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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05. 20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 : 태조 정종 실록

순리를 거스르는 자

권력에 빌붙어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했던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의 연합 세력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망조의 기틀인 개경에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당연한 이야기를 한국사를 배우던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조선 건국 후 바로 한양으로 천도했다는 생각을 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었다. 최근 정부기관의 지방이전에 따른 잡음을 보면서 당시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나라의 수도가 이전하는 것을 직접 목도하는 기득권층은 얼마나 황당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을지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힘과 비전이다. 신흥 무인 세력으로 전승 무패의 신화였던 이성계 장군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선배이자 동료였던 최영 장군마저 숙청당한 상태에서 고려 조정에는 이성계 장군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쓰러져 가는 고려를 붙잡고 심폐소생술을 하던 공양왕조차도 이성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이성계의 말이 곧 왕의 말과 같았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조선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그가 꿈꾼 새로운 나라는 재상 중심의 나라였다는 것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볼 때  훗날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호기롭게 조선을 건국하기는 했는지만 고려의 수도, 개경은 아직 왕 씨 일가의 오랜 지배를 받아왔던 곳이자 예성강을 필두로 무역을 해온 그들은 서해를 지키는 용의 후예로 알려진 왕 씨 가문의 터전이었다. 언제든 반역이 일어날 수 있었고 신진사대부들도 후환을 없애고자 왕 씨 일가의 멸족을 주장했다. 이성계도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민심이 두려워 실행하지 못하다 한 점쟁이의 말이 논란이 되어 왕 씨 일가를 강화도와 거제도로 강제로 이주시키는데  말만 이주일뿐 배 밑에 구멍을 내어 그들을 모두 수장시켜 버렸다.


 과거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한양에서 조선의 시작을 알리며 개국의 기틀을 마련하던 태조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세자 책봉에 대한 것이었다. 개국 당시 환갑을 넘은 나이였던 태조에게는 이미 장성한 아들이 많았기에 성리학적인 방법으로 장자 승계를 하기에는 장남 이방우는 위화도 회군 때부터 이성계에게 반발하며 사이가 멀어진 상태였다. 그럼 당연히 차남 이방과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순리인데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이미 장성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이방과의 형제들보다는 아직 어린 이방번, 이방석 형제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재상 중심 정치를 하기 좋았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지는 신진사대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지만 형인 이방번이 아닌 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추대해 버린다.


 아버지를 따라 목숨을 걸고 반대 세력을 제거하며 조선 건국에 힘을 다한 이방과 형제들은 개국공신의 명단에도 없었던 그들이 순리에 어긋난 세자 책봉으로 받은 치욕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이 개국 당시 최소한의 유혈 사태로 마무리했다는 평가는 1,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미봉책에 불가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특히 2차 왕자의 난은 동복형제들 사이에서 일어나 태조마저 분노케 했지만 실세는 이전부터 확고하게 정해져 있었기에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의 도발은 아무 의미 없이 정리될 수밖에 없었다. 백주대낮에 당시 고려 조정의 최고 실력자 정몽주를 시해한 대담함으로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누르고 때를 기다렸던 이방원이 태조의 다음 왕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는 태종의 아들인 세종대왕도 자신이 4대 왕이 아닌 3대 왕으로 말했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태종 이방원은 왜 태조 다음이 아닌 정종 뒤에 왕위에 올랐느냐는 점이다. 여말선초의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이방원은 자신의 편과 적을 구별하기 위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잠잠히 있었다. 훗날 자신의 처가와 사돈까지 숙청하며 왕조의 기틀을 튼튼하게 만들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만큼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피아를 구별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앞에서 방패가 되어줄 존재가 필요했고 성리학적 적장자승계 원칙의 명분을 지킨다는 평가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힘없는 왕, 정종이 즉위했고 적자가 없었지만 첩의 소실이었던 불노를 세자로 추대하려다 동생의 움직임을 보고 상왕의 자리로 물러난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종에 대한 기록은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태조가 순리대로 적장자 원칙을 적용하여 왕세자를 책봉했다면 형제간 싸움으로 피를 부른 왕자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하는 욕심이 순리를 거스른 행동이 왕족으로 천수를 누릴 수 있던 삶까지 단축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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