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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0. 2024

7화: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

마음의 가면을 벗다

서현은 평소처럼 아침을 맞았다. 방 안은 적막했고, 창밖에선 간간이 차가운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그녀를 덮쳤다. 어제까지 느꼈던 통증이 깔끔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서현은 오히려 기분이 나빠졌다. 통증이 없어지면 더 편안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뭐지…?’     


서현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적인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보니, 평소의 자기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왠지 낯설었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이 현실 속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듯한 기분. 그녀는 그 감각을 무시하려 했다.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아침 식사를 마친 서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사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늘 그랬듯 사람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바쁘고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특별히 주목받을 이유는 없었지만, 오늘은 유독 자신이 그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한 기분.  

   

서현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창문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창밖이 흐릿하게 보였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였지만, 그대로였다.   

  

"피곤해서 그래..."      


서현은 중얼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회사의 동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제각기 자리에 앉아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고, 늘 그랬듯이 누구도 서현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다른 동료들과도 필요한 대화만 이어지는 듯했다. 소녀를 만난 뒤 새롭게 맞은 오늘은 그동안 크게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정이 드는 것 같았다. 마치 어제까지는 아무감정이 없이 지나가버리던 당연한 일들이 오늘은 불쾌하고 화가나는 느낌이랄까? 이런 감정을 느껴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동료들은 그녀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서현을 대하고 있었다. 늘 같은 모습의 동료들이라 별다를 일도 없었는데 서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서현이 어제의 서현과는 다른 생각을 갖게되면서 서현을 둘러싼 모든 환경과 사람들이 평소와 달랐다.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데도 불구하고, 그녀만이 이 상황을 제대로 바라볼수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 순간, 서현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공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먼 곳을 응시하는 여자. 평범해 보이는 그녀가 왜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지만, 서현은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서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마치 그녀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여기 앉아 있는 게 편해요. 아무도 저를 신경 쓰지 않으니까.”     


서현은 그 말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어제까지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동질감 마져 느껴졌다.      

여자는 서현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당신도 느꼈잖아요. 세상은 계속 움직이는데, 아무도 제대로 그 세상을 바라보지 못해요. 우리만 그 세상을 제대로 보고있죠.“     


서현은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말은 마치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의미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는게 편한 상황이긴 하죠.“   

  

서현은 여자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여자가 말한 ‘세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말 속에는 그녀가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 의미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왜 그녀는 자신을 그토록 투명하게 느끼고 있었을까?  

    

서현은 가만히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의 감각은 여전히 분명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숨겨두었던 감정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사실... 나도 누군가의 시선에 머물고 싶었어.’     


그 진실은 마치 오랜 시간 억눌려 있다가 지금에서야 떠오른 것처럼 명확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동안 자신을 외면하고 살아왔다. 사람들의 무관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스스로 고립된 듯한 삶을 선택해온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서현은 언제나 누군가의 시선 속에 있고 싶었고, 그들에게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그런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동료들과 엄마에게 항상 담담한 척하며 거리를 두었다. 진정으로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자신이 상처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거리를 두고 살아가면 그 상처에서 멀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녀는 더욱더 혼자였고, 더욱더 사람들에게 잊혀져갔다.  

   

그때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서현의 생각을 깨뜨렸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면, 결국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지 않게 돼요."    


서현은 그 말에 뜨끔했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모든 행동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동료들의 무심한 눈빛, 친구들의 멀어진 관계, 엄마와의 어색한 대화. 모든 것은 서현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낸 가면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게 된 걸까요?”  

    

서현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주길 바라면서도, 스스로를 숨기곤 해요. 두려움 때문이죠. 거절당할까 봐, 상처받을까 봐. 하지만 그러다 보면 결국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시선에서 멀어지게 돼요.”     


서현은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의 내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받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랑이 두려워 고립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상처받을 것이고, 상처받기 싫어서 혼자 남는 것을 택한 자신이. 하지만 이제 그 선택이 자신을 얼마나 더 고립시켰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혼자라고 느꼈어요.”     

 

서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나를 투명인간처럼 취급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그들을 멀리한 걸지도 몰라요.”     


여자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 그들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볼 거예요. 세상은 계속 움직이지만, 당신도 그 안에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 순간, 서현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억눌려왔던 감정들이 이제는 조금씩 그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관심받고 싶어 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서현은 한참을 더 그 자리에 앉아 여자의 말들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투명한 존재처럼 느껴졌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만든 가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현은 공원 벤치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낯선 여자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돌았다. 그 여자는 분명 서현에게 뭔가 중요한 걸 말해주려 했지만, 서현은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기 직전에 멈춰 선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현은 팔에 스며드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시간은...서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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