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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일진 Sep 10. 2024

8화: 그녀가 사라지기 전에

다시 피어나는 힘


천천히 팔을 내려다본 그녀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팔이 흐려지고 있었다. 투명해져 가는 살갗을 바라보며 서현은 당황했다. 떨리는 손으로 투명해진 팔을 만져보았지만, 그곳에선 여전히 감각이 느껴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공기가 그녀의 피부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시야에 비친 팔은 분명히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서현은 공포에 휩싸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평소처럼 바쁘게 움직였고, 아무도 그녀의 변화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서현에게는 이 모든 것이 현실감 없는 악몽처럼 느껴졌다.     


'내가 사라져 가고 있는 건가?'     


서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공기가 목에 걸린 듯 가슴이 답답했다. 천천히 어깨도 흐려지고 있었다. 팔부터 시작된 그 기묘한 투명함이 점차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몸이 이 세상에서 지워져가고 있었다. 그제야 서현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누구지? 내가 정말 존재하는 걸까?'    

 

그녀는 항상 자신이 남들로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느꼈다. 마치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난 존재처럼, 누구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았고, 그녀 또한 사람들과의 연결을 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상처와 잃어버린 사랑이 그녀를 고립 속으로 몰아넣었다. 아빠와 언니의 죽음, 그리고 준호와의 아픔이 서현을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서현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빠는 몸이 아팠지만, 서현과 언니 지연을 늘 사랑으로 보듬어 주었다.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은 서현에게 소중했고, 그 시간들은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아빠의 빈자리는 언니가 채워주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언니 지연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날, 서현은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지연이 대신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죄책감은 서현의 내면 깊이 자리 잡았고, 그 후로 서현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점점 더 숨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나서, 서현은 더 이상 누군가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닫았다. 그렇게 그녀는 외로움을 택했다. 대학에서 만난 준호는 그녀에게 새로운 빛을 가져다주는 듯했지만, 그 또한 서현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결국 준호는 서현을 떠났고, 서현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몸이 투명해져가고 있었다.    

 

'나는 사라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걸까?'     


그 순간, 서현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갇혀 살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믿음이었다. 그녀는 상처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상처들이 오히려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 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서현은 이제 자신을 돌아보며, 그동안 피했던 진실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난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나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그 목소리는 서현에게 다시금 용기를 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에 갇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은 여전히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사랑을 앗아갔지만, 이제 그녀는 그 상처를 더 이상 피하지 않기로 했다. 서현은 그동안 자신이 선택했던 고립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가져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서현은 자신의 팔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투명한 상태였지만, 어딘가 묘하게 달라진 감각이 느껴졌다. 희미해져 가던 팔에, 점차 온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투명해지던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다시 그녀의 살갗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할 수 있다. 내가 잊고 있었던 나의 힘을 이제는 되찾을 시간이다.'   

  

서현은 자신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외부의 시선이나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 그때,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어린 소녀의 말처럼 모든 답은 자신 안에 있었다는 것을.     


몸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자, 그녀는 점점 자신을 되찾아갔다. 손끝에서부터 다시 보이기 시작한 그녀의 몸은 곧 온전히 제 모습을 되찾았다. 차갑게만 느껴졌던 세상이 따스한 온기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서현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더 이상 과거의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법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세상이 그녀에게 준 상처들은 그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이제 그 상처들은 더 이상 그녀를 지배하지 않았다.

    

서현은 공원에서 조용히 일어나 걸었다. 세상이 무겁게 느껴졌던 그 순간들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누르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 속에서 사라져 가던 자신의 흔적을 되찾았고, 이제는 그 속에서 빛을 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 자신이 누군지 이제야 알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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