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가 모퉁이, '벌써'가 사라지는 곳
언제부턴가 자주 하게 되는 말이 있어요.
벌써 이 시간이네, 벌써 목요일이야, 와 벌써 가을이야, 벌써 몇 살이 되었구나.
문득 달력을 보고, 시계를 보며, 거울을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우리는 '벌써'를 내뱉죠.
마치 시간이 허락도 없이 앞서 달려간 것처럼, 우리를 두고 먼저 도착해버린 것처럼.
'벌써'라는 말 속엔 묘한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놀라움, 아쉬움, 당혹스러움, 그리고 어쩌면 약간의 허탈함까지. 시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쳐버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벌써'라고 말하는 순간만큼은 시간을 온전히 느끼고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을 붙잡아 세우고, 돌아보고, 확인하는 순간. 그리고 알게 됩니다. 벌써의 뒷면은 '아직'이라고. 아직 시간이 남아있고, 아직 이 계절에 머물러 있고, 아직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오늘 들려드릴 서점을 다녀온지도 벌써-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서점은 제가 다시 갔을때 '벌써'라고 하지 않을거에요. 서점의 시간 속에서 저는 아주 작은 찰나에 불과하니까요. 잠깐 어디 다녀온 사람처럼,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그리고는 맞할겁니다. 아직 여기 있어요, 아직 그대로예요, 아직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고요. (그 서점의 간판에는 정말 이렇게 써있답니다. 아직, 우리 여기있다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기보다, 오랜 기억이 쌓여온 곳.
시간은 분명 흘러가지만, 동시에 분명히 쌓이기도 하는걸 보여주는 곳.
우리가 '벌써'를 되뇌며 허둥대는 동안, 묵묵히 '아직'을 지키고 있는 곳.
오래된 서점에 가기 전에, 잠깐 숨을 고르며 쉬어갈까요.
오.래.된 곳을 가기 위한 통로거든요.
게다가 아주 아름다운 동네이니 마음에 드실거에요. 세계 3대 미항, 나폴리의 도서관에서 시작합니다.
이탈리아에서 로마, 피렌체에 이어 세번째로 규모가 큰 나폴리국립도서관입니다. 이 도서관에는 파피루스가 무려 1,800권이나 있답니다. 파피루스는 Paper의 어원으로, 이집트 산 식물인데요, 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이 파피루스 줄기를 얇게 갈라서 두들겨 건조시킨 후 글을 썼답니다. 파피루스에는 당시의 처방전이나 시, 레시피, 편지, 기도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기록이 적혀있고, 그래서 시대의 다큐멘터리이자 유물과 역사로 불린답니다.
이건 화산재에서 발굴한 파피루스이고요 무려 천오백년간 묻혀있던겁니다. 지금은 나폴리도서관에 해석을 위한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재밌는건 파피루스의 한글자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고대 글자에 대한 식견 넘어 수학적 지식이 중요한데, 그도 그럴 것이 파피루스의 평균 길이는 10m에 달하고, 일부는 20m가 넘기 때문이죠. 그래서 원주와 두께로 두루마기 길이를 계산하고, 중앙을 향한 각 원주의 크기를 맞춰가며 조각을 배치해야 하죠.
뿐만 아니라 기후와 환경, 과학 실로 모든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요. 당시에 잉크는 숯과 꿀로 썼는데, 파피루스에 남은 흔적과 곰팡이로 당시 기후와 저장 습도 그리고 보존방법을 알아가야 하고, 때로는 겉면을 다 쓰고, 뒤를 다시 써서 '시간이 겹쳐진' 텍스트도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파피루스를 기후의 일기이자, 과학의 일기, 모든 것의 일기라고 부른답니다. 옥스퍼드대 고문서학자 Dr. Eleanor Dickey는, 파피루스의 곰팡이 분포와 잉크 퇴색 패턴은 과거 사막 지역 습도 변화를 말해 주는 ‘기후의 일기’라고 일컫었죠.
도서관은 말합니다.
파피루스가 수천 년 동안 ‘해석해야 하는 보물’이 된 이유는, 그 위에 남겨진 모든 흔적이 하나씩 겹쳐져 그라데이션처럼 이어진 기록이기 때문이라고요. 그리고 덧붙이죠. 일상 속에서도 나만의 그라데이션을 만들어보라고.
덧쓰인 시간, 오류, 수정, 반복.
결국 그것들은 하나의 긴 이야기가 되죠.
되풀이되는 실수, 다시 시도하는 용기, 겹쳐지는 삶의 층위.
오래된 것들을 들여다보면 알게 됩니다. 어느 것도 완전히 하나의 이야기로 닫히지 않는다는 걸요. 선명한 경계 없이 서로 스며들고,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모호한 채로 이어지는 색깔들. 한 시절이 천천히 다음 시절로 물들어가는 계절의 그라데이션처럼. 삶은 지워지는 게 아니라, 조금씩 겹쳐지는 것이니까요.
단 하나의 오타조차 삶을 증명하는
증언이 될 수 있다면
남겨진 흔적, 고쳐 쓴 표현, 망설이다 덮어버린 흔적, 나에게도 비밀로 남긴 표현들. 그 모든 것은 오늘 나를, 다시 알아갈 수 있는 초안이 됩니다. 오래된 일기나 사진을 꺼내볼 때를 떠올려보면요, 우리는 단지 그날의 일을 복기하지 않습니다. 그때의 유행, 내가 따라 했던 말투, 그날의 공기, 내가 살던 사회의 분위기, 마음의 온도까지 함께 떠올리며 비로소 그때의 ‘나’를 이해하게 되죠.
그 순간 우리는 고고학자가 됩니다. 내 삶의 유적을 발굴하고, 조각난 맥락을 맞추며 그때의 나를 해석하는 사람이 되는거죠. 그러니 우리 삶에도 일부러 힌트를 남겨두라고. 미래의 내가 발굴하고 싶어질 만큼, 다시 꺼내 읽고 싶어질 만큼의 여백과 단서를.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쓰고 끝내는 기록’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열어볼 시간과 이유를 함께 남겨두는 거죠.
숙제 같은 선물이 될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말미에 숙제를 같이 나눠보려고 해요. 짧지만 재밌고, 시간이 지나면 더 궁금해지는 나만의 파피루스를요. 미래의 내가 발굴하고 싶어질 만한, 작은 유적 같은 기록 말이에요. 자, 그리고 '벌써' 오늘의 서점에 거의 다 왔답니다. 여기는,
뉴욕 5번가입니다. 5번가는 뉴스나 다른 매체에서도 익숙하게 나오는 거리인데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로 상징성을 갖고 불리기도 합니다. 트럼프타워를 비롯한 초고층 빌딩이나 명품매장이 즐비한 거리는요, 이 거리에 어떤 매장이 생기고 없어지는게 하나의 뉴스로 보도가 되기도 할 정도인데요. 이 거리에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 있습니다. 5번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그 어느 명품매장보다 눈에 띄는 서점인데요. 이 서점은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독립서점으로,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직 여기 있어요.
1925년, 딱 100년 전 이야기입니다.
루이스 코헨이라는 사람이 300달러를 손에 쥐고 서점 문을 열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름을 고민했어요. 전화번호부나 리스트에서 가장 앞에 오려면 'A'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A'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뒤지다가 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Argosy'. 보물선, 보물섬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죠. 오래된 보물을 발견하는 곳, 역사 속에 기억될 서점. 루이스 코헨이 바랐던 의미가 그 이름 안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이름처럼 아거시는 보물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을 포함해 각국의 유명 인사들이 찾아오는- 뉴욕에서 손꼽히는 헌책방으로요.
지금 아거시에는 6만 권의 책이 있습니다. 건물은 5층까지 이어지는데, 1층에는 책들이, 2층에는 오래된 지도와 그림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어요. 가장 꼭대기인 5층에는 특별히 전시할 만한 책들을 따로 모아두고, 3층과 4층은 책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브루클린 지역에 커다란 창고가 하나 더 있어요. 여기도 책으로 가득 차 있죠.
왜 이렇게 많은 공간을 보관용으로만 쓰는 걸까요? 아거시는 단순히 오래된 책을 전부 진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책 중에서 진열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선별하고, 큐레이션합니다. 시대를 거쳐온 맥락과 장면을 때마다 다른 구성으로 특별하게 만들죠.
실제로 아거시는 뉴욕 고서적 협회와 출판 협회의 창단 멤버이기도 합니다. 백악관 도서관부터 이스라엘 대학까지, 역사적 장소들의 책을 직접 큐레이션해온 곳이에요. 단순한 헌책방이 아니라, 역사를 읽고 선별하고 보존하는 곳. 100년 동안 그 일을 해온 곳입니다. 보물선이라는 이름을 단 서점. 정말로 그곳엔 보물이 있었습니다.
이 서점이 굉장히 오래된 곳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건물자체도 오래되어서, 마치 어느 시대의 공간으로 들어온것 같은데요. 이렇게 서점의 2층으로 올라가는 수동식 엘레베이터가 있어요. 내릴때에요. 좀 무섭죠?
내리면 이렇게 고지도와 그림들이 있어요. 1800년대나, 뉴요커도 흔하죠. 서점의 주인, 나오미는 말해요. 물론 인터넷으로도 다양한 지도를 볼 수 있다는건 알지만 지도는 정보가 아니라 작품이라고, 그래서 '감상'해야 하는것이라고요.
오래된 지도를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나라의 이름, 상상 속 괴물이 그려진 바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대륙의 빈 공간. 지도의 목적중 지리를 설명하는 기능은 일부죠. 지도는 인문학이 되기도 하고, 정치와 세계사, 또 새로운 교통수단을 반영하는 뉴스가 되고 색채, 장식, 그리고 바람과 소망이 담긴 회화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런 지도를 감상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지도가 변해온건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호기심과 열망이
상상을, 현실을, 미래를 '탄생'시켰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책을 사는 것과 함께 그들의 관록이나 조언을 얻을수 있는 곳이기도 한데요. 재미있는건 책을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어떻게 보관하거나 복원해야 하는지도 알려주는 곳이에요. 그래서 책 표지의 종류를 알려주며 덧대거나 수선하는 법, 책장에 따라 다른 보관법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사실 책은 그 어떤 물건보다 굉장히 훼손되기가 쉬운데요. 표지가 변형되기도 쉽고, 내지도 쉽게 변색되고 찢기구요. 사실 우리는 옷은 잘 알아요. 세탁법도 알구요, 보관할때 뉘어놔야 하는지 걸어놔야하는지도 알아요. 심지어 계절에 따라 늘어나도 줄어드는지도 압니다. 꼭 가격이 높아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옷이라면 한번더 신경쓰면서 보관하게 되는만큼,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것 같은데요. 단지 책의 문제가 아닌, 내 삶에 들이는 물건에 대해서요. 사실 우리는 물건을 살 때만 생각해요. 그나중에 보면 단순히 쌓아두거나, 수납장에 넣어두고요. 또 버리기도 해요.
사는건 한 순간이지만, 갖고 있는건 평생이죠. 공간으로든, 의미로든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과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에게 대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갖고 있다면 내 삶에서 어떻게 의미를 어우러질수있을까 생각해야 하는 곳입니다. 단순히 소유하는 것 너머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아거시의 책 복원 과정을 이렇게 설명하는데요.
조지 워싱턴의 편지에 오트밀을 쏟았나요? 우리는 그것을 청소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표지 한 쪽이 헤졌다고요? 우리는 다시 복원할 수 있어요. 수영장에 가족이 대대로 읽어온 성경을 떨어뜨렸다고요? 음... 글쎄요 운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도해볼게요!
아거시의 복원사로 일하고 있는 리처드는요, 30년이 넘게 일하고 있고요, 그의 첫번째 직업은 풍경화를 그리는 사실주의 화가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복원으로, 이야기를 창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책장을 낱장으로 판매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책을 꼭 한권이어야만 완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날의 필체, 종이, 재질과 그림. 그리고 모든 흔적은 한권의 책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아거시에서는 책장 사이, 그리고 서가 사이를 오래 머물러야 했는데요.
아거시에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가 아니라 살아온 삶을 묻습니다.. 심지어 여행을 오게 된 이유와 숙소까지 물어본 유일한 서점이기도 했는데요. 왜 이곳이 뉴욕에서 가장 오랜 서점이자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 알수 있었어요. 책을 추천하기 위해 노력하는게 아니라, 삶의 지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것.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어떤 책을 읽고 싶은지 묻는것과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는건, 들을수있는 대답이 다르겠죠. 아거시는 책을 고르는 일은, 삶의 지층을 해석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대화를 나누며 지층을 살핍니다.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무엇이 쌓여 있는지.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을 읽어낸 뒤에야,
비로소 책 한 권을 건넵니다.
아거시는 말합니다. 기록은 오래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이해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해석되는 훈련 속에서 가능해진다고.
그래서 아거시에서는 오래 머물러야 했습니다. 책장 사이를,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들여다봐야 했어요. 한 권의 책만 보는 게 아니라, 한 장 한 장의 의미를 읽어야 했으니까요.
어떠셨나요? 아주 오래된 도서관 그리고 아주 오래될 - 서점이었어요.
그리고 오늘은 질문을 나누기 전에 같이 파피루스를 적어볼까해요.
『올해 12월로 보낼 기억을 포장합니다』
오늘부터 딱 일주일동안 적는거에요. 요즘 받은 가장 미지근한 위로를 적는거죠.
따뜻한 차 한 잔. 밤에 혼자 걷는데 별이 보였던 시간, 기분이 좋아졌던 노래, 오래 고민한 선택지에서 빠르게 결정했던 방법, 요즘 즐겨걷는 길, 친구가 건넨 농담. 작으면 작을수록 좋습니다. 쉽게 잊혀질수록 더 좋습니다.
왜 이런 별것 아닌 걸 굳이 적어둬야 할까요? 힘들 때 우리를 버티게 하는 건 거창한 행복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렇게 쉬운, 이렇게 작은, 이렇게 당연한 것을 다시 보고 꺼내고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나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요즘의 가장 작은 위로를 분명히 적어보세요.
자 여러분, 벌써 헤어질 시간이에요.
오늘의 질문을 드릴게요. 언제 어디서 펼쳐보셔도 좋아요.
누군가에게 건네주셔도 좋답니다. 다른 대화의 기록으로 적히고, 다른 선물이 될 테니까요.
무엇을 기념하고, 기다리고 싶은 날은?
-첫 눈, 1월 1일, 누군가의 생일, 약속한 날...
안지겨워? 소리를 듣는 것이 있다면? (취미, 옷, 취향...)
예전에는 무심했는데, 어느덧 소중해진 것은?
어떤 이유로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동네 가게는?
10년 뒤에도 내가 여전히 좋아하고 있을 것 같은 건?
“잠시만”이라고 했던 것이 “오랫동안”이 되어버린 기억은?
미래의 나는 어떤 고민을 '웃으며 추억'하고 있을까?
언젠가 제가 다시 간다면, 우리는 어떤 인사를 나누게 될까요?
벌써..! 그리고 여전하구나! 라고 말하게 될까요?
무엇이 변하고 변하지 않는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