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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 Jun 17. 2024

위대한 대자연, 그 속에 사는 작은 인간의 삶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코로나19가 득세하던 시절 잠시 주춤했지만 매년 겨울이 되면 눈을 보기 위해서 눈의 나라, 홋카이도로 행한다. 저마다 여행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저 눈을 보기 위해 홋카이도를 여행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고 부르며 눈을 극혐 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눈을 볼 때마다 마음속에 작은 평화가 일어난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인 홋카이도를 여행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는 고요한 평화가 가득하다.


 내가 본 홋카이도의 순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것을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일 년 동안 가슴속 작은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매년 홋카이도의 눈을 보면서 점점 북쪽의 더 큰 대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도 좋고, 북유럽의 피오르드 절벽도 좋았지만 북극곰이 사는 북극의 밤하늘, 다채로운 색을 뽐내며 춤추는 오로라가 있는 에스키모의 땅을 보고 싶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호시노 미치오의 편지 이야기를 책 속에서 알게 되었고, 나도 그처럼 일면식도 없는 낯선 땅에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쉬스마레프 마을 촌장님께 보낸 편지는 다시 호시노 마치오에게 돌아와 알래스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에게도 호시노와 같은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원시인의 삶을 꿈꾸는 새로운 기회를 누리며 현대 문명 속에 사는 원시인이라는 꿈으로 연결되었다.



 아직 북녘의 추위를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지만 극도의 추위는 한없이 짧은 알래스카의 여름을 더욱 빛나게 하는 조연이라는 사실이다. 추위를 피해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카리부(순록)의 무리를 따라 인간도 이동한다. 왜냐하면 카리부는 이 땅에 사는 에스키모에서 생명과도 같은 밥줄이기 때문이다. 카리부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동시에 죽음이 있다. 하지만 카리부가 없는 곳에는 생명도 없고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탐욕으로 지구는 병들고 있고 호시노 미치오가 그토록 사랑했던 쉬스마레프 마을은 해수면이 높아져 그들의 삶은 혼란 속에 있다. 10월이면 꽁꽁 얼던 해수면은 크리스마스가 되어야 얼기 시작하고, 120cm 넘게 얼었던 바다는 30cm 정도도 안 되어 금세 녹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생명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땅에는 생명의 기운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지금 알래스카는 현대화와 개발이라는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개 썰매보다는 스노모빌의 편리함이 선호하는 알래스카에서는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고리타분한 일이 되어간다. 살을 에는 영하 50도의 추위도 현대 문명의 기술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지만 진정한 알래스카의 주인은 영하 50도의 추위 속에서도 살아남는 법을 알고 극한의 자연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수 있는 지독한 인내의 사람이다.


 이런 인내는 미개함으로 치부받고 문명화되지 않은 존재로 수많은 차별을 받아 왔지만 알래스카의 주인은 절대 자본주의 세력이나 현대 문명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없다. 석유 개발 사업 승인으로 인해 땅을 소유하고 매매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알래스카에서는 그 누구의 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의 땅일 뿐, 한 사람의 땅은 알래스카에는 없다. 이것이 알래스카의 주인, 에스키모의 방식이고 그들의 법이다.


 에스키모에 대한 이야기 중 여행자들에게 아내를 내어주며 하룻밤을 보내게 한다는 문화를 부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이방인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하지만 에스키모가 아내를 내어주는 이유는 외부와의 교류 없이 점점 근친혼에 가까워지는 자신의 꽉 막힌 혈통에 숨을 불어 놓아 자신의 문화와 풍습을 지키기 위해 다양성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에스키모가 사는 공간은 자연이다. 자연 속에 사는 에스키모는 극한의 추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추위에 맞게 사는 법을 찾아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을 고수하며 추위와의 동거를 수용한다. 자연은 다양성 그 자체이다. 자연 속에서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기에 자연은 자연스럽게 다양성의 천지가 된다. 자연에는 약육강식이라는 법칙도 존재하지만 그 위에 다양성의 법칙이 존재하기에 강자만의 자연이 아닌 약자를 위한 자연도 있는 강하고 포용력 있는 자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연은 살아 있는 거대한 생명이자, 죽음마저도 또 다른 생명의 끈으로 연결시켜 주는 생명의 마법사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것을 뛰어넘어 자연을 존경하며 자연의 방식에 순응하는 지혜를 아는 에스키모는 자연 속의 자연이다. 자연은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한없이 작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도 자연이다. 이런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아는 에스키모는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며 자연을 온전히 누리며 살 자격이 있는 존재이다.


 나도 그들처럼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고 싶다. 눈보라가 칠 때 숨죽여 성난 자연이 화가 풀리기를 기다리고, 자연이 따사로운 햇살을 내비치며 자연의 열매와 카리부를 허락할 때 욕심내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가지려고 하는 자제력의 됨됨이를 가진 현대 문명 속의 진정한 원시인이 되고 싶다.  


https://brunch.co.kr/@ilikebook/698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 호시노 미치오 / 청어람미디어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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