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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May 01. 2020

미국 시어머니는 달라?

#미국 시어머니 #미국의 고부갈등

시누이가 하나 있다. 신랑 소개로 사람을 만나 우리보다 결혼을 늦게 했는데 '완전 미국인'과 결혼했다. '완전 미국인'이라는 말 자체가 우습지만 온갖 인종이 섞여 있는 나라에 이민자로 살다 보니 그런 이상하지만, 이해가 잘 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 미국인,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 미국인. 물론 그의 조상의 조상, 우리의 조상의 조상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 코카소이드인지 니그로이드인지 의외로 몽골로이드인 어쩌면 같은 조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표면적으로,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 편히 말하자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 피를 가진 시누가 백인 미국 사람과 결혼을 하여 미국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 시부모님은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느끼는 우리 시부모님과 시누가 느끼는 그녀의 시부모님은 달랐다. 나는 그들을 표면적으로 만난 적 밖에 없으니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누가 그들을 대하고, 생각하는 모습이 나와는 너무 달랐다. 어떻게 시부모님과 저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왜 '고부갈등'이라는 표현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내겐 결혼 생활을 하며 내 목을 조여왔던 가장 큰 난제였기에 약간은 부러움으로 또 살짝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사실 나의 속 마음 깊은 곳에는 시어머니가 그녀의 귀한 딸을 시집보내고 시집 살이 하는 모습을 보면 아주 조금이나마 나의 고충을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명절에 당신이 딸이 보고 싶어 진다면, 이 집에도 딸을 보고 싶어 하는 엄마가 있다는 것을 좀 더 쉽게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랄까, 하긴 이 마저도 내 욕심일 테지.


물론 미국에도 영국에도 파리에도 멕시코에도... 어려운 시부모님은 어딜 가나 있겠지. 모든 것을 국적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인간관계, 그중에서도 특히 가족 관계는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므로. 그저 나는 시누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소름 끼치게 나와 달랐던 점을 적어본다.

1. 며느리가 시부모님 댁에 자꾸 놀러 가고 싶어 한다. (feat. 시누가 보내준 시댁 사진)


한국 정서상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우리 시부모님도 내가 시댁에 갔을 때 요리를 하라거나, 과일을 깎아 내라는 강요를 하신 적은 없다. 실제로도 종종 말씀하신다. "내가 언제 며느리 손에 물 한 번 묻힌 적 있냐"라고. 하지만 말로 하는 강요만 강요인가. 무언의 압박은 당연히 있다. 생신상 허리 휘게 차리느라 죽을 뻔했고, 시아버지 친구 분이 갑자기 '아들네 잘 사나 보자'라고 찾아오셔서 임신 중에 술상을 차린 적도 있다. 자발적으로 하건, 눈치껏 하건 신랑의 옆구리를 찔러 시키건 하긴 해야 했다. 아니면 주시는 음식을 '편한 가시 방석'에 앉아서 먹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도 저도 마음이 완전히 편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분들은 참 감사한 분들이지만 자주 뵙지 않을 수 있다면 자주 뵙고 싶지는 않은 어려운 대상이었다.


그런데 시누는 그냥 편하게 시댁에 놀러 간다. 어떨 때는 시누네 부부가 요리를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시부모님이 요리를 해주시기도 한다. 그냥 할 수 있는 사람이 하고 편하게 먹는다. 그런데 아무도 눈치를 보거나 눈치를 주지 않는다. 아무도 어떤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다. 정말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부부와 더블데이트를 하는 기분으로 놀러 간다고 했다. 시아버지가 가꾸는 텃밭에 앉아서 야채를 뜯어 다 함께 요리하고, 와인을 마시며 보드게임을 하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당연히 영어에는 높임말이 없다.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고, 그 대화 속에서 솔직하게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다시 내 시집을 상상해본다. 시누가 미국 시어머니에게 하듯이 시어머니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제 생각은 그렇지 않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저희 문제는 저희가 결정할게요."라고 하면 바로 '어쩜 저렇게 예의 없이 구냐. 어른 말이 그렇게 우습게 들리느냐.'가 이어지겠지. 최대한 갈등을 만들지 않는 것이 지혜롭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그냥 순종했다. 마음은 순종이 되지 않더라도 앞에서는 그분들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그것이 참한 며느리이고, 두 번째 맞은 딸로서 기대되는 충실한 역할이었다.

2. 받은 것도 없지만, 드릴 것도 없어요.


한국 집 값은 비싸다. 그중에서도 수도권의 집 값은 정말 터무니없고, 강남 집 값은 살인적이다. 일반적인 직장 생활을 해서는 숨만 쉬고 돈을 모아도 결혼 적령기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없다. 그래서 남자가 집을 마련하면 여자가 혼수를 해오는 옛 문화는, 이제 아들 가진 부모가 신혼집을 마련해줘야 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문화가 생겼을까. 물론 우리 시댁은 우리 결혼할 때 집을 해주신 적이 없다. 바란 적도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들에게 반드시 집 한 채 해줘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그 언젠가가 돌아가신 후라면 현재 백세 시대 기준, 백세에만 돌아가셔도 우리 70대에 집 한 채가 생기는 걸까. 그건 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받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다. 안 주셔도 되니 노후에 기대지만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매정할지 모르겠지만 솔직한 마음이다.


그런데 늘 시부모님 재산이 언젠가는 우리 재산이 언젠가 될 것이니 지금 본인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다. 시어머니께서 시할머니를 돌아가시는 날까지 모시며 대소변 수발을 하셨듯이. 사실 내게 어디까지 기대하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아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꼬박꼬박 월급의 십일조를 받아가셨고, 현재도 매 달 용돈을 드리고 있다. 이건 어차피 다 너희 돈이라는 논리이다. 아니 사실 우리에게 주시는 것도 엄청 많다. 때 되면 된장, 고추장에 김치 그리고 각종 나물 반찬과 각종 남대문 표 아이들 옷까지. 그런데 우리 신랑은 교포라 한식을 잘 안 먹는다. 나물은 더 안 먹고. 아이들 옷은 디자인도 사이즈도 참 애매하다. 매번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돈과 바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감사하다. 우리를 살뜰히 챙겨주시려는 그 마음을 받아야지 어쩌겠는가. 감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마음이 어려워 견딜 수 없었다.


그 미국인 아주버님(시누의 남편)은 당연히 자기가 일을 해서 본인 대학 학자금 빚을 다 갚았다. 그리고 자기가 벌어 모은 돈으로 집을 샀다. 정확히 말하자면 착실히 은행의 모기지를 다 갚았다. 시골의 조그마한 집이지만 그래도 자가라니 부럽다. 당연히 부모님께 드리는 것도 없지만 받는 것도 없다. 아니 드리는 것이 있다. 때때로 자기 밭에서 수확한 건강한 블루베리나 딸기를 따다 드리곤 했다. 그러면 그쪽 부모님은 아들이 키운 과일로 쨈을 만들어서 병입 하여 돌려주었고, 집에서 취미로 양봉을 하고 계셔서 꿀을 수확하면 좀 나눠 주시곤 했다. 친절한 시누가 과일 잼을 우리 집까지 우편으로 보내주곤 했는데 그 맛은 정말 아름다웠다. 적당한 달기와 풍부한 과일 향이 신선하게 전해졌다. 다른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아 보관 기간은 짧았지만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건강하게 먹이기 좋았다.


여기서 꿀을 주는 시댁과 된장을 주는 시댁을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다. 만드는 수고로 치면 된장도 어떤 식료품 못지않게 어려운 식재료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받는 마음이 얼마나 자유로운지의 차이인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완전히 경제적, 정서적 독립이 되어야 건강한 관계가 될 수 있겠지. 기대하는 것도 없고 기대지도 않는 관계. 자녀가 성인이 되면서 한 번, 그리고 결혼 후에는 또 한 번 더 완전한 독립체로서 인정해준다면 더 건강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3. 이제 이 사람은 네 아들이기 전에 내 남편인걸


흔한 고부간의 갈등에 가운데에서 가장 마음 어려운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남편. 어른이 되기 전까지 평생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던 '엄마'와 결혼 후 평생을 사랑할 여인인 '부인'이 서로를 미워한다면 얼마나 힘들까.


흔히 한국 맘 카페에서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 본다. 한국에서 자란 보통의 아들들은 자기 엄마 앞에서 엄마 편을 들어준다. 아내와 둘이 있을 때 아내 편을 들더라도 셋이 있을 때는 엄마 편을 들어야 상황이 빨리 정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인 정서상 어른 말을 들어 드리는 것이 보기에 더 좋지 않은가. 엄마 말을 듣고, 선생님 말을 듣고, 군대 선임의 말을 듣고, 부장님 이사님 말을 듣고... 상명하복에 몹시 익숙하다. 그냥 앞에서 '네네' 하고 돌아서 듣지 않더라도 어서 그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보통 아내들은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상처 주는 시모보다 제 엄마 편을 드는 신랑이 더 꼴 보기 싫다. 그 쯤되면 '그래 사랑하는 너네 엄마랑 평생 살아라.'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다.


그런데 우리 신랑은 교포라 확실히 이 부분에서 일반적인 한국인 남편들과는 달랐다. (물론 모든 교포가 다 그럴 수는 없고 모든 한국인 남편들이 엄마 편을 들지는 않을 것이다. 섣부른 일반화를 하고 싶지는 않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다.) 늘 가운데에서 중립을 지키며 중재를 위해 앞장섰다. 어머님이 잘못된 부분은 분명히 지적했고, 사과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매우 객관적인 자세로 속 시원하게 팩폭('팩트 폭력')을 해댔고, 그러면 나는 속이 시원해졌으며, 시부모님은 '아들 잘못 키웠네, 결혼하더니 아주 애가 바뀌었네.' 난리셨다.


그런데 미국인 남편은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그냥 시누 편이었다. 대놓고 시누 편이었고, 시어머니 역시 본인 남편이 자기편이듯, 자기 아들이 부인 편을 드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그래서 그냥 서로가 서로를 잘 챙겼고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모두의 관계는 좋았다. 선이 분명하니 굳이 서로 상처를 줄 일도 없었고 내가 설사 잘못해도 신랑은 완전히 내 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결혼하는 순간, 누군가의 아들과 딸이기 전에 또 누군가의 아빠, 엄마이기 전에 서로의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에 가장 충실했다. 그렇게 부부 관계가 단단할 때 오히려 모든 역할과 관계가 더 건강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우리 아들 너무 사랑하는데, 이 놈이 커봤자 여전히 내 눈엔 어리고 어여쁜 내 아들일 테지. 나는 얼마나 건강하게 이 아이의 독립을 인정해줄 수 있을까, 20년 후에 한 번 보자. 아들아, 엄마가 꼭 너 장가갈 때 이 글 다시 읽을게. 그리고 기억할게. 내가 널 잘 키웠다면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네가 선택한 귀한 아가씨, 네 아내 편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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