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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앤나 Oct 30. 2020

다 때가 있다, 도서관에 다 있다

나의 시시한 시절이 그곳에 있다

다 때가 있다.
도서관에 다 있다.


 

<시인할매>는 평생을 까막눈으로 살아온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고 시를 쓰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전남 곡성에서 '길작은도서관'을 운영하던 김선자 관장은 어느 날 책 정리를 도와주던 할머니들에게 거꾸로 꽂힌 책을 바로 꽂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올바르게 꽂혀있던 책들이 뒤집어서 꽂히기 시작한 것. 이후 김선자 관장은 도서관의 한글 교실을 열었다. 한 분, 두 분 할머니들이 찾아왔다. 평균 연령 80세, 학교 문턱도 밟아보기 힘든 시대였다. 배곯고 서글펐던 시절, 밀려들었던 설움을 한 자 한 자 쓸려보냈다. 이듬해부터는 시도 썼다. 이면지에, 달력 뒷장에 꾹꾹 눌러왔던 설움이 적혔다. 그렇게 2016년 <시집살이 詩집살이>라는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버스를 타고 간판을 읽고 우체국에 갔다.

책을 바로 꽂으니 삶이 혼자 서더라.     



이종은 영화 감독은 시집을 읽고, 할머니들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 호기심이 일어 마을을 찾는다. 전남 곡성군 입면 서봉마을. 작은 마을엔 80가구에 100명 정도가 살며 대부분 홀로 사는 할머니들이다. 이 마을에 2004년 목사 남편과 함께 이사 온 김선자 관장이 주택을 개조해 '길작은도서관'을 열었다. 감독은 도서관장을 찾아 허락을 구한 후, 마을의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설명한다. 그로부터 꼬박 사계절을 마을 회관에 머물며 글을 쓰고 시를 짓는 풍경을 담는다. 처음엔 뭘 이런 걸 찍냐며 손사레를 치던 할머니들은 시간이 흐르며 감독의 손을 잡아끌었다. 감자를 찌고 옥수수를 삶아 건네는 덕에, 카메라를 몇 번이나 내려놓아야 했다.     



김선자 관장의 말마따나 평생 호미는 잘 쥐어도, 연필은 잘 못 쥐었던 할머니들이었다. 진도를 빠르게 나가는 것은 애초부터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대신 더 신명나게 글씨를 깨칠 수 있도록 했다. 보기 좋은 그림책과 읽기 좋은 동시집을 골라들었었다. 그렇게 시로 배웠고, 시로 적었다.     



"방바닥에 손가락으로 한번 적어보고, 그담에 연필로 한번 쓱쓱 썼지"

- 양양금 할머니(시인),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마음이 달그락설움이 씻긴다

여름비가 그치고 할머니들이 도서관에 모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책상 위의 풍경이 조금 낯설다. 집에서 부쳐온 파전, 비닐봉지로 감싼 연필. 달력 몇 장 깔아놓고 담소를 주고받는 모습 너머 부엌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도서관이니만큼, 찬장과 그릇장이 비추는 모습이야 새삼스럽지 않지만, 싱크대 위로 올망졸망 놓인 책들이라니. <나는 이야기 입니다> <새를 사랑한 새장>과 같은 커다란 동화책들이 그릇이 있어야 할 자리를 채웠다.     



“이 눈이 쌀이라믄 좋것네.” (박점례, '겨울2')     

“소금에 국을 끓여도/그리도 맛나.” (조남순, '가난')     



굶길 수가 없어서, 굶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해가 넘어가도록 밭일을 하고 돌아와 허리도 펴지 못한 채 저녁을 지어야 했지만, 정작 그 속은 든든히 채워본 적 없었다. 전쟁통이거나 시집살이거나 혹은 없던 시절이었거나, 뭣이든 볕들 날은 아니었다. 식구들 배곯지 않게 홀로 가슴 곯았던 부엌에 동화책과 시집이 들어찼다. 지난날 설움을 씻어낼 수 있을까. 그 시절 사무치게 그리웠던 품처럼 책 자락이 부엌을 감쌌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보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모든 날에 있어 줄 수 없어 도서관을 보냈는가.          





거리로 나온 도서관의 발자국

관장과 할머니들은 마을 담벼락에 그림을 그린다. 스케치북에 그렸던 그림들이 밖으로 나온다. 나의 담장은 거리의 풍경이다. 속에 담아두었던 말은 꽃으로, 눈송이로, 해바라기로 세상에 피어난다. 연필 쥔 손을 세상에 내민다. 세상과 나누는 악수가 정겹다.     

관장은 할머니들이 시를 쓴 도자기로 구워낸다. 추석 명절에 고향에 오는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말이자 세상에 남기고 싶은 시들이다. ‘나는 고생을 많이 했는디 니기들은 고생하지 말아라’ ‘어찌게 산지도 모르고 살아븟다. 우리 새끼들 건강하게 충실하게 살아라’ 마을 어귀로 시작하는 길가에 놓고, 담벼락에 걸쳐둔 삽 위에 놓는다. 거리로 나온 도서관의 발자국이 손자 손녀의 사진으로 찍힌다.     



가볍게 흩어지면 멀리에 닿을까

날이 좋으면 관장과 할머니들은 원두막으로 간다. 서로 둘러앉아 책 몇 권 펼쳐두고 시를 쓰고 낭송을 한다. 차례로 감상을 나누며 박수를 친다. 이 계절에 동네에서 가장 좋은 곳에는 책이 있고, 종이가 있다. 그곳들은 모두 도서관이 된다. 아마도 가장 작다는 '꼬마평화도서관'보다 더 작다. 평화에 관련한 책을 서른 권 남짓 두고,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는 모임을 하면 어디든 개관할 수 있다는 사랑스러운 도서관보다 조금 더 귀엽다. 어느 식탁, 마루, 평상, 몇 권의 책과 종이를 둘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면 한 줄의 시가 더 적힐까. 파리 세느 강변의 오래된 서점이 구석구석 타자기와 종이를 두고 책을 펼치고 글을 쓰기를 권하는 것처럼, 100여 년간 수많은 작가들이 탄생한 것처럼, 도서관이 책과 종이로 더 가볍게 흩어진다면 마을 예술가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까.     



부엌, 담벼락, 원두막.

혼자였던 날과 함께하는 모든 날이 詩다.     



세상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고 하지만, 모든 곳에 도서관이 있어준다면. 누구나 그럴 수 없는 때가 있다. 시대, 가족, 건강, 수많은 이유로 때를 놓쳐버린 날들이 있다. 도서관은 처음을 다시 알려주는 곳이다. 

    




"할머니들에게 책 한 권 끝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재미있게 수준에 맞춰서 공부하기로 했죠.” 김선자 관장     



빠르게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배우느냐가 더 중요했다. 여든 남짓 할머니들은 비가 쏟아지는 날도 도서관을 찾아오고, 썼다 지웠다 글씨를 깨우치며,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시를 낭송했다. 재밌어서다. 다정해서다. 배우지 못했던 시절의 위로를 희망으로 덮을 수 있었다.     

속도와 규칙이 아닌 의미를 바탕으로 배워가는 것, 도서관에서라면 가능하다.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곳은 많지만 당연한 곳을 알려주는 없으며, 빠르게 배우지 않아도 되는 곳은 더욱 드물지 않던가. 학교와 학원에서는 배우지 않는 시시한 것을 도서관에서 배울 수 있다면 어떨까? 새삼 알려주지 않지만, 알아두면 좋은 것들에 대해서.


     

바느질을 배운 것은 리스본에서다. 에어비앤비로 오랫동안 머물었던 동네에서 짜투리 천조각을 고운 색깔로 채우는 법을 배웠다. 물론 학교의 가정 수업도 있었지만 대개는 평가를 위한 시간이었다. 버선이나 주머니 같은 정해진 소품을 흠 없이 완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주어진 시간 동안 집중해서 만들면 얼추 완성은 했지만, 소재를 고르는 재미나 모양을 바꿔가는 즐거움을 느끼진 못했다. 마리아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은, 꽤 느렸다. 손바닥만한 천을 고르는 데도 오래 걸렸다. 조각난 천의 쓸모와 감촉에 대해 들으며, 그것을 채워갈 실의 색깔도 골랐다. 서로 비슷해 보이는 초록색을 두고 함께 오래 들여다봤다. 모양에 따라 어울리는 실을 고르고, 도중에 다른 색깔로 바꾸고 싶으면 풀어내도 되었다. 꿰어가다가 엉키면 끊어냈지만 점수가 깎이는 행동은 아니었다. 조금 더 마음에 드는 그림으로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밤마다 천 조각이 소복이 쌓였다.      



비단 글씨와 바느질뿐일까.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다. 삶에서 거꾸로 꽂는 것들이 있다. 젓가락질, 자전거 타는 법처럼 때를 놓쳐 다시 배우기 머쓱한 것도 있다. 오늘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계절'이라는 과목을 배운다. 주변의 모습을 바라보고 변화를 느끼며 생활습관을 배우는 것이다. 어른도 필요하다. 지난날 알지 못했던 것과 지금이라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나이와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계절, 청년이 되고, 독립을 하고, 어떤 식물이나 동물과 살아가며 달라지는 날들에 어우러지는 법을 알려준다면, 세상 어디도 이런 수업은 없겠지만 가족과는 나눌 법한 말이지 않던가. 가족과 세상 사이, 도서관이 있어준다면.     





다 가 있다때가 ’ 있다.

누구나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있다. '11월, 내가 알려주고 싶은 것'과 같은 주제로 주민들의 대답을 모은다면 어떨까? 한 해가 가기 전에 정리하면 좋을 것, 늦가을 읽기 좋은 시, 이 계절에 떠나기 좋은 여행지와 밤이 길어질 때 숙면을 할 수 있는 방법, 이보다 더 특별한 이야기가 모일 수 있다. 도서관의 입구, 홈페이지, 메신저, 언제든 열려있는 도서관으로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대답들이 도착할 것이다. 그 중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사람을 초대하여 주민과의 대화를 이어가도 좋다. 혹시 알까. <뉴욕도서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 처럼 흥미롭고 애틋한 시대의 기록이 적힐지. 한 줄에서 얻을 수 있는 영감과 이어질 이야기도 기대가 된다.     



글자를 모르니까 친구들하고 놀다가도 / 글자도 모른 것이 까분다해 기가 팍 죽었다 (양양금 '나의 한글')     




'길작은도서관'은 할머니와의 수업 외에도 마을의 꽃과 나무로 콜라주 작업, 도서관 고양이의 일상 그리기, 마을 지도 만들기, 마을 한 바퀴 돌며 동시 짓기 등의 활동을 한다. 일상이 재밌을수록 배우고 싶은 것들은 많아질 것이다.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면 가슴에 묻었던 시를 다시 꺼낼 수 있을 것이다. 글자를 모른다고 팍 죽었던 기가 시로써 살아난 것처럼.      



다 때가 있고, 도서관의 때는 매일이다. 오늘 우리의 도서관은 무엇을 알려주고 있나, 나는 무엇을 배워볼까. 세상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詩詩한 것이 도서관에 있다.      



사박사박/장독에도/지붕에도/대나무에도/걸어가는 내 머리 위도/잘 살았다/잘 견뎠다/사박사박 (윤금순, ‘눈’)




*월간 국회도서관 11월호에 썼어요 :) 조금씩 추워지는 계절, 눈가에 포근히 내려앉는 시가 생각날 것 같아요. 사진은 네이버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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