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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0. 2024

6화: 멈춰버린 시간의 경계에서

사라지지 않는 희망


서현은 병원에서 돌아온 후, 무겁게 침대에 몸을 던졌다. 몸에 전해지던 극심한 통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남아 있었다.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지만, 의사들은 아무 이상도 찾지 못했다.    

  

"스트레스 때문일 겁니다. 조금 쉬세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들렸다. 쉬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면, 서현의 삶은 이미 오래전에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억누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서현은 다리에 느껴졌던 통증이 자신을 마지막으로 끌어내려는 신호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끝났으면 좋겠어…"      


그 생각은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모든 것이 멈췄으면, 자신도 이 고통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통증이 사라지고 나니, 그녀는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이러니였다. 그런 절망적인 순간에도 불구하고, 서현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살고 싶다는 미묘한 바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소녀. 갑자기 서현 앞에 나타난 그 소녀의 말은 서현의 마음속에서 자꾸만 되뇌어졌다. 마치 뭔가를 알려주려는 신호처럼.     

서현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침대에서 다리를 바라보았다. 낮에 느꼈던 통증이 있던 자리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손으로 그 부위를 살짝 만져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긴 하지.'      


서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리를 다시 이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불안한 기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갑자기 방 안에 고요가 깨졌다.     


“서현아, 이럴 시간이 없어.”     


서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 소녀가 다시 눈앞에 서 있었다. 마치 몇 분 전까지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번에도 역시 아무 소리 없이 그녀 앞에 나타난 소녀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소 다급한 기운이 느껴졌다.     


"너…"      


서현은 입을 떼려 했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소녀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네가 빨리 알아차려야 해."      


소녀는 서현의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네게 시간이 없어. 아까 낮에 느꼈던 그 통증이 단순한 게 아니야. 그 통증 이후에 네 다리를 자세히 본 적 있어? “     


서현은 그 말에 무언가에 홀린 듯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소녀가 말한 대로, 통증이 있던 자리에는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곳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서현은 손을 뻗어 그 부위를 만져보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은 그대로였지만, 눈앞에서 그곳은 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게… 뭐야?”      


서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도저히 현실일 리 없었다. 하지만 분명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네가 시간을 잃고 있다는 증거야. 네가 더 이상 시간을 다룰 수 없다는 뜻이지. 통증은 그 시작에 불과해. 지금 네가 보고 있는 이 투명한 자리는 점점 커질 거야. 그리고 결국 네 몸 전체가 사라지게 될 거야."   

   

소녀의 말은 너무나도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깊은 비밀이 담겨 있었다.

서현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사라진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소녀를 향해 외쳤다. 그러나 소녀는 서현의 두려움을 읽고도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네가 오랫동안 포기해 왔던 것들, 네가 멈춰버린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이제 네게 돌아오고 있는 거야. 너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잃어버렸고, 그 결과 네 시간도 잃어버렸어.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 네게서 완전히 사라지려 하고 있어.”     


서현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회피하고 있던 기억들이었다. 실패했던 꿈, 외면했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던 순간들. 그 모든 것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지금 이 순간으로 이끌어 온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서현은 한참을 침묵한 후에 물었다. 그녀는 점점 불안해졌다. 자신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에 숨이 막힐 듯했다.

소녀는 서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 시간을 되찾아야 해. 너의 삶에서 도망치지 말고, 다시 그 시간을 되찾아야 해. 그래야 네가 사라지지 않아.''

 

서현은 그 말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렸지만, 그 안에 어떤 진실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이제는 자신의 존재마저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     


서현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

소녀는 천천히 다가와 서현의 손을 잡았다.      


"먼저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야 해. 너는 지금까지 그것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어.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 네가 다시 찾으려 한다면, 그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서현은 소녀의 손을 잡고 서서히 일어났다. 그 투명해진 자리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그 시간을 되찾기 위한 여정이 지금부터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어?"  

    

서현은 두려움 속에서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답은 자연스럽게 네 안에서 찾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답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 거야."    


서현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그저 무기력하게 사라질 수 없었다.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아야 했다. 소녀는 서현에게서 천천히 물러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서현아, 네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서현은 소녀의 말을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그녀의 삶을 다시 살아가게 할 첫걸음이 되어주길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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