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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Jul 27. 2023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 : 개국

고려의 충신,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힘

1392년, 고구려, 백제, 신라가 경쟁하던 삼국시대를 제패하여 중세를 지배하던 고려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조선이 건국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은 내가 공부했던 당시 국사 교과서에 단 줄로 표현되어 있지만 위화도 회군에만 집중되어 있는 역성혁명의 시작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부친인 이자춘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 이 씨 왕조라 폄하되어 불리었던 과거처럼 조선 왕들의 본관은 ‘전주’이며 고려 태도 왕건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큰 성읍이었다. 하지만 이자춘 일가는 전주의 관리와의 갈등으로 큰 성읍을 뒤로하고 고려의 동쪽 끝, 동북면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동북면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 여진족이 출범하는 목숨이 위태로운 땅으로 고려 조정조차도 관리하지 못하던 무늬만 고려의 영토였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자신의 가족과 따르는 무리의 생계를 책임지고 여진족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며 동북면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무력과 재력, 리더십 측면에서도 아들의 조선 건국이 무리가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이자춘의 행적을 보고 그의 아들 이성계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기 때문이다.


 변방의 시골 촌뜨기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무패의 전공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여 고려 말 핵심 권력층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무신의 난 이후 원 지배기에 핵심세력이 되어 버린 권문세족에 허수아비인 고려 왕을 대신하여 온갖 정사를 결정하고 자신의 이속을 챙기기에 급급했던 그들과 달리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의 추앙을 받을 만큼 당시 힘없고 부패한 권력층을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수많은 전장을 거치며 겸손의 미덕까지 체득한 이성계는 단순에 민초의 지지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권력 유지가 지상 최대 과제였던 고려 말 권문세족들에게는 눈에 가시였을 뿐이다. 사실 이 당시에 이성계의 마음속에도 왕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을 절대 표출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원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개혁군주 공민왕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대를 이으려는 비상식적인 행동들과 신돈의 부패, 그리고 공민왕 자신이 총애하던 홍륜 일당에 의해 무참하게 시해당하면서 ‘용의 후예’인 고려 왕조의 몰락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출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우왕이 후견인 이색의 뒤에 숨어 왕위에 오르면서 그 균열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이제 고려는 더 이상 용의 후예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고려 지배층의 주장을 반박하는 ‘4 불가론’을 내세우며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의 정점을 찍은 이성계는 최영 장군과 정몽주를 제거하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에게 왕위를 받고 몇 번의 거절을 하였지만 주변의 간곡한 청으로 인해 마지못해 수락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선의 태조로 등극함과 동시에 고려 왕조 34대, 475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유혈혁명, 역성혁명인 조선의 건국은 최소한의 피를 본 것으로 평가되지만 시작부터 명분에 집중한 한계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고려 충신들의 저항을 회유하고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 속에서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도 사람이기에 고려 말 자신을 무시하고 귀양 보내 버린 고려의 신하들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을 것이다. 공양왕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정몽주를 살해하는 과정 속에서도 가장 아낀 아들 이방원과 사이가 틀어진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이방원 혼자 독단적인 결정을 하고 백주대낮에 선죽교를 지나는 권력의 핵심이었던 정몽주를 살해할 수 있었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속 에드워드 와그너의 주장에서 조선의 건국에 대한 파란 눈 이방인의 놀라운 안목을 알 수 있다. “조선은 새로운 건국이라기보다는 개선에 가까웠다"라는 그의 말처럼 문반과 무반의 양반 지배층은 구성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고 항상 권력에 대한 욕망과 부패를 일으키는 암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전성기는 개국 당시 이미 장성한 아들 이방원과 이성계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세종 때까지라고 생각한다.  절대 조선 왕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종 이후 그의 아들 세조에 의해 조카를 살해하고 왕좌에 오르는 반정을 시작으로 몇 번의 반정, 사회 등의 난리를 거치며 성리학만을 강조했던 조선의 모습은 정도전이 생각했던 관료의 나라를 꿈꾸며 개국했지만 개혁이 아닌 개선이란 한계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처럼 500년 후 조선 왕조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고려 말의 모습보다 더욱 참혹한 모습을 보이며 외세의 허수아비로 백생들의 삶은 고려하지도 못하는 그들이 숭상한 성리학이 보인 현실에 대한 무감각함이란 최악의 한계를 보였다. 만약 그들이 성리학 대신 현실을 직시하는 학문으로 나라를 보살폈다면 조선 왕조의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본다. 이것이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는 준비할 수 있게 만드는 역사를 반드시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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