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하는 게, 이리도 장애물이 될 줄이야
*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끄적였던 글을 조금 다듬어 발행해 봅니다.
당시 스물다섯의 나는, 여행을 떠나지 못하면 죽는 사람처럼 입에 여행을 달고 살았다. 지금 떠나지 못하면 곧 못할 것처럼 여행에 집착했었다.
나는 왜 자꾸 떠나고 싶어 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리워하기 위해서 떠난다.
많은 이들이 '일상의 활력을 되찾기 위해 떠납니다' 한다.
나는 반대로 잠시 동안의 행복 후에 일상에서 찾아오는 극도의 우울함,
그런 것을 원해서 떠난다. 여행 후의 공허함과
나 자신마저 여행지에 두고와 버린 기분은 모든 활력을 잃게 한다.
그런데 우울함을 원해서 떠난다니, 나도 아이러니하다.
내가 다녀온 여행을 다른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었다. 여행 코스가 아닌 여행자의 마음가짐 같은 것들을. 많이 떠나본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여행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여행을 했었고 여행 안에서 나는 어땠었는지 잠시 잊고 살았다. 지금의 나는 놀랍도록 여행의 여운을 잊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에. 어느 늦은 저녁, 사진들을 넘겨보며 당시 나의 기분과 생각들을 떠올렸다. 여행 중에는 얼마나 용감하고 무모했으며 삶에 열정적으로 임할 자신을 가지고 있었던가. 새삼 느끼며 그 순간을 또 한 번 그리워했다. 지금은 사소한 결정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해 미루고 미루는 사람이 되어있다. 6개월 만에, 아니 어쩌면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변해버렸다.
이럴 거면 여행을 왜 가나 싶기도 했다. 어차피 여행 속에서만 열정적이고 용감할 거라면, 그리고 다시 돌아올 여정이라면 굳이 떠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너무 행복했던 나머지 일상에서 오는 공허감이 더 커진다. 여행이 좋을수록 ‘여행병’이라고 하는 것을 더 깊게 앓는 것이다. 그래서 더 심적으로 지쳤고, 다시 여행을 떠나기가 망설여졌다. 어찌나 무기력하고 별 생각이 다 들던지 이 말도 안 되는 병이 나를 참 많이 괴롭혔다. 어쩌면 나는 평생 여행만 다니면서 살 운명이 아닐까 하는 기대에 고민도 많이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지겨운 일상을 버리고 '탈조선'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여행과 일을 병행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나랑은 다르게' 여행과 함께하는 삶일 것이고, 여행의 공허함을 느끼기 전에 떠나버리면 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한동안 여행이 가고 싶어 괴로워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여행이 나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은가? 좋자고 다녀와놓곤 현실 부정과 도피에 대한 갈망만이 남았다니.'
내 상황 때문에 더 깊은 고민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교 졸업반이었고, 교수님과의 취업 상담 자리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이 딱히 없어 "저는 여행 다니면서 살고 싶어요." 했다가 "솔직히 말해줄까? 지금 너 한심해."라는 직언을 들었다.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밖에 눈에 안 보여서 그렇게 대답했는데, 교수님은 매몰차게 현실적인 충고들을 늘어놓으셨다. 교수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여행을 다닐 초기 자금도 없고, 여행은 나중에 다녀도 되는 것이긴 했다.
"네가 여행을 다니면서 살고 싶으면 나중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지금 방법을 마련해 놔야지."
사실은 부모님한테도 친구들한테도 내 꿈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25살 나이의 나에게 다들 궁금해하는 건 '꿈'이 아니고 '되고 싶은 직업'이었다. 혹은 어떤 회사에 어떤 직무로 지원하고 싶은지 같은 거. 부정할 수 없는 현실과 주변 사람들의 등살에 떠밀려 25살의 8월, 나는 남들처럼 이것저것 자격증을 건드려가며 채용공고 사이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여행병과 붕 뜬 마음은 나를 어디에도 집중시키지 못했다. 6개월 동안 내가 고민한 것은 단순히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이냐가 아닌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였기 때문에 내 행동은 하나하나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 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돈을 모아 아프리카로 수개월간 긴 여행을 떠나는 것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얻어 출국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가 하고 싶었는데, 역시나 아무에게도 자신 있게 얘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이 길이 내 인생이 만족스러운 방향일 것이다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을 뿐이었는데.. 누군가는 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얘기했고, 누군가는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고 하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 모든 것은 여행병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내가 여행만 안 다녀왔더라면, 이렇게 깊은 고민까지는 안 했을 텐데 싶기도 했다. 사실은 여행을 다니며 살고 싶은 것과 직장에 취업해 안정적인 수입을 얻는 것 두 가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다. 큰 범주에서 보면 이기적으로, 끌리는 대로 살기와 사회적 기준에 나를 맞추어 사는 것에 대한 갈등이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어른이 될 거라고 확신했었으니까.
그래서 결론은, 난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현실에 순응했다기보다는 좀 더 기다렸다가 내 꿈이 확실해지면 발을 내딛기로 한 거다. 나는 솔직히 말하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장점을 꼽자면 '사교성이 좋고 활발하여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사회적인 사람'정도다. 이력서에도 이렇게 보편적인 문장을 쓸 수밖에 없을 만큼, 괜찮은 사람일지는 몰라도 부족한 사람인 것은 맞다. 그리고 아직도 나의 최종 목표는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기에 나는 열심히 일해야 하고,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자 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 인증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들었고 소위 비현실적인 공상들을 떨쳐내고 걸러 얻어낸 결론이다.
떠나는 것과 정착에 대한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여행을 다녀온 뒤의 후폭풍이 괜히 나에게 쓸데없는 생각들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 뒤돌아보니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나에 대해 이렇게 깊게 생각할 기회가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 확신했다. 떠나는 것을 실천하는 용기는 대단하다. 그리고 그 용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여행병은 누군가에겐 가볍게 앓고 지나치는 병일 수 있지만, 또 어떤 누군가에게는 인생에 대한 많은 생각을 만들어 주는 중요한 존재였다.
이 글을 쓰고 취업 해서 3년 동안의 직장 생활을 했다. 그리고 나는 돌고 돌아 다시 스물다섯의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기에 글을 읽은 감회가 새롭다. 늘 방향성 없고 이리저리 이상만을 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지금 보니 참 일관성 있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된 당시의 나에게 고마움과 함께 한 마디 함께 전하고 싶다.
"어떤 선택이든 상관없어, 결국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정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