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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24. 2024

15화: 고통의 시간

삶의 재 해석

서현은 후회의 기억을 떠나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수진과의 관계를 용서하며 후회의 무게를 조금 덜어냈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는 풀리지 않은 고통들이 남아 있었다. 어린 서현은 그녀의 손을 다시 꽉 잡았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할 시간이야. 준비됐어? “   

  

서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서현이 손을 쥐는 순간, 주위의 풍경이 다시 어둡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새로운 장면이 서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대학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정오의 햇살이 캠퍼스를 비추고, 학생들은 손을 맞잡고 함께 걸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서현의 시선은 그들 사이에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준호였다. 잘생기고, 자신감 넘치며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던 그 남자. 서현은 준호와 7년 동안 사랑했다. 그들은 캠퍼스 커플로 모두의 부러움을 샀지만, 그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 않았다.

기억 속의 장면은 서현을 가혹하게 끌어당겼다. 그녀와 준호가 앉아 있던 레스토랑. 그때 준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시간을 좀 갖자.... 나한테 시간을 좀 줘.”   

  

서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서서히 자라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 두려움을 억누르고 기다렸다. 준호가 다시 돌아올 것을, 그들의 사랑이 다시 예전처럼 뜨거워질 것을.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3년이 지나, 준호는 다시 서현 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 곧 결혼해. 너랑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더라. 우리 가족들도 너는 좀 어려울 것 같단 이야기를 널 만나는 내내 했었어. 너도 언젠가 나이가 든다면 지금의 너희 어머님처럼 나이 들어가겠지? 너랑 계속 이어가다 보면 너희 가족들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것만 같아서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 미안하다.”

    

서현은 그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7년 동안의 사랑은 한순간에 사라졌고, 그가 그녀를 기다리게 한 3년은 배신의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가끔 보였던 책망 섞인 시선. 서현이 가족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을 때, 준호는 늘 실망한 얼굴을 했다.


"넌 왜 항상 그렇게 불안해하고 아무것도 확실하게 결정을 못 해?"


준호는 어느 순간 부터 서현을 비난했고, 그녀는 그 비난을 참아내야 했다.     

서현은 그 순간을 다시 마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랑은 서현에게 상처만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준호에게서 사랑을 구걸하듯 기다렸고, 결국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배신은 서현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어린 서현이 조용히 물었다.


"이 기억이 네게 준 가장 큰 상처였지?"


서현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를 너무 사랑했어. 내가 더 잘했더라면... 내가 더 자신감을 가졌더라면..."


어린 서현은 서현의 손을 놓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그의 배신은 너의 잘못이 아니었어. 그건 준호의 선택이었을 뿐이야. 네가 더 잘했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야. 그가 너를 비난했을 때, 너는 자신을 탓했지. 하지만 그건 네가 아닌 그의 불안함 때문이었어."

  

서현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자신이 불안정하고 소극적이어서 그 사랑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그 사랑의 끝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어린 서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알겠지? 그 배신은 너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네가 더 강해지기 위한 시험이었어."

   

서현은 마음속에서 무거운 짐이 조금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준호의 배신이 그녀에게 준 상처는 컸지만, 그것이 그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사랑이 그녀를 억눌렀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기억은 계속 이어졌다. 이번엔 직장으로 넘어갔다. 서현이 다녔던 회사는 남들 눈에는 화려하고 성공적인 직장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지옥이었다. 그곳에서 서현은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누구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투명인간처럼 취급받았고, 온갖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동료들은 수군거렸고, 회의 중에 서현의 의견은 늘 무시당했다. 그녀의 고통은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고, 매일이 외로움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어린 서현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 시간들도 네게 큰 고통을 줬지?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들은 널 외면했어."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곳에서 난 정말 투명인간처럼 느껴졌어.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를 매일 고민했어. 그리고 결국엔 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


어린 서현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야. 그들은 너를 잘못 판단한 거야. 그곳에서의 경험은 네게 사람에 대한 이해와 진정한 강인함을 가르쳐줬어."


서현은 조용히 그 말을 되새겼다.


"그때 나는 너무나 약해졌었지. 하지만 그 경험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어. 이제는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

     

마지막으로, 서현은 자살을 시도했던 날을 마주해야 했다. 그날, 그녀는 삶의 모든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었다. 고통은 너무 컸고,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 기억 속에서 서현은 창문가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의 절망은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날, 그녀는 살아남았다.


어린 서현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가 그때 느꼈던 고통은 정말로 크고 무거웠어. 하지만 서현아, 네가 그 순간을 이겨냈다는 건 네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거야."


서현은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맞아, 난 그 순간에도 살아남았어. 내가 얼마나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살아있어."


어린 서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 고통이 너를 강하게 만들었어. 그때 너는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끝이 아니었잖아.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야."

     

서현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시련들이 결코 쉽지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서현을 아프게 하지만 그녀를 더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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