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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앤나 Mar 28. 2016

차가운 도시, 취리히는 따뜻했다

스위스 여행에서 온통 혼자였고 그래서 같이였던 날.

반짝이던 날에, 취리히 호수.






취리히 중앙역은 너무나 컸다.

잠시 걸음을 멈추면 순식간에 길 잃은 이방인의 모습이 된 듯했다.

바쁘게 지나치는 사람들은 전부 목적지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했고 자동발권기가 즐비한 공간은 스스로 길을 찾아야만 할 것 같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취리히중앙역, Zurich HB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혼자인지 그래서 잘 곳은 있는지 관심 갖지 않았으며 내가 어디를 갈 예정인지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혼자임을 느끼는 순간은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는 적을지 모른다.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디저트에 혼자임을 잊거나 혼자여도 상관없다고 느끼기도 하니까.

그러나 '혼자야.' 하는 순간은 뜬금없이 찾아와 예고 없이 깨닫게 한다.




취리히는 추웠다.

서늘함을 넘어 싸늘했다,

'여기가 스위스구나.' 하는 생각보다 '난 혼자야.' 하는 생각이 훨씬 강하게 들었지만 그 여운에 취할 시간도 넉넉지 않았다. 예정 대로라면 지금 숙소를 체크인하고 짐을 둔 후에 상트갈렌으로 가야 했다.


한 손에는 구글맵, 다른 손으로는 캐리어를 끄니 파리에서 잠시나마 잊었던 '온전한 이방인'이 또다시 되어있었다. 숙소 소개 홈페이지에 나온 도보 15분이 이렇게나 길었던가. 숙소 관리자의 걸음이 빠른 것인가, 내 걸음이 느린 것인가 생각을 하며 몇 번쯤 헤매고 도착한 숙소는 체크인 시간이 아니라며 입실이 불가하다고 했다. 미리 이메일로 입실 시간을 조율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역 앞에 봐 두었던 스타벅스로 갔다. 파리에서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러나 취리히에서는 무방비상태로 외로움을 맞았고 그래서 '아는' 그곳을 찾아 들어갔다.


취리히중앙역 바로 앞에 있는 스타벅스, 따뜻한 라떼가 위로가 되었던 날.


'따뜻한 라떼를 마시면서 다시 일정을 짜봐야지.'

카페라떼 7,200원.

한국에서라면 두 잔쯤은 마실법한 가격이었다.

익히 들어왔던 물가지만 또다시 체감하고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는데 펜이 없다.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다.


겨우 입실한 숙소에서 짐 정리를 마치자 온 몸에 긴장이 풀렸다.

처음 혼자 떠난 여행 6일째, 드디어 몸이 아파왔다.


전자제품 전원이 켜지지 않는다. 분명히 사이즈는 맞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밖으로 나와 구글맵을 켜고 찾은 마트에서는 멀티탭은 전자제품 가게로 가란다. 다시 두 블록을 걸어가서 멀티탭을 샀다.


몸이 좋지 않은지 예정과 다르게 그 날이 왔고, 이 먼 곳에서 아프고 여성용품까지 사려니 서러웠다.

마트로 돌아가서 적당한 제품을 찾는데 스위스는 모국어가 없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로만슈어 4개 국어가 통용이 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도 영어를 잘 못한다.

'울고 싶다.'


싸늘한 날씨, 파스텔톤의 색마저 차갑게 보인 날.


'날씨가 전부 '라는 스위스에서 추웠고 시렸으며

여행객의 편의를 봐주지 않고

물가는 높으며

영어는 잘 못하는 취리히.


첫인상과 다르다는 말,
얼마나 들어봤을까?


즐비한 자동발권기 곁에는 직원들이 항상 있었다.

목적지로 가는 티켓을 더 효율적인 가격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스위스 열차 시스템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해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혼자 열차표를 끊을 수 있도록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스타벅스에서 옆 자리 여대생에게 펜을 빌린 후 돌려주자 그녀는 괜찮으니 나에게 계속 써도 된다고 했다.


덕분에 일정을 잘 정리할 수 있었던, 그 날 받은 펜.


느지막이 체크인한 숙소는 방을

무료로 업그레이드해주었으며


콘센트가 맞지 않아 다시 찾아간 전자제품 가게에서는 이유를 함께 고민해주었고

숙소의 전기차단기를 확인해보라고 설명 후 콘센트는 환불해주었고


여성용품을 찾는 나를 위해 

젊은 숙녀부터 할머니까지 서너 명이 모여

마트 한 켠에 다 같이 쪼그리고 앉아 적당한 것을 추천해주기까지 했다.

 

숙소에서 바라본 동네 풍경, 어두웠던 날씨가 조금씩 맑아졌다.


혼자였다.

혼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손을 내밀자

가까이 있던 그들이 손을 잡아주었고

둘이 되고 셋도 되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하는 여행에서

함께가 되는 법을 배워갔다.


낯선 기차역에 내릴 때

나는 그곳이 차갑다고 느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역에서.


그러나 차가운 것은

혼자여야 한다고 선을 그은

나였다.


가장 차가웠던 것은, 아마도 나.


늦은 저녁 숙소 앞을 산책했다.

나 같은 여행객들 한 무리가 숙소로 들어왔고 우리는 눈인사를 나누었다.

과일가게에서는 사과와 복숭아를 샀고, 가격은 파리와 같았다.

천천히 걷자 한 청년이 무어라 말하며 인사를 했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집 앞마다 놓인 꽃은 산뜻했고, 약간 추운 바람마저 상쾌했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넓은 침대와 푹신한 이불에 몸이 노곤 노곤해졌다.


그렇게 취리히 첫날은, 문득 외로움이 찾아왔고 상트갈렌은 가지도 못했으며 몸은 아팠지만 생각해보면 그 아무것도 엉망이 된 것은 없었다.

넓고 낯선 역

덜 외로우려 찾은 카페

깐깐하다고 생각했던 숙소

그리고 마트와 전자제품 가게에서조차.


따뜻한 볕이 들어오는 방, 푹 쉴 수 있었던 공간.


다양한 종류의 과일, 골고루 맛이 좋아서 기분이 더 좋았던.


늦은 저녁, 찬 공기마저 썩 괜찮게 느끼며 걸었던 날.



아늑한 숙소, 하얗고 폭신폭신한 방.


조금이라도 계획과 어긋나면 초조해지고

아무것도 아닌데 왠지 서운하고

하나가 잘못되면 엉망이 됐다고 생각한


서툴고 철없는 여행자는 스위스 여행 첫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차가운 도시 취리히에서 따뜻한 밤을.


다음날 아침, 이렇게나 아기자기한 삶이라니 하며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다. '와, 스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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