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생명력 더하기
“모든 초고는 쓰레기이다”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을 통해 퇴고의 중요성과 초고에 대한 부담감을 줄일 수 있지만 글쓰기는 전문 작가이든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한 초보 작가이든 누구에게나 각자의 이유로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공저 출판 작업을 해본 경험은 퇴고가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알게 했다.
사실 초고의 작성부터 퇴고의 과정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어차피 수정되어야 할 운명을 지닌 초고이지만 초고가 쓰이지 않는다면 퇴고는 존재할 수도, 과정이 진행될 수도 없다. 쓰레기라는 별명을 가진 초고도 쓰여야만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어 어쨌든 쓰여야만 한다. 그래야 개고와 퇴고의 과정이 존재한다.
정석적인 퇴고의 과정을 단 한 번만 해보았지만, 내가 경험한 퇴고는 정말 괴롭고 힘들었다. 퇴고가 너무 어려워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출간 계획이 확정된 상태에서 내가 포기하면 다른 분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마지못해 퇴고를 하고 또 퇴고를 했다. 퇴고는 일회성이 아닌 퇴고를 해도 끝이 없는 과정이라 퇴고를 하는 순간에도 이것이 맞는지 나 스스로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내 글의 첫 독자인 나 스스로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글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한 글이 될 수 있기에 퇴고의 과정을 통해서 먼저 나를 만족시키고자 했다. 맞춤법과 문맥에 맞는지 확인하는 것을 기본으로 독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진정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리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글의 전개가 진행되는지 읽어보고, 필사하며 퇴고의 퇴고를 반복했다.
퇴고는 그 끝이 정해지지 않았기에 더 괴롭고 힘든 과정이다. 유명 작가도 초고보다 더 많은 퇴고의 분량을 극복하고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작품이 많다는 사실만 보아도 퇴고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주변에 출간하신 작가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퇴고는 정말 힘든 과정이지만 퇴고를 통해,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경험할 수 있다.
일단 쓰인 초고를 산산 분해하여 새로운 글로 탄생되는 퇴고를 통해 작가는 그 글의 첫 번째 독자로 새로운 생명력을 지닌 글을 읽는 특권을 가진다. 그 특권이 퇴고의 괴롭고 힘든 과정을 거친 보상이 되기보다는 두 번째 독자를 위한 진심을 더하고 글의 생명력을 전하는 일이다. 퇴고의 끝은 없지만 작가를 만족시키지 못한 퇴고는 없을 것이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도 무엇을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써야 한다. 부담감에 서러움이 밀려와도 울지 말고, 울 시간에 써야 하는 것이 글쓰기이다. 초고가 없는 퇴고는 없으며 초고를 통해 새롭게 다시 쓰는 개고의 과정도 없다. 초고가 아무리 쓰레기일지언정, 초고가 있어야 개고와 퇴고도 존재하기에 일단 써야만 한다.
무엇이든 좋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검은 글자로 채워지는 초고는 어차피 수정되고 분해되어야 할 운명이지만, 쓰여야 한다.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쓰여야 하는 초고의 입장에서 반발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초고는 산산이 분해되고 재조립되어 퇴고라는 눈물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무엇인가가 된다. 퇴고의 흔적이 출판사에 전달되어 독자에게 읽히는 책이 되는 순간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퇴고는 초고를 가지고 글의 생명력을 더하는 과정이자, 독자에 대한 예의를 확인하고 첫 번째 독자를 만족시키는 과정이다. 그리고 수 십 번, 수 백 번의 퇴고를 거쳐 땅속 깊이 묻힌 다이아몬드를 찾는 것처럼 지루하고 반복적인 행위가 지속됨에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초고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 이런 퇴고의 마법이 내 글에 가치를 더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퇴고를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