 기질을 보였지만 약 2여 년의 짧은 재위 기간으로 업적이 별로 없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종대왕의 핵심 지원세력이었다. 학문뿐만 아니라 무예, 천문에도 능통한 역시 호랑이의 아들다운 왕이었지만 병약한 탓에 일찍 세상을 떠나 어린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비운의 왕이었다. 문종에 이어 적장자 승계를 한 12세 어린 단종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아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정말 아쉬운 점이다.


 더 아이러니한 사건은 단종이 폐위되었을 때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이 폐세자에 대한 복수심이었는지 몰라도 단종의 죽이라고 청했다는 사실이다. 지켜주어도 부족할 판국에 자신의 큰할아버지 주청대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의 비극은 어쩌면 그 윗대부터 누적되어 왔던 비극의 씨앗이 싹튼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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