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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앤나 Aug 09. 2020

그냥, 쪽지

쪽지 애호가의 하찮은 쪽지 


"언젠가 너한테 쪽지 받은 사람들 모임 한 번 열자. 전국에서 올 것 같아."    


틈틈이, 어쩌면 그보다 자주 쪽지를 쓰는 나에게 친구가 건넨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런 날이 오면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서 입장권으로 쪽지를 보여달라고 하자.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이런 쪽지를 받았는지 대화가 이어지겠지. 어떤 사람들이 올 거냐고? 아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지하철에서 자리를 내어주었던, 서점에서 책을 골라주었던, 비행기에서 사실은 왜 떠나는지 들려주었던, 에어비앤비에서 서로의 언어로 로미와 줄리엣의 이름을 알려주던. 어쩌면 나의 일기는 모두 그곳에 있을 거라고. 누군가의 삶이 숨을 쉬는 날이 아닌 숨이 멎을 것 같은 순간의 합이라면, 나의 삶은 한 편의 완성된 글이 아닌 그 흔한 몇 개의 단어가 적힌 쪽지들에.     



작년 직장 동료의 메시지... 참고로 남편과 만나지 5년이 되었다고요...? 네, 제가 이렇게 쪽지를 씁니다...



쉬워서

쉬워서다. 일단 책상 위에 있다. 편지라도 적으려고 한다면 편지지라는 이름을 가진 새삼스러운 것을 사며 부끄러워 해야 하지만 쪽지는 그렇지 않다. 흔한 노란색 포스트잇이나 조금 더 작고 여러 색을 가진 형광색 접착지에 써도 무방하다. 게다가 적기도 쉽다. 그 작은 공간에 쓸 말을 많지 않다. 게다가 쪽지의 매력은 빼곡하게 채우는 게 아니라 공간의 여유를 즐기는 거니까. 글씨도 마음껏 휘날리면서.

게다가 건네기도 쉽다.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그렇다. 조금은 과한가, 혹은 쑥스럽군, 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지 않는다. 상대방 또한 내가 보는 앞에서 쪽지를 읽어도 되고 그렇지 않아도 된다. 읽고 나서의 반응은 대부분 가벼운 웃음이니까.     


하찮고 가볍게, 붙어있다.
  담담하게, 가장 가까이.     



쪽지의 종류는 쪽지스럽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쓸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느 귀퉁이 자리를 빌리거나 무엇을 위해 덧붙여지는 것이 태반이다. 그러나 가장 오래 살아남는 건 어쩐지 그들이다.     



오직, 쪽지

회사에서 동료의 생일이면 케이크로 파티를 하고 기프티콘을 보내주는 익숙한 장면의 틈으로 슬쩍 쪽지를 건넨다. 평소에 어떤 것을 좋아한다고 했더라. 도라에몽이기도 했고 보라색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네모난 어떤 모양이 되기도 했다. 쉽게 만들 수 있는 쪽지에 그가 바라는 것을 두어 가지쯤 적고 건네준다. 이토록 간단한 쪽지는 모습에 비해 꽤 환영을 받는 편인데, 컴퓨터 모니터 위와 같은 과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붙이는, 쪽지

붙이기 위한 쪽지도 있다. '힘 내' 두 글자만 적은 채로 커피에 붙여 쓱 건넨다거나, 이 외에 주려고 했던 물건에 쉽게 적을 수 있는 '고마웠어' 혹은 '좋은 하루'와 같은 것들. 말로 꺼내면 파사삭 공기 중으로 가볍게 사라질만한 것들은 쪽지만큼의 무게를 더한 자국으로 마음에 남는다. 쪽지도 잘 받았다는, 작은 존재의 안부를 전해오기도 하면서.     


귀퉁이의, 쪽지

때로 그 자리는 귀퉁이가 되기도 한다. 책장 어귀 또는 노트 어디쯤. 모든 종이의 한 구석에 적힌 말들은 대개 짤막하다. 누구에게, 혹은 어느 날짜에. 가끔은 어떤 마음인지 슬쩍 꺼내 보여주는가 싶지만, 그 조차 부담스럽진 않다. 그저 귀퉁이에 적혀있기 적당한 모습이다.       


비어있는, 빌 것 같은

그래서 쪽지를 챙겨 다닌다. 명함 정도의 크기면 적당하다. 한두 문장을 적기에 좋고, 한 두 마디만을 적을 때면 더 여유로워 보이는 느낌이다. 가끔은 스스로의 속마음도 적어보는데, 노트에는 오랫동안 남을 것 같아서, 그래서 못내 솔직하지 못했던 것들도 쪽지 위에선 적나라해진다. 어쩌면 다시 읽어보기도 전에 바람에 날아간다거나, 어느 책장 틈에 섞여 찾지 못할 것 같은. 하찮음이 믿음직하다.


이런 쪽지의 온도를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부담스럽지 않은 모양새로 쉽게 받게 하면서, 말로 해도 될 만큼 가벼운 것을 굳이 적음으로써 적당한 온기를 전해주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의 쪽지.          



경비 아저씨께 간식을 드리자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며 몇 호냐고 물어오셨다. 이름보다는 몇 호냐고 묻는 것이 더 익숙하겠구나 싶어서 호수를 말씀드렸는데, 어느 날 저녁 문 앞에 붙어있었다.

 

그날이 아닌 다른 날, 내내 기억해 온 마음이 묵직하게 붙어있었다.



모니터 위, 다이어리 안, 때로는 달력의 끄트머리와 또는 매일 머무는 환경의 어디쯤 쪽지가 붙어있다.

      

예쁘지 않은 글씨체, 촌스러운 색깔의 포스트잇. 그런 것들이 꽤 좋은 노트북 위에 붙여진 모습을 볼 때는 어쩐지 의기양양해져.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있지 않은 느낌이랄까.



사실은 마음이 있어야 해서.

그 어떤 것 보다 이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네기 위해서는 한 줄을 적어도 꼭 필요한 말이어야 해서. 그 한 마디만큼은 꼭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어야 해서.     


오늘, 지금이라서.

나중에 더 좋은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라서. 중요한 날이 아니라 오늘, 너를 위한 말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게는 포스트잇이 있고
문구가 적힌 책갈피가 있고
고맙다는 말이 적힌 엽서가 있어     
언제든 전해줄 수 있도록, 
금세 꺼내어 건넬 수 있도록.



바라는 것이 있다면 

조금 더 가볍게 조금 더 보잘것없게 조금 더 부담스럽지 않게 쪽지를 건네는 것.

매일, 지금, 네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전해주는 것.

시시때때로, 자주, 늘.     


언젠가 이 세상에 나를 설명해야 하는 날이 오면,

나를 증명해야 한다면 그 쪽지들로 대신할 수 있기를. 

도통 쓸 거라곤 없지만 버릴 수 없는 그런 쪽지들로.     



꽃을 포장할 때도 약간의 글씨를 적는 편. 물론 쪽지는 살짝, 끼워서.


Q. 서점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필수템이 있을까요?

저는 항상 쪽지를 넣고 다녀요. 그래서 저에게 캐리어는 얼마나 많은 물건을 넣을 수 있느냐보다 얼마나 그것을 잘 꺼낼 수 있냐도 중요하죠. 작은 것을 쉽게, 자주. 어디서든 말이죠. 

-뮤토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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