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앤나 Mar 30. 2020

어른이 자라는 곳, 도서관

나의 어린이가 어른으로 되어가는 시간


온 마을이 들려주는 동화의 공간          



"나는 눈이 별로 안 좋단다. 대충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보아야 하지. 내가 너를 마음으로 볼 수 있도록 네 이야기를 들려주겠니?"

-글로리아 할머니의 부탁 《내 친구 윈딕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책이다. 

한 사람의 경험은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 

사람 책이 도서관에 모이자, 마을의 이야기가 달라졌다. 

어른을 위한 동화가 펼쳐졌다.          


'한 명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나이지리아 속담은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마을 전체, 모든 사람들이 줄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른이나 심지어 사람이 아니라 온 마을이라는 것은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아이의 성장에는 다양한 지식과 함께 타인과 공감하거나 감정을 공유하고 표현하는 모든 분야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열 살 아이나 그 보다 더 어린 아이 또한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은 고유하고 특별하다.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을의 이야기는 도서관에 쌓인다. 글씨가 적힌 책으로, 목소리가 전하는 구연으로, 몸짓이 만드는 연극으로, 마을에 이야기가 흐른다.     



그해,
한 명의 아이를 위해
온 마을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모두의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곳

10살 소녀 인디아 오팔은 목사인 아빠를 따라 플로리다로 이사를 온다. 어렸을 때 집을 떠난 엄마, 일 밖에 모르는 아빠, 친구가 없는 동네에서 외로워하던 오팔은 동네에 버려진 개를 집으로 데려와 윈딕시라고 이름을 붙여준다. 윈딕시는 언제나 웃는 표정으로 사람을 향해 다가가는데, 그런 윈딕시 덕분에 오팔은 사람들과 차츰 가까워진다. 그러면서 도서관 사서 프래니 할머니를 비롯해 동물 가게의 아저씨와 자신을 놀리던 짓궂은 아이들까지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윈딕시도- 슬프거나 두려운 것이 있으며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오팔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오래 전 전쟁이 남긴 상처를 알게 되고, 눈이 먼 이웃집 할머니를 들려줄 책을 빌린다. 마을 사람들은 오팔로 인해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위로를 전해간다. 


《내 친구 윈딕시》 (Because of Winne-Dixie)는 마을에 새롭게 온 소녀와 강아지가 이웃과 나누는 이야기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동화는 시대적 배경인 전쟁과 죽음에서부터 일상의 이별과 상실에 이르기까지 마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내놓는다. 사람을 잘 따르는 강아지 때문일까? 오팔은 윈딕시 때문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꺼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길 잃은 강아지와 외로운 아이를 위한 이야기는, 온 동네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동화는 출간된 직후 미국의 아동 문학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작품에게 수여되는 미국도서관협회의 뉴베리 아너를 수상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교사들이 선정한 아동 문학 100선'에 오르기도 했으며, 2005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동화는 아이들도 슬프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아이들은 저마다의 슬픔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어른 또한 감춰 둔 슬픔이 있다는 것도. 동시에 우리가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그 특별한 힘이 있는 이야기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세상은 한 편의 동화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동화에서 도서관은 어떤 의미일까? 오팔은 틈만 나면 도서관을 찾는다. 동네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인 도서관 사서 프래니 할머니는 오팔에게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프래니가 아주 어릴 적 커다란 곰이 도서관을 찾아와 《전쟁과 평화》를 가져갔다는 이야기, 그리고 프래니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슬픈 사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래 전 전쟁을 겪고 가족을 잃은 증조할아버지가 '세상은 괴로운 일로 가득한 곳이기에,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달콤함'을 위해 만들었다며 손에 쥐어 준 사탕은, 상처가 있는 사람이 맛을 보면 슬픈 기억을 입 속에 넣으면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되지만 동시에 감도는 달콤함을 느낄 수 있다는 위로와 함께.  사서 프래니 할머니가 경험했거나 할머니도 어릴 때 들어온 오래된 이야기들은, 사람의 삶은 책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래니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도서관에서 프래니 할머니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책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책을 흥미롭게 들려준다면 어린 아이들은 물론 강아지나 그보다 훨씬 커다란 곰도 찾아올 만큼 매력적인 공간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미 어른이 된 우리들도 기꺼이 좋아할 동화 속 도서관이 될 것이다.     


프래니 할머니처럼 구연동화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도서관들이 있다. 글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말로 재미있게 표현하는 구연동화는 목소리와 표정에 따라 그 내용이 풍성해진다. 울산도서관은 그림책을 바탕으로 동화를 구연하며 자유로운 상상을 표현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광양희망도서관은 지역의 노인과 함께 수화 공연, 율동, 오카리나로 연주하는 전래동화와 동요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비가 내리는 소리와 새싹이 피어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모습을 보며 세상의 다양한 표현과 감정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이들에게 선물이 되지 않을까.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만의 상상과 동화가 펼쳐질 테니까. 물론 그것을 잊고 있던 어른들에게도.      


프래니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다. 한 사람의 인생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는 누구나 비슷해서 외롭지 않게 하며,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이야기는 그래서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는, 또는 그래도 살아볼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니까.     


한 사람의 책, 한 인생의 책. 이처럼 사람을 읽고 사람을 빌리는 시도를 하는 도서관이 늘어나고 있다. 휴먼북이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은 덴마크 출신의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창안했으며, 휴먼라이브러리기관(Human Library Organization)을 통해 유럽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는 도서관 이벤트이다. 독자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며 자유롭게 책을 펼쳐간다.       


휴먼북의 가장 큰 특징은 강의가 아닌 대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독자는 질문을 통해 시각을 넓히고 대화를 통해 공감을 이뤄간다. 물론 휴먼북도 같다. 독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자신도 질문을 건네며 경험을 스스로 넓혀가는 책이 될 수 있다.     


오늘날 도서관은 다양한 방법으로 휴먼북을 운영하고 있다. 미네소타 도서관은 가족, 건강, 직업, 성별, 생활양식, 성적 등 일상과 관련이 깊지만 편견을 갖기 쉬운 주제로 휴먼북과 대화를 나눌 것을 권한다. 영국 도서관은 독자들이 휴먼북을 통해 고정 관념과 편견을 극복하기를 바라며 안전하고 정중하게 서로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함께 살고 있지만 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우리가 매일 사람들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며, 나의 이야기 또한 들려주고 싶어 하는 이유다.     


가까운 곳에서도 휴먼북을 만날 수 있다. 오산시 도서관은 심리, 교육, 과학, 건강, 역사 등, 악기 연주 등 휴먼북으로 다양한 분야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들려주고 있다. 서울의 송파구는 작년 가을 인물도서관을 열어 유명인사는 물론 지역주민이 어우러지는 사람의 서고를 만들어가고 있고 노원구는 청소년이 휴먼북을 만나 진로에 대한 상담을 나누게 하고 있는데, 직업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한다. 그래서 직업이라는 명사가 아닌 삶이라는 풍부한 예시를 들려주고 있다.      


휴먼북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휴먼라이브러리기관은 70개국 이상에서 진행이 되고 있는 휴먼북의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며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휴먼북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독자와 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대화의 주제는 사회와 관련이 깊어야 한다는 것.     


삶을 궁금해하는 아이들에게는 문장이 아닌 모습으로 생생한 삶을 보여주고, 어느덧 삶을 궁금해 하지 않는 어른들에게는 평상시에는 만나기 어려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다시 삶을 궁금하게 한다.      


나의 하루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한 편의 동화와 같다. 내가 꿈꿨던 직업을 가진 사람, 나와 같은 직업이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아주 어린 아이와 또 먼 훗날 내가 살게 될 그 모습까지도. 서로 다른 나이에 살고 있는 인생의 모습은 만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기대와 상상을 펼치게 하는 책과 같다. 마치 한 살 부터 백 살에 이르는 모습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내 한 장의 종이를 넘길 때마다 탄성이 나오게 하는 어느 그림책처럼.     


마을 사람들은 도서관의 서랍 속에 있던 '슬픈 맛 사탕'을 맛보며 저마다 슬픈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기억은 지울 수 없지만 달콤함으로 감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휴먼북은 행복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기에나 견뎌야 하는 고통이 있지만 그것을 감싸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들려주는 것이다. 삶의 책, 사람의 책. 우리는 몇 페이지에서 멈추게 될까? 오늘 우리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 슬픈 맛 사탕을 나누어 먹을, 사람의 책을 펼쳐볼 수 있다.     


나의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책을 들려주고 읽어주는 도서관에서 동화책을 꺼내도 좋다. 동화를 덮고 나면 동화란 어린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어린이를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그 어린이는 아직 내 안에 살고 있다는 것 또한. 모든 어른은 어린이였던 것이 아니라, 모든 어른은 아직 어린이다. 다만 어른스러운 어린이다. 우리는 아직도 슬프고 외로우며 때로는 상상을 하고 여전히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어릴 적 들었던 수업과 읽었던 책을 떠올려본다. 그 의미가 덜 한 것이 아니라 쉽게 풀어낸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처럼, 우리가 오늘 동화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어렸을 때 읽었던 책도 좋지만 새롭고 다양한 책을 읽고 싶다면 동화책과 그림책이 있는 도서관을 찾아도 좋다. 바람숲그림책도서관은 8천 여권의 그림책을 들, 산, 숲 등의 이름으로 공간을 나누어 진열했다. 넷째 주 일요일은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서울시 최초로 생겨난 서초그림책도서관에서는 빅북과 팝업북을 전시하며 눈을 즐겁게 하고 스트링북 서비스로 소리를 감상할 수도 있다.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은 순천 웃장 상인과 성동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과 함께 ‘시민 그림책 만들기’를 펼쳐내기도 했다. 웃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떡집 할머니, 방앗간 사장님, 국밥집 아주머니 등 시장 상인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아냈으며, 올해는 3학년 학생들이 만든 그림책 40권을 선보일 것이라고 했다.     


동네의 도서관에서 내 안의 어린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어린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돕는다. 동화책이 있는 공간은 끝내 우리를 더 좋은 어른이 되도록 만든다.     


아이가 태어나면 동네가 달라진다. 

저마다의 관심과 애정을 꺼내놓는다.

온 동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동네를 동화책으로 만들어간다.     


동화 속 도서관은 사랑스럽다. 마치 오래 전 읽었던 동화처럼, 시간이 흐르며 읽지 않았던 동화처럼. 세상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마침내 없음을 깨달았던 꿈처럼.      


동화 속 도서관은 사랑스럽지만은 않다. 사람들로 하여금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스스로 상처를 말하도록 한다. 그것은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동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토록 아픈 일이 있었음에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동화가 그러하듯이.      


오팔의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프래니 할머니는 이따금 아프고 윈딕시는 번개가 치는 날이면 어디론가 도망을 친다. 그렇지만 그들은 괜찮을 것이다. 내 안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을 안아줄 이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이 쌓이는 도서관이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는 프래니 할머니와 같은 이웃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책을 읽어주길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 내 삶에서 만날 수 있고, 만날 수 없는 인생을 만나는 동화 같은 곳, 도서관에서 동화가 펼쳐진다.     





<국회도서관 2020년 03월호 칼럼>

:: 국회도서관에서는 매 월 매거진을 발행하고 있습니다 :) 

책, 영화, 그림, 음악 속 도서관의 의미를 찾아가는 칼럼입니다.

https://www.nanet.go.kr/main.do




작가의 이전글 배럴통과 책장으로 쌓아올린 크리스마스 트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