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레시피 약 대신 밥으로

좋은 말은 ‘진통제’가 아니라 ‘보약’이다

by 유앤나
우리는 말을 진통제처럼 쓰려 한다.
즉각 통증을 멈춰줄 문장으로
효과가 빨리 나타나길 바란다.
상대가 미소 짓기를, 눈물을 닦기를,
당장 나아지기를 기대한다.


가끔 "너무 좋은 말이다. 고마워" 라는 말을 듣는다. 특별한 표현을 쓴 것도, 감동적인 문장을 고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좋은 말'이었다.


우리가 각자 바라는 위로는 다르다. 하지만 하나는 같다. 바로 나를 위한 한마디, 즉 좋은 말이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가장 깊이 찌른 칼날 역시 누군가 건네준 '좋은' 말이다. 우리는 대개 선한 의도가 있다면 그 말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좋은 말에는 고정된 정답이나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안도감을 주는 "괜찮아"라는 말은, 벼랑 끝에 선 타인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무관심'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왜 같은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약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될까? 그것은 말이 단순한 소리의 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은 공중에서 사라지는 공기의 떨림이 아니다. 말은 상대의 입으로 들어가 꼭꼭 씹히고, 삼켜지고, 소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은 음식과 같다.


상대를 ‘관찰’하는 것이 첫 번째 레시피다


요리사가 요리를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식재료가 아니라 ‘누구의 입에 들어가는가’이다. 알러지가 있는지, 소화 능력은 어떠한지, 지금 그가 허기를 느끼는지 혹은 속이 부대껴 하는지를 살핀다. 말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마음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조언은 아무리 값비싼 식재료를 넣었을지라도 ‘독’이 될 뿐이다.


상대를 보는 것은 초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한 ‘기억’과 ‘청취’의 문제다. 그가 과거에 어떤 말에 상처받았는지, 지금 그가 그리워하는 정서적 영양소가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피는 태도다. 때로는 정성스레 차린 만찬보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물 한 잔을 건네는 침묵이 가장 훌륭한 ‘말’이 되기도 한다. “내가 여기 있다”는 조용한 말은 충분한 약이 되기 때문에.



좋은 말은 ‘진통제’가 아니라 ‘보약’이다


우리는 즉각적인 효과에 집착한다. 슬픈 사람을 보면 당장 웃게 만들고 싶어 하고, 좌절한 이에게는 즉시 힘이 나는 비법을 전해주려 애쓴다. 그러나 좋은 말은 먹자마자 통증을 멎게 하는 화학 진통제가 아니다.


좋은 말은 신선한 재료로 정성을 다해 끓여낸 음식처럼, 상대에게 천천히 소화되어야 한다. 당장은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쓰고 맛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는 신선한 재료로 빚어졌다면, 그것은 시간이 흐르며 상대의 삶에 비로소 흡수된다.(소화되는 데 십 년이 걸릴 수도...) 그러다 어느 고단한 밤, 문득 떠오르는 감각과 기억이 되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말이 ‘소화되도록’ 기다려주는 미덕


한 요리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좋은 음식에는 세 가지 재료가 있다. 좋은 기억, 어머니의 진심, 그리고 시간."


기억. 우리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음식이 담고 있는 기억 때문이다. 할머니의 손맛을 재현할 수 없는 이유는 레시피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 음식과 함께했던 시간, 할머니의 주름진 손, 부엌에서 풍기던 따뜻한 온기를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심. 도시락이 맛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집 반찬이, 도시락이, 내 입맛에 맛을까? 익숙해서? 아마 그보다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앙념을 좋아하고, 어떤 크기로 잘라주면 딱 알맞게 느끼고, 어떤 친구와 나눠먹기를 좋아하는지. 그래서 틀림없이 좋아할 것들을.


시간. 좋은 음식은 급하게 만들 수 없다. 김치와 장은 최소한 모든 계절을 지나야 하고, 이 계절에 나는 것은 손질해서 또 오래 보관해야 한다. 이렇듯 재료를 만드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먹는 사람을 알아가는데 필요한 시간이 되기도 할 것이다. 좋아하는걸 파악하기는 쉽지만, 여러 '예외'-아니, 계란말이는 좋지만 당근이 들어간건 싫다니까, 라거나- 를 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 그래서 이 재료를 구하고, 음식을 하고, 상대가 좋아할 구색으로 갖춰내기까지 걸려온 시간.



말도 그렇지 않을까.
좋은 말에도 세 가지 재료가 있다면
좋은 기억, 어머니 같은 진심,
그리고 천천히 익히는 시간.



우리가 건네는 말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익어 타인의 생(生)에 오래도록 남는 영양이 될 수 있다면.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자. 오히려 기다리고 지켜보자.

상대의 허기를 읽어낸 뒤 천천히 건네는 다정한 진심에서 건네보자.

좋은 말은 입술에서 끝나지 않는다.

삶에서 익어간다.



20200118_132725.jpg "조급한 요리사는 재료를 태운다. 기다릴 수 있는 요리사는 재료를 살린다. 완벽한 요리는 없다. 완벽한 순간만이 있을 뿐."








매거진의 이전글억만금을 준대도 안바꿀 기억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