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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26. 2024

16화: 마지막 기억

고통 속에서 피어난 사랑

어린 서현이 서현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세 번째 순간이야. 보통의 영들은 이 순간을 경험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포기해버려. 방금 겪어낸 고통도 정말로 무거웠지만, 이 마지막 순간은 더 이상 널 뒤흔들지 못할 거야."

   

서현은 긴장된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린 서현은 조용히 말했다.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해서 항상 기쁘고 즐거운 기억만 있는 건 아니야. 이 순간도 마찬가지야. 행복했지만 많이 아플 수 있는 기억이지. 준비됐니, 서현아?"

   

서현은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과거의 고통을 마주하고 극복했지만, 이 마지막 기억은 그녀의 삶에서 가장 큰 사랑과 상실이 얽힌 기억이었다. 어린 서현이 손을 이끄는 순간, 주변이 빛을 잃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곧 서현의 눈앞에 따뜻한 빛과 함께 오래된 집이 나타났다.

    

집 안에서는 소박한 행복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현은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곳엔 그녀의 아빠가 있었다. 척추 부상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아빠는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현과 그녀의 언니 지연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서현은 겨우 여덟살이었지만, 아빠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깊이 느끼며 살았다.

아빠가 서현과 지연의 하루를 들어주는 모습에서 눈빛으로 표정으로 그가 할수 있는 최고의 사람을 가득 담아 표현하고 있었고, 어린 서현과 지연은 그 사랑을 듬뿍 느끼고 있었다.

    

"서현아,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니?"


아빠는 늘 이렇게 물었다. 침대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에게 딸들의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따뜻했고, 서현과 지연이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에 행복해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그 순간이 서현의 마음을 감싸는 듯했다. 아빠의 웃음소리, 지연과 함께 보냈던 행복한 시간들. 그 기억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아빠는 비록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들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그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어린 서현이 말을 이었다.


"그때는 정말 행복했지, 맞지? 아빠는 너와 지연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겼어. 비록 아프셨지만, 아빠의 마음속에는 너희가 그의 전부였어."

    

서현은 그 말을 들으며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맞아… 아빠는 언제나 우리에게 힘이 되었어. 아빠가 가장 행복해 보였던 건 우리가 옆에서 웃고 있을 때였지."

    

하지만 그 행복한 기억은 곧 무거운 현실로 덮였다. 서현의 아빠는 결국 병세가 악화되었고, 그녀가 겨우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 장면이 서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빠의 마지막 순간, 가족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어린 서현은 그가 떠나버렸다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그날의 아픔을 잊지 못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서현의 가족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의 일들은 서현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로 남았다.     

어린 서현이 서현을 다시 현실로 데려오듯 말했다.


"하지만 그 기억이 네게 준 건 단지 슬픔만이 아니었어. 아빠의 사랑은 널 지탱해주었고, 그의 따뜻함은 여전히 네 안에 남아 있잖아."


서현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맞아. 아빠의 사랑은 내가 어려운 시간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줬어. 아빠는 우리를 떠났지만, 그의 사랑은 늘 내 안에 있어."

 

어린 서현은 서현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네가 마주해야 할 순간이 있어. 준비됐어?"


서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의 눈앞에 또 다른 기억이 펼쳐졌다.

 그 기억 속에서, 서현은 비가 내리는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날, 서현은 열 살이었다. 학교에서 우산을 놓고 온 서현을 위해 언니 지연이 우산을 가져다주려 달려오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서현은 맞은편에서 자신을 향해 오는 언니를 보았다. 너무나 반가워서, 서현은 무작정 차도를 뛰어넘으려 했다. 하지만 신호를 보지 못했다.


언니 지연은 서현의 그 위험한 행동을 본 순간,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렸다. 비에 젖은 도로에서 브레이크가 늦은 트럭이 언니를 그대로 덮쳤다. 서현은 지연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를 보고 얼어붙었다. 언니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그 충격적인 광경은 어린 서현의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서현은 그 순간을 다시 마주하자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녀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지연이 자신을 위해 죽었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오랫동안 괴롭혀왔다. 자신이 언니를 살리지 못했다는 무거운 마음, 그리고 그 상실의 고통이 서현의 인생을 지배했다.    

 

어린 서현은 서현의 손을 놓지 않고 말했다.


"너는 언니를 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늘 너를 괴롭혔지. 하지만 그건 네가 책임져야 할 일이 아니었어. 지연은 널 사랑했어. 그리고 그 사랑은 그녀의 선택이었어."

     

서현은 그 말을 들으며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언니가 날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어. 난 그 사실이 너무 무서웠어. 언니가 없었더라면, 난 어떻게 됐을지 몰라."


어린 서현은 조용히 말했다.


"맞아. 지연은 널 사랑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 하지만 넌 그 고통 속에서 살아남았고, 그 사랑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


서현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언니의 죽음은 분명 큰 상처였지만, 지연이 남긴 사랑은 여전히 그녀 안에 살아 있었다. 그 사랑이 서현을 지탱해주었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그녀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었다는 것을.     

어린 서현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너는 모든 걸 마주했어. 아빠와 지연의 사랑이 널 살렸고, 그 고통은 너를 더 강하게 만들었어."


서현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는 과거와 화해할 수 있었다. 그 아픔은 여전히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그 아픔 덕분에 그녀는 더 단단하고 강해질 수 있었다.


"이제 내가 아빠와 언니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서현은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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