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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파리라서

그저, 가을이라서.

by 유앤나

코가 시큰거리게 쌀쌀한 아침 공기에 대충 걸친 가디건을 잡아 여미고, 울퉁불퉁한 바닥이 그대로 전해지는 슬립온을 신고 거리를 나선다. 초록색 불이 들어오기 전에 으레 그러하듯 건널목을 걸으면 "봉주-" 인사가 들려온다. 이 거리에서 가장 먼저 상점 문을 여는 노르딕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며 지나는 거리,

이 곳은 당신의 동네, 파리다.


어제저녁에 먹다 남은 빵과 시리얼을 먹고

오후에는 낙엽이 쌓인 튈르리 정원을 산책하며

하루쯤은 친구들을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한다.

주말에는 시장에서 제 철 과일을 맛보고

먹거리 장터에서 산 음식을 거리에서 먹으며

이 계절에 파리를 그리워할 누군가에게 엽서를 보내기도 한다.

평범한 가을, 당신의 파리가 궁금하다.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문을 여는 노르딕 아저씨의 서점
가을이었고, 파리였다. 2017. Paris.


가장 파리다운 맛집을 묻는다면


단연 바스티유 재래시장이다. 목요일과 일요일에 열리며 이른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열리는, 파리에서 가장 큰 시장이기도 하다. 생마르탱 운하(Canal Saint-Martin) 가 있던 히샤흐 루누아르 대로에 있으며, 바스티유 시장 근처에 다다르면 당신은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일찌감치 시장을 본 부지런한 이들의 손수레가 줄을 이어 나오는 작은 길목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초록색 뿌리가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당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달큼한 내음을 풍기는 크레페,

이 사과 먹어볼래? 눈을 찡긋거리는 청년 상인과,

나만큼 멀리서 왔을법한 히잡을 두른 여인의 마음을 끄는 실크 스카프,

가을볕을 피해 천막 아래 그늘에 몸을 숨기는 똘똘한 강아지가 있는,

파리의 바스티유 시장에서는 가장 기다란 줄에 슬쩍 끼어보며 오늘의 첫 끼를 먹는다.


아, 정말이지 지나칠 수 없는 냄새였다. 물론 멈출수 없는 맛이었기도 하다.


마침 빈자리에 털썩 앉아 지금 막 볶아낸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 넣는다. 왁자지껄한 흥정소리와 바삐 움직이는 걸음들, 파리의 한가운데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음식은 역시 시장에서 막 만들어낸 음식을 먹는 순간이다.


반 쯤 찬듯한 손수레는 시장을 나갈 때 쯤 위가 불룩해지겠지.
에코백만 들고 온 것을 후회했다. 나도 커다란 가방을 가져올걸.
한참 시장을 보고 난 후엔, 이렇게 자리가 있는 곳에 앉으면 된다. 갓 구운 크레페를 먹기에 제격인 장소다.


파리에서 쉴 곳을 찾는다면


그 어느 길가의 벤치다. 소르본 대학에서 뤽상부르 공원으로 가는, 번잡하지 않은 골목의 벗겨진 벤치는 걷다가 지친 당신을 걸터앉게 할 것이다. 하나도 별 볼일 없는 거리의 낙엽만 뒹구는 공간에서 당신은 지금의 계절을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벌써, 혹은 어느새 가을이구나 할지도 모른다.


파리의 허름한 벤치는 바게트를 베어 불며 버스를 기다리는 그의, 담배를 피우며 어딘가를 응시하던 그녀의, 그리고 키스를 나누던 연인의 은밀한 공간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

그래서 당신은 모두를 바라볼 수 있지만

아무도 당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곳.

파리에서 가장 파리다운, 은밀한 공간.

당신은 이 벤치에서 아주 먼 한국이 늦은 밤인지, 이른 새벽인지 기억을 더듬으며 잠이든 그에게 전화를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잘 있다고. 이 계절에 문득 네 생각이 났노라고.


뒹구는 낙엽이 바스락 거린 오후.
책이 무겁다는건 핑계였다. 네가 떠올랐고, 그래서 여기 앉고 싶었던거다.


어느 날 밤은


문득 잠에서 깰지도 모른다.

파리의 새벽은 비가 자주 내리고, 야속하게도 당신의 귓가에는 젖은 물기가 스며들 테니까.

몇 시일까, 시계를 바라봐도 소용이 없다. 누구도 당신에게 다시 잠이 들라고 말해주지 않고 내일 아침 향해야 하는 목적지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해야 할 게 없어, 외로워지는 새벽은 잠들기에도 깨어있기에도 어색하지 않지만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의 감촉은 낯설어진다.

그런 시간에는 며칠 전에 사 온 책을 펼칠지도 모른다. 낮에는 읽히지 않던 책이 이런 시간에는 읽히는 이유는 글자보다는 단어와, 그 간격과, 종이의 내음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천천히, 오랫동안.

그러다 보면 차츰 안정적으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새벽에, 당신은 다시 잠이 들게 될 것이다. 어느새 익숙해진 이불의 사르락 거림 속에서.


다시 잠이 들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 밤이 길고 비가 내려서. 사실은 배가 고팠을까.



이 가을,

거리의 곳곳에서 마주치는 로맨틱함에 탄성이 나오다가도

문득 쓸쓸해지는 장소에서 무방비상태로 외로워할 수밖에 없는, 계절.


당신의 파리가, 부디 하나도 특별하지 않기를.

우리가 그리워하는 날이 그 여느 특별한 날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


늦가을 달은 밝기도 해서 밤이 깊도록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고

익숙한 손을 잡고 골목을 오래도록 걸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남아있는 올 해와 오지 않은 내 년에 대해,

아니 실은 너와 나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그 날들임을.


그래서 이 가을

나는 아무 이유 없이 네가 생각나고 당신 역시 그러하기를.


당신이 두고두고 기억할 날들이,

그래서 끝내 그리워할 기억이


'그저, 파리라서.'

'그저, 당신이어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게 되기를.


찾았을까.
Paris. 2017.


하필 파리였고

그저 가을이던 어느 날,

몽마르뜨 언덕 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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