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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앤나 Mar 27. 2016

배낭 대신 에코백, 스위스 하이디마을

내가 사랑한 스위스, 마이엔펠트에서 만난 것  

내가 사랑한 유럽, 마이엔펠트.





취리히 중앙역은 너무나 컸다.

잠시 걸음을 멈추면 순식간에 길 잃은 이방인의 모습이 되었다.


상트갈렌 역사는 웅장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역사문을 밀고 나오면 중세시대 같은 도시가 펼쳐진다.


취리히 중앙역. 스위스에서 가장 넓은 이 곳에서는 플랫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상트갈렌. 고풍스럽고 웅장한 역, 넓지는 않지만 필요한 것들이 있는 곳.


그리고 마이엔펠트 역에는 동그랗고 작은 시계가 있다.

취리히 역처럼 자동발권기가 즐비하지도 초콜릿 상점들이 있지 않으며

상트칼렌역처럼 스타벅스나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음식점도 없다.

오직 작은 시계만이 다음 열차가 언제 올지 알려주는 안내소이다.


마이엔펠트역. 그러니까 이 곳이 바로.


역 뒤에는 초록색 산이

위에는 하얀색 구름이

앞에는 자갈이 올망졸망한

여기는 하이디마을이다.



언덕을 오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기차역에서 혼자 내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내리쬐는 볕을 맞으며 걷고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하이디 집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는 그 시간의 이야기는 아마도 한 문장으로 다 담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느리고 평화로운 오후'


느리게 걸을수 밖에 없는 곳, 하이디 마을.


작은 시골마을은 조용했다. 흘러가는 시간보다 느리게 걷자 마음도 평온해졌다.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가 바로 '하이디마을'이고, 걷기 위해 온 것이니까.


'이 길로 가는 것이 맞을까?' 싶을 때쯤 빼꼼 나오는 하이디집으로 가는 표지판따라 천천히 걸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 어디까지 올라온 걸까 뒤를 돌아보며, 이따금 '아휴, 얼마나 더 가야 하나.' 하며. 그러다가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책의 처음에 하이디를 할아버지 집에 데려다주려고 이모가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이 언덕을 오르며 투덜투덜 대던 것이 생각이 났다.

'불평할만하네.' 고개가 끄덕여졌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자 동화 속 인물들이 떠오른다. 겨울에 길이 꽁꽁 얼어 높은 언덕을 올라오지 못했던 동네 꼬마들, 어느 아늑한 집에서 뜨개질을 뜨고 있을 페테의 할머니, 마을에서도 동떨어진 언덕 꼭대기 집을 사랑했던 하이디, 그리고 꼭 이 곳을 오고 싶어 했던 8살의 내 모습도.


아마도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사진들을 바라보다가 내 모습도 함께 담아보았다.




하이디집으로 가는길은 어렵지 않다. 빨간색 표지판, Heidiweg 따라 걸어가면 된다.


하이디마을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은 언덕길을 오르며 사과를 먹기.

테이크아웃을 한 커피나 세련된 청량감이 감도는 탄산수보다 왠지 나무에서 막 딴것 같은 사과가 더 먹고 싶을 것 같았다. 이 곳에서는. 그래서 취리히 마트에서 사간 사과를 꺼내 아삭아삭- 베어 먹으며 언덕길을 올랐다. 소풍 나온 것처럼 혹은 집 앞에 나온 것처럼.


취리히 과일가게에서 샀다. 제철이었을까? 사각사각 맛있었던 사과.


마을은 전반적으로 조용하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면 이야기가 들려왔다. 매일 관리를 하는 것이 분명한 예쁘게 다듬어진 정원도, 어린 손녀를 위해 손수 메었을 것 같은 그네도, 아마도 조금 전에 흠뻑 물을 맞았을 뜨거운 볕 아래 물방울이 맺힌 나무도. 스칠 땐 조용했던 마을이 머무르니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이 곳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잠시 멈추고 들어보기를.


마이엔펠트는 포도농장이 많다. 걷다 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포도밭.


그렇게 보고 싶은 것은 멈추어 바라보고, 머물고 싶을 때는 담벼락 너머로 구경도 하며 걸어가니 드디어 '하이디 집'이 나왔다. 언덕을 오를 때는 혼자였는데 도착하니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한국인은 나 혼자였지만.


정말 높이 있구나, 하이디 책에 나온 그대로 아주 언덕 꼭대기에.
할아버지, 무뚝뚝하지만 인자하고 정이 많던.
큰 나무 아래엔 할아버지와 염소 두마리가 있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 이 곳에서 한국인은 나밖에 없었다.


하이디집에 도착하자 하이디집과 상점뿐이었다. 그러나 충분했다. 침대보다 수풀더미를 좋아하고, 다락방 창문 너머로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사랑한, 막 짜낸 염소젖을 가장 맛있게 먹는 하이디를 사랑한 사람에게는 오래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공간일 테니까.


각 국의 언어로 출판된 하이디 책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이디상점에 들어서면 양과 염소 그리고 스위스 기념품과 하이디 인형들이 가득하다. 어린 꼬마 숙녀들은 한 손엔 아빠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이디 인형을 꼭 붙들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바라보다가, 나도 찬찬히 물건들을 구경했다. 물품들의 질은 그 어느 기념품 가게와 마찬가지로 고급스럽기보다는 정말 '기념'정도로 간직할만한 것 들이다. 푸릇푸릇한 싱그러운 색의 냅킨과 하이디 얼굴이 그려진 쿠키를 샀다. 그리고 아빠에게 줄 스위스 나이프도.


생일선물로 아빠에게 알프스 소녀 책을 받고 좋아했던 8살의 나,

그리고 하이디 마을에서 아빠에게 줄 선물을 사는 지금의 나.


감회가 새롭다,

이 말은 결코 다 담아내지 못할 수많은 감정들이 올라왔다.

아주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그 어린 날의 나와 만난 기분이랄까.

'난 잘 도착했어, 네가 오고 싶어 했던 이 곳.'



하이디마을에서만 기념으로 받을수 있는 원본 책, 독일어로 쓰여있어 읽지는 못하지만.


마당으로 나와 치즈와 초콜릿 그리고 도시락을 꺼냈다.

상트갈렌에서 사 온 리조또를 꺼내 먹으니 정말로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유치원 소풍 때는 엄마가 점심시간에 온다고 하고 늦으면 울기도 했다. 그래서 유치원 소풍이나 나들이 갔을 때의 사진은 울어서 눈이 퉁퉁부은 나와 그런 내 손을 꼭 붙들고 진이 다 빠진 모습의 짝꿍 그리고 활짝 웃는 모습의 엄마가 함께 있었다. 셋의 표정이 얼마나 다른지 보는 사람마다 웃게 하는 사진.

도시락을 먹는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온전히 즐거웠다. 푸릇푸릇 산은 바라만 봐도 감탄이 나오고, 적당히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은 좋았으며, 핑크색 외관이 예뻐서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사 온 리조또는 맛있었고, 식후에 깨물어 먹는 초콜릿은 역시나 달콤했다. 아무도 없었지만 너무도 많은 것들이 곁에 있었다.

 

파리에서 추워서 급하게 산 도톰한 맨투맨, Paris가 새겨진 옷을 스위스에서 입고 다녔다.


유럽 여행을 준비하며 혹시나 싶어 백팩을 캐리어에 넣었다.

그러나 한 번도 꺼낸 적은 없었다. 평소의 나와 여행을 하는 나는 다르지 않았으니까.

한국에서도 여행지에서도 나는 같았다. 그래서 내게 필요한 것도 다르지 않았다.


하이디마을 역시 그랬다.

평온하고 느린 그곳에서는 에코백이면 충분했다.

거기에 맛있는 사과와 배고플쯤 꺼내놓을 수 있는 도시락이면 더할 나위 없었으니까.


 

내리쬐는 빛, 멀리인듯 가까운듯 선명한 산과 푸르른 들판. 여기는 '마이엔펠트'


내가 사랑한 유럽, 스위스 마이엔펠트.


커피숍도 상점도 없는 마이엔펠트 역

그래서 소풍 가듯 필요한 것을 준비할 수 있는 곳.


조용해서 지루해 보이는 동네.

그러나 스치듯, 머물러준다면 그들의 작은 이야기가 들리는 곳.


언덕 꼭대기 높은 곳에 있는 하이디 집.

그래서 가는 동안 온 마을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 어느 집 앞 작은 그네까지도.


작고 낡은, 그리고 염소 두어 마리밖에 없는 하이디 집.

그러나 그것이면 충분함을 아는 사람들이 함께 있기에 웃음소리가 가득한 곳.

마이엔펠트, 하이디마을.



등산화보단 운동화

배낭보단 에코백

음료수보단 과일을 준비해 보기를.

빨리 걷지 않아도 되고

많은 것들이 필요치 않으며

그 날의 내가 좋아했던 것이면 되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하이디를 만나도 놀라지 말기를.

할아버지와 페테, 염소와 초라한 집들 속에서 당신은

하이디가 곧 그 날의 '나'임을 알게 될 테니까.

반갑게 맞이하고 인사해보기를.

나의, 하이디에게.



마이엔펠트
작은 마을
하이디를 만난 곳



마을을 내려오다가 만난 소 떼, '정말로 스위스구나 여기.' 싶었던 순간.
언덕을 함께 내려오던 베네수엘라 아가씨, 하이디에게 관심이 없었다던 그녀는 이제부터 하이디를 좋아하겠다고 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빠르게 걸을수 있을까, 작고 아름다운 곳에서.
안녕, 마이엔펠트.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작은 역.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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