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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9. 2024

14화: 기억의 길

서현의 3일간의 선택

그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마치 꿈속에 있는 듯했다. 공간은 흐려졌고, 그 자리에 서현의 기억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린 후회, 고통, 아름다운 순간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그 기억들이 하나의 길이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첫 번째로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낡은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서현은 어릴 적의 자신이 혼자 그네에 앉아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의 서현은 늘 혼자였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을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어린 서현이 말했다.


 “그때 너는 혼자였지만, 그 외로움이 너를 더 강하게 만들었어. 그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멀리했지, 맞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했어.”


서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항상 마음을 숨겼어.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녀의 말에 어린 서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 없어.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돼. 스스로를 용서하고, 진짜 너를 받아들일 시간이야.”


그 말을 듣자 서현의 마음속에서 묵직했던 감정들이 풀리는 듯했다. 어릴 적 자신이 감내했던 그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제는 놓아줄 수 있었다. 그 후회의 순간들이 그녀를 옥죄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과거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순간 다시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어린 서현을 따라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무겁던 어둠이 서서히 물러나자, 그 앞에는 오래전 기억 속 풍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서현은 한순간,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달았다. 대학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캠퍼스 내 잔디밭 위에서 서현은 친구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 한 명, 수진이 눈에 띄었다. 수진은 서현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대학 시절 동안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서현이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선명해지자, 서현의 가슴은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사건이 곧 일어날 것이었다.

어린 서현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 순간이 네가 계속해서 돌아보며 후회했던 시간이지? 네가 수진이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그날."


서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기억 속 수진은 잔디 위에서 그녀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의 서현은 혼자 있고 싶다는 이유로 수진을 밀어냈다. 그날 수진은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현은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그 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수진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고, 결국 그 후로 다시는 수진을 만날 수 없었다.


그날, 수진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서현은 자신이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음을 후회했다. 만약 그녀가 그때 수진의 말을 들어주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 후 수진은 서현의 곁에서 사라졌고, 그 빈자리는 서현의 마음을 오랫동안 아프게 했다.


서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어린 서현에게 말했다.


"그때 나는 수진이를 도와주지 못했어. 그녀가 힘들어할 때, 나는 나만 생각했어. 그래서 그녀를 잃었지."


어린 서현은 서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그렇지만, 서현아. 그건 너만의 잘못이 아니었어. 너도 그때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감정적으로 지쳐 있었잖아.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시절, 너는 스스로도 버거운 상태였어."


서현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다, 그 당시 그녀도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그녀가 수진을 도와주지 못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 후로 서현은 수진에게 다가갈 기회를 몇 번 더 잡았지만, 이미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어린 서현은 서현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진이도 너를 원망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도 그날, 너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으로 힘들었겠지. 너는 그날의 자신을 용서해야 해. 그날의 상황이 너무 힘들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해."


서현은 그 말을 들으며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날의 자신이 감정적으로 무너져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수진에게 다가가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가 있었다. 서현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죄책감을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기억 속의 장면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수진의 모습은 흐릿해졌고, 캠퍼스의 잔디밭과 하늘도 서서히 희미해졌다. 서현은 그 장면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수진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어린 서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네 남은 삼일중 하루동안 후회를 마주했어. 삶에 수 많았던 후회의 순간들을 모두 마주하진 않아도 돼.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너를 가두고 꼼짝하지 못하게 한 무거운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일... 너는 지금부터 니 삶을 제대로 마주하는 법을 알게 된 거니까 다음으로 갈 준비가 된 거야."     

서현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곳에서 견뎌내야 할 남은 이틀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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