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사연
부산 보수동에는 오래된 책방 골목이 있다. 요즘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거나, 전자책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곳을 예전처럼 자주 방문하지는 않지만 나에게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을 주는 추억이 담긴 책을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곳이다. 보수동 책방 골목은 과거를 회상하게도 하지만 무질서 속 질서를 느끼게도 해준다. 천장 높이까지 쌓인 책들이 가게 입구부터 안쪽까지 있는 책방에 들어가면 온갖 책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느낌이 들지만 책방 사장님에게 책 이름을 말하면 신기하게도 도서관 서가에 진열된 책을 찾아 주시는 사서 선생님보다 더 빠르게 찾아주신다.
이 신비한 광경의 비밀은 나에게는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책방 사장님에게는 질서 정연하게 정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것처럼 책에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통해서 책은 고유한 숫자를 갖는다. 이 숫자는 책마다 고유한 번호를 가지고 있어서 국제표준도서번호를 통해 어느 출판사에서 출판했는지 등에 대한 정보는 물론 책을 분류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된다.
지금과 달리 종이가 귀한 시절에는 책을 대나무나 갈대를 이용해 만들었고,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진귀한 것이었다. 물론 지배층을 제외하면 글을 아는 사람이 드물기도 했지만, 책은 소수의 선택받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혁명을 통해서 책을 폭발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더 이상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으로 변모해 가면서 책의 위상은 점차 하락하게 되었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책을 구할 수 있지만 모든 책이 그런 것은 아니다. 특히 '절판'된 책은 웃돈을 주어도 구할 수 없는 귀한 몸이다. 특히 최초 책을 쓴 작가님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데 작고하셨다면 책의 가치를 추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거 유럽의 한 헌책방에서 구입한 구텐베르크 성경 초판본이 엄청난 가격에 경매에 나왔다는 것처럼 출판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희귀함이란 가치는 시간을 거스른다.
수많은 종류의 책 속에는 온갖 지혜가 담겨 있지만 그 안에는 책과 관련된 사람들의 사연도 숨어 있다. 첫사랑을 알게 해 준 시집, 작가의 꿈을 꾸게 해 준 소설책, 다양한 장르의 책 속에 다양한 사건과 사연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의미 있는 책이 있는데 한 번도 뵙지 못한 장인어른에 관한 사연이 깃든 책이다. 나의 장인어른은 내가 졸업한 학교의 교직원이셨는데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나름 도서관에 자주 갔었기에 한 번쯤은 스쳐 지나쳤을 것이라 믿고 있다.
책을 좋아하셨던 장인어른의 유품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입문>이란 책인데 1978년에 발행된 것으로 무려 46년의 나이를 가졌다.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 나를 위로하고 심리학 공부의 세계로 이끌어 준 그 책이다. 물론 나는 다른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을 읽었지만 그 속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오른쪽부터 읽어야 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검색창에 찾아도 정보가 없는 한국홀프운동계획에 의해 동서문화사가 발행한 특별판인 이 책은 신기하게 뒷면지가 2번 있는 책이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위해서 더 이상 책을 수집하지 않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책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지만 이 책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나만의 사연이 깃들어져 있다. 오랜 시간을 지닌, 초판과 절판이라는 희귀성을 가져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사연의 특별함이 주는 가치가 있는 책이기에 더더욱 애착이 간다. 이 책에 대한 사연만큼 나와 아이 사이에도 이런 특별한 사연 하나는 생기도록 더욱 사랑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