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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Aug 17. 2023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먀오족은 진정한 고구려의 계승자이자 후손이다

 ‘고구려’라는 국명은 고려 또는 구려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구려는 ‘골’(마을, 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는 높은 성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기개처럼 고구려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국명도 이런 고구려의 기개를 계승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려는 단순히 중세 시대로의 전개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쟁의 신이었던 당태종도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그 누구보다 강하고 힘을 모아 역경을 이겨내는 고구려의 정신을 물려받고자 한 것이다.


 한국사를 좋아하는 나는 역사적 사건에 있어 몇 가지 아쉬운 점과 만약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이다. 당시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고구려 개마무사는 지금의 K2 흑표 전차처럼 강력한 전장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하며 적국에게 엄청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고구려의 상징이자 자랑이었을 것이다. 이런 고구려도 국력이 쇠하며 내분과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구려 최고의 대막리지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의 내분으로 인해 더욱 급격히 일어난 사건이다.


 고구려 멸망 이후 연남생을 비롯한 당시 연개소문의 아들들과 왕족, 귀족들은 당나라의 포로로 끌려갔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많던 고구려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은 가시질 않는다. 일부는 신라나 백제, 당시 배를 타던 사람들은 왜국으로 이주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평양이나 한반도에 거주하던 고구려 백성들은 신라나 백제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만주 쪽에 거주하던 고구려 백성들은 그마저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문자 그대로 흩어진 사람들이란 뜻의 ‘디아스포라’라는 말처럼 고구려를 떠나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은 훗날 발해를 건국하는 세력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당나라로 끌려가는 포로 신세였다. 망국의 설움을 뒤로한 채 요서로 이동하는 그들의 행렬은 나라가 없는 자들의 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일부는 평양에서 배를 타고 산둥반도로 이동하여 당시 야만족의 땅으로 치부했던 중국 남서부까지 끝없는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물론 그 땅도 이미 다른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고구려 유민들은 주인 없는 땅이 나올 때까지 깊고 깊은 산속까지 흘러갔다.


 고구려 유민들이 이동하기 쉬웠던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이주했던 곳에서도 노예나 소작농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고구려의 땅을 침범할 수 없는 높은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는지 중국 내륙의 정세를 파악한 후로는 남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하며 주인 없는 땅을 찾아 헤매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고구려의 자존심은 척박한 땅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주인이 되지 않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노예나 소작농의 삶에 만족할 고구려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족의 간섭이 최소화된 곳에 터전을 잡고 뿌리를 내리며 과거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개마무사의 기개를 전승한 사람들이 바로 먀오족, 묘족이다. 단순한 추정에 의해 고구려 유민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복장, 문화, 유전자 등 많은 항목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먀오족은 문헌 상에서도 송나라 이전에는 없던 사람들이다. 한족이 아닌 민족은 모두 야만인으로 치부하던 중국의 한족 국가에서 고구려 유민은 당당했다. 한족에게 절대 동화되는 않은 먀오족은 ‘생모’라고 하며 중국어를 사용하는 ‘숙묘’와 구별되었고 두세 번의 강을 건너며 자신들의 글을 잃어버렸지만 자신의 아들, 또 그 아들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구전으로 자신들의 조상과 뿌리를 기억하고자 했다.


 위대한 시조 주몽설화에서처럼 먀오족만 유일하게 난생설화를 가지고 있으며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처럼 먀오족의 시조 어머니도 봄꽃부인인 공통점이 있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 설화에 나오는 신단수와 같은 나무를 신성시하고 고구려 사람의 복장인 궁고, 주름치마, 절풍 등도 고구려 사람만이 가지고 있던 특징이었다. 지리적 차이로 온돌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 먀오족은 고구려 유민임이 확실하다. 특히 해와 물, 그리고 새를 숭상했던 고구려, 삼족오를 통해 하늘과 땅을 연결하던 그들의 기개는 절풍을 새의 깃털로 장식하는 것으로 이어져왔으며 먀오족 또한 깃털 장식을 하는 문화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당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이 한족에 동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먀오족은 어떤 외압과 역경 속에서도 절대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불굴의 민족이자 우리의 자랑스러운 고구려 유민으로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부인의 아들 동명성왕, 고주몽의 후손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중국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뿌리를 내린 것이지 중국에 동화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말을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중국의 말과 글을 사용하지만 그 속에는 중국의 정신이 아닌 고구려의 정신과 기개가 담겨 있다. 그래서 한족은 먀오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고구려-구려-고려-고리로 나라의 이름은 변했지만 생활 속에서 문화 속에서 고구려의 정신은 대를 이어 전해오며 변하지 않은 먀오족의 모든 것이 되었다. 먀오족 그들은 진정한 고구려의 후손으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이자 슬픈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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