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를 밟지 마세요.
브로드웨이 거리의 Beleive or Not,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의 직원은 뉴욕에서 어디를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에 두 곳을 대답했다. 자유의 여신상은 워낙 대표적인 명소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런데 왜 911 메모리얼을 꼽은 걸까, 의아했다. 뉴욕의 여러 장소들 중 한 곳이 아닌, 무려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꼽을만한 장소인 걸까. 미국의 자랑, 뉴욕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 그리고 어찌 보면 패배의 상징, 아픈 기억을 왜 같이 말한 걸까.
"뉴욕에 잘 도착했어? 911 테러가 일어났던 곳에 가면 추모 꽃이 꽂혀있대. 거기에 날 대신해서 꽃을 꽃아 줘." 한국에서 친구가 보내온 메시지.
나의 뉴욕 방문 리스트에 있긴 했지만, 가장 기대가 되는 곳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즐거운 마음으로, 어떨까 기대가 되는, 실제로 본다면! 하고 상상에 빠지는 장소는 아니니까.
2001년, 벌써 15년 전에 거실 텔레비전으로 다급하게 흘러나오던 뉴스 생중계가 떠오른다. 학원을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들어온 내게, "이 거봐!! 실제 상황이야!" 하며 흥분해서 텔레비전을 가리키는 오빠에게 "에이, 영화지?" 하며 신발을 벗고 들어서던 나. 그리고 멍하게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때.
아주아주 거대하던 존재가 무너져 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어가고, 모두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한국의 작은 중학교에까지 퍼지던, 그런 사건.
911 메모리얼은 월스트리트를 지나 세계무역센터에 있다. 리틀 이태리의 아기자기한 벽화, 소호의 빈티지한 상점들, 미드타운의 번쩍이는 광고판과는 다르다. 높고, 반듯하며, 성조기가 일렬로 펄럭이는 곳. 수트를 입고 바쁘게 걸어가는, 어쩌면 관광객은 나 혼자인가 봐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그곳에 도착했다. 어느 평일 오전에.
월스트리트에 도착하자 뉴욕보다는 미국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뉴욕'은 모든 것이 섞여 -변화, 화려, 상징, 할렘, 바닥, 그 모든 것이- 함께 있는 미지라면 '미국'은 강대국, 세계 최고, 그 모든 것을 위압할 수 있는 나라-라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911 메모리얼로 가는 길은 더 멀고 낯설었다.
그렇게 월가를 지나 911 메모리얼에 도착했다.
'거대한 건물이 사라진 흔적, 의미를 담은 건축물로 탄생한 자리, 그리고 희생자를 위한 추모' 그것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아, 나는 왜 911 mourning, condolence(애도, 조의)가 아닌 911 memorial (기념)인지 생각했어야 했다.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하고 입장료는 내면 911 메모리얼로 들어갈 수 있는 스티커를 나누어준다. 가슴에, 붙였다. 조심스럽게 입구로 들어가자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내부에는 그 날 뉴스가 중계되고 있다. 건물의 파편과 구조에 쓰인 작업물. 현장에 도착한 듯 생생한 모습에 걸음이 느려졌다. 작은 탄식도 흘러나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나는 작은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9.11.2001
사건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기억하겠다는 것이다.
빼곡하게 빈틈없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가득 붙은 사진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너무 많았다. 같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먼저 떠나간 모습들이.
이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써 내려간 이야기를 읽고 또 읽었다.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까. 가슴이 아팠다고. 혹은 눈물이 났다고. 같이 살았고 이제는 남겨진 사람으로. 미안하다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걷고, 멈추다가 그제야 곳곳에 놓인 티슈가 보였다. 천천히 지하 1층을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뭔가 멈칫했다. 보통은 그러지 않지만 뒤를 돌아봤다. '뭐가 있었나.' 아무것도 없어서, 다시 몸을 돌리다가 나도 모르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종이학.
공간 틈틈이 놓여있는 티슈와 천장에 가득한 종이학. 그래, 이곳은 911 메모리얼이다.
지하에 내려가니, 편지를 쓸 수 있게 마련된 공간이 있다. 나는 그들이 아닌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내려갔다. 왜 많은 뉴욕 시민들이 나에게 이곳을 가보라고 했는지 미처 몰랐어요. 아픈 장소, 잊고 싶은 기억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절대 잊지 않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기억해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야기가 있는 곳임을. 그리고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하다고. 죽음, 복수, 테러도 사랑까지 망가뜨릴 수는 없다고. 결코.
지상으로 올라와 메모리얼 밖으로 나왔다. 정오가 지나자 햇살은 더 눈이 부셨다. 그라운드제로가 어디 있는지 찾을 필요는 없었다. 가장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커다란 네모를 그리며 모여있었으니까. 천천히 걸어가,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았다.
물은 쉼 없이 솟았고 다시 아래로 흘렀다. 눈물 같기도 혹은 생명 같기도 했다.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메모리얼 파크 곳곳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들은 평온했다. 웃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고, 간단한 음식을 먹기도 했다. 처음엔 '이 곳에서 이런 풍경을 그리고 있어도 될까.' 싶었지만, 어쩌면 더 이상적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고. 슬프게 추모하는 공간이 아닌, 마음에 영원히 기억할 장소.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너를 잊지 않고.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메모리얼 파크를 나오는데 작은 팻말이 보였고, 나는 걸음을 멈추고 섰다. 그리고 그라운드제로보다 훨씬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어리고 푸릇한 아이비와 그 옆에 놓인 팻말 때문에.
밟지 마세요,
아이비 침대를.
가슴이 턱 막혔다. 밟으면 죽는다. 저 어린 생명은. 우리는 밟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왜.
아이비가 너무나도 푸릇푸릇하고 싱그러웠다. 그 옆에 놓인 작은 부탁이 쓰인 팻말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섰다. 날씨는 눈부시고 거리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National September 11 Memorial & Museum
내셔널 셉템버 11 메모리얼 & 뮤지엄은 9·11 테러를 추모하기 위해 건설된 뉴욕의 기념관 및 박물관입니다.
주소: 180 Greenwich Street, New York, NY 10007 미국
완공: 2011년 9월 11일
영업시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6:30~오후 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