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조국이라 불리는 이 곳
#밖에서 바라본 미국 그리고 #들어와 사는 미국
언제부터였을까.
이 나라가 불편하게 느껴진 것이.
물론 미국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우리나라에는 태풍이 오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 영향력이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도움을 요청을 했던 적이 있고, 뭐 지금도 무역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니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겠지. 하지만 '양공주', '김미 쪼꼬렛'의 역사가 수십 세기가 지난 오랜 이야기가 아니라 더 아팠고, 미국과 사이가 안 좋아질까 봐 쉬쉬하며 자국민들을 누르는 윗사람들 때문에 더 아니꼬웠다. 미국 사람이면 한국에서는 사람을 쳐도 용서가 되고, 미제라면 싸구려 술도 '양주'가 되는 것. 영어라면 평생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도 계속 배워야 하는 언어인 것. 힘센 그들은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이고, 한국에서 귀하게 자란 엘리트였던 우리 이모 삼촌들이 이 나라에 와서 그릇을 닦고, 청소를 해도 한국보다 먹고살기 좋다는 그런 곳이고. 돈 좀 있는 집안에서는 어학연수와 유학 명목으로 아이들을 몇 개월은 안 내보낸 집이 없을 정도이고. 영어 좀 한다는 잘 배운 친구들은 이 다 오페어니 워킹 홀리데이니 허울 좋은 명목으로 미국인 가정에 보모로 또는 영어권 국가에 농장 일하러 오는... 이 곳은 정말 그렇게 천국 같은 곳일까.
아무래도 어른들이 너무 예찬을 하니 오히려 반감이 들었나 싶다. 그러다 보니 나는 영어 교육의 중심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삐딱하게 보기 시작했다. 영어를 그리고 영어를 쓰는 영국을, 캐나다를, 호주를 대충은 잘 사는 영어권 국가를.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 사람들이 예찬하는 꼬부랑 발음을 가진 미국이 아니꼽게 느껴졌다. 뭐랄까. 그들이 가진 좋은 문화나 시스템을 무조건 비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고백하건대 이건 자격지심이었을 수도 있다. 아직도 전시 작전 통제권 환수 문제만 나오면 정치 문제로 빨강 파랑으로 나눠져 싸우는 한국에서 감히 미국을 비판한다는 것은 어떤 정치 색을 드러내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을 천조국으로 예찬하는 것을 보면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내게 있어 미국은 돈 많고 똑똑하고, 힘도 세고 키도 크고 얼굴도 하얀데, 인기까지 많아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친구로 밖에 안 보였다. 자기 잘난 맛에 살지만 자타공인 잘남이 인정된 친구라 토를 달 수 없었다. 잘 보여야 내 인생이 편해질 것 같은데 그래서 왠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기회주의자로 살았다. 그 친구와 관련된 일은 돈이 되는 분야였기에 영어 교사 자격을 취득했고, 영어 유치원과 국제 학교를 전전하며 이득을 취했다. 영어에 미쳐있는 나라에서 영어를 조금 낫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돈이 되었고 지위가 되었다. 그래서 잘난 친구한테 기대서 단물을 빨았지만, 뒤에선 욕했다. 문화도 역사도 없는 미개한 나라. 분리수거도 안 하고 쓰레기 다 섞어 막 버리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치부했다. 그런데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살다 보니 미국 교포를 만나 결혼했다. 애도 낳아 키우다 보니 그 천조국이라는 미국에 와서 살게 되었다. 결국엔 다 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왠지 신랑이 '교포'이기 때문에 부럽다고 하는 지인들의 말이 불편했다.
그런데 미국에 들어와서 보는 미국은 달랐다. 한국에서 '천조국'이라 불리는 이 곳. 미국에 나가면 다 미국을 예찬하게 된다는데 그 말에 코웃음 치던 내가 부끄럽다. 여긴 자유롭고 합리적이다. 평등하고 아름답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핵심 국가라 할 만하다.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된다. 중요한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능력에 대해 정당하게 보상받을 것을 믿는다. 비교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참 잘 웃는다. 배려가 몸에 배어있다. 삶이 여유가 있고 잘 나누기까지 한다. 좀 느려도 쉽게 화내지 않는다. 봉사활동을 하다 처음 만난 신랑의 교포 특유의 밝음과 구김 없음이 한없이 부러웠다. 나도 '그 집 사람들'이 되고 보니 중요한 가치들을 중요하다 이야기할 수 있는 그 당당함이 부러웠다. 기생충에서 나왔던 기가 막힌 대사 '돈이 다리미라고. 주름살을 쫙 펴줘.' 하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돈다.
아름다운 곳에서 좋은 것들 배우며 잘 살면 그만인 것인데 그게 잘 안된다. 자꾸 한국이 생각났다. 어딜 나가도 부끄럽지 않은 진짜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이고, 이제 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하는데... 그래도 자꾸 비교가 된다. 어딜 가든 우리 힘을 증명하느라 애써야 한다. 이제 먹고 살 걱정 없이 잘 살지만 통장을 보면 늘 불안한 가족들과, 열심히 사는데 아직도 어딘가를 향해 몹시 화가 나 있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고향이고 내 핏줄이라 그렇겠지. 그 좋다는 부잣집에 '수양아들의 부인'으로 들어앉아 보니 자꾸 친정 식구들이 눈에 밟힌다.
원래 날 때부터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당신들은 모른다. 다른 나라 말로 끊임없이 평가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그리고 당신들은 모른다. 우리 아빠랑 작은 아빠랑 싸움이 났는데 주먹을 한 방 날릴지 경찰에 신고할지 그냥 모른 척할지 결정하는 것을 우리 집 가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저 돈 많은 아저씨랑 같이 해야 하는 그 상황이 얼마나 거지 같은지 모를 거다. 언제나 자기 생각을 표현하며 자란 당신들은 모른다. 우리는 날 때부터 시키는 대로 말 잘 듣게 컸다. 선생님이 앉아 있으라면 물에 빠져 죽을 때까지도 앉아 있도록 배우면서 컸다. 어른이 말씀하시면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예의라 배우며 자랐다. '다름'이 '틀림'이 되는 곳에서 자랐다. 그리고 아직도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면서, 누군가의 '을'로 치열하게 산다. 정말 주말도 없이 일해서 이제 먹고 살만 해지니 그 아랫 세대들에게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할 수밖에 없는 어른들의 마음을. 당신들은 모를 거야. 날 때부터 부자 아빠가 힘도 세도 키도 크고 돈도 많으니까. 정말 가진 것 없이 시작해서 이렇게 당신들 자식과 똑같이 교육시켜 부러울 것 없이 똑똑하게 내 새끼들을 키워내기까지 우리 부모님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노력만큼 인정받고 일하는 공평한 기회의 나라에서는 모른다.
이제는 정말 자랑스러운 기생충, 자랑스러운 BTS, 자랑스러운 코로나 대처 국으로. 문화강국이자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한 한국이 자랑스러워야 한다.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느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물론 이 곳도 고쳐야 할 곳이 넘쳐나는 사람 사는 곳 중 하나다. 불편함도 많고 분명 잘못된 곳도 많다. 한국에서 겪지 않아도 되는 인종 차별도 있다. 하지만 그냥 밖에서 바라보는 미국과, 들어와서 사는 미국은 달랐다. '천 조원'을 들여 자국민들 보호한다는 돈 많은 나라에 들어와 보니 그 천조가 너무 든든하다. 약소국에서 뭘 가져오든 상관하고 싶지 않다. 음식물 쓰레기를 물에 갈아버리든, 재활용품을 다 섞어버리든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어디 저 애먼 나라에 돈 좀 주고 갖다 파묻어 버리면 그만 일 테니까.
근데 왜 자꾸 엄마 아빠가 보고 싶을까.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루하루 정직하게 사는데... 직장 생활을 꾸역꾸역 버텨내며 힘들어하는 남동생이 오늘따라 왜 이리 그리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