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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0. 2024

5화: 흐려지는 존재

나를 잃어가는 시간

서현은 또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그날 아침도 다른 날들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무감각한 하루가 시작되었고, 그녀의 몸은 기계처럼 출근 준비를 마친 후 거리로 나섰다. 어제와 같은 길, 같은 풍경, 같은 사람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제 만난 소녀가 한 뜻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맴돌았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대로 흘러가게 되었다고?’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출근 시간대의 혼잡함 속에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서현은 그들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현아!”


어제 만난 소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서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어제에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없는 것만 같아 도망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들, 사람들의 움직임, 지하철의 웅웅 거리는 소음 속에서 그 목소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녀는 그냥 그 소리를 무시한 채 지하철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주변이 온통 하얀빛으로 가득 차며 조용히 포근하고 아늑하게 서현을 둘러싸며 알 수 없는 평온함으로 안심이 됐다.   

   

“서현아. 네가 지켜야 하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 봤니? 오늘부터는 그동안 네가 생각하고 바랬던 대로 흘러가게 될 거야. 네가 지켜내야 할 것들을 한 가지씩 외면할 때마다 너의 존재에 일부분도 하나씩 하나씩 흐려지겠지. 반대로 네가 지켜내야 할 것에 대해 확실해지고 그게 뭔지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네가 그동안 그토록 바랬던 어두운 소망들은 오히려 새벽 이후 찾아오는 찬란한 태양이 되어 너를 존재하게 할 거야. 기억해 서현아. 모든 답은 너에게 있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러니 너를 구해줘.”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어떻게 하는 건데? 그리고 넌 누군데?”     


서현이 되묻자 빛은 사라지고 다시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나는 왜 이 소녀의 이야기에 답을 찾아야만 할 것 같을까? 나를 왜 구하라는 건데? 무슨 일이 생기는 건데... 도대체 넌 누구야!’     


 서현은 마음속 어딘가에서 복잡하고도 당혹스러운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미쳐버릴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하면 서현은 그동안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저 무수한 사람들 속에 섞여 사라지는 존재. 어쩌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서현'이 아니었다. 이름이란 단지 자신을 부르는 수단일 뿐, 그 이름 속에 담긴 정체성이나 의미는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지하철의 창밖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터널, 그리고 희미하게 비치는 빛들이 번쩍였다. 그 속에서 서현은 점점 더 자신이 투명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든, 부르지 않든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더라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구해야 해.’     


회사에 도착한 서현은 평소처럼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여전히 서현을 혼란스럽게 만든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선명하게 맴돌고 있었다. 동료들이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지만, 그 인사마저도 그녀에게는 마치 자동 응답처럼 들렸다.     

서현은 천천히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체 뭘 잃어버린 거지?"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었다. 더 이상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부를지언정, 그 이름에 담긴 진짜 서현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 스스로가 먼저 그 이름을 잃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사무실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컴퓨터 자판 소리, 전화벨 소리, 동료들이 주고받는 대화. 그 모든 것이 서현에게는 마치 먼 배경음처럼 들렸다. 그녀는 그 속에 있었지만, 그 소리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존재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었지만,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그녀에게 와닿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서현은 홀로 구내식당을 향했다. 동료들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서현은 그들을 무시했다. 그녀는 그들과 대화할 필요도, 소통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이름조차 잊힌 존재가 된 것 같은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제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부터도 멀어지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 이렇게 멀리 까지 오기를 원한 것일지 몰라.'


그 생각이 서현의 머릿속에 깊이 박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서 조금 더 멀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다리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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