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좀 덜 씻을래
#맑은 물에 대한 #짧은 고해성사
오늘도 하루 종일 씻는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한다. 변기에 물을 내리면 소변이 씻겨 내려간다. 아이들을 깨우고 똑같이 얼굴을 씻긴다. 아기 변기에 담긴 아이의 소변을 씻어 낸다. 간단히 아침을 차리고 나면 또다시 부지런히 컵과 그릇들을 씻고, 식탁을 닦는다. 아이들이 먹고 흘린 흔적들을 다시 씻어내고 닦아낸다. 둘째 녀석이 큰 용변을 보고 나면 어김없이 엉덩이를 씻겨주어야 한다. 기저귀를 오래 차고 있으면 답답할 테니 물로 씻기고 잘 말려준다. 돌아 서기 무섭게 점심 준비를 한다. 야채를 씻고, 고기를 물에 담가 핏물을 빼내서 씻어내고, 씻어 말린 그릇을 꺼내 다시 삶의 흔적 들을 남긴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시 씻어 낸다. 기름기 없이, 양념 없이 씻어낸다. 먹고 흘린 흔적들을 씻어내야 한다. 아이들과 외출이라도 하고 오면 옷가지 어딘가에 묻어 있을지 모르는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해 옷을 벗어 몽땅 벗어 세탁기로 넣는다. 흙이 묻거나 밖에서 뭘 묻혀 오기라도 했다면 손으로 직접 애벌빨래를 해야 한다. 먼지와 오물과 이물질을 싹싹 비벼 씻어낸다. 저녁 식사를 같은 방식으로 준비하고 씻어내고 나면 돌아서 내일 먹을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그리고 자기 전 다시 대대적으로 씻는 행위가 이루어진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내 몸을 씻어내고, 아이들을 씻긴다. 내 이를 닦고 아이들 이를 닦이고 여러 차례 헹궈 낸다.
코비드 19 사태가 시작된 이후에 이 씻고 씻기는 행위는 무척이나 더 중요해지고 말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고 또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하니 더 강박적으로 씻는다. 마음의 불안을 떨치기 위해 쉬지 않고 씻고 닦고 소독한다. 흔히 엄마들이 '손에 물 마를 날 없다.' 하는 그 말 그대로이다. 물이 마르기 무섭게 다시 묻혀 씻어낸다. 뭘 이렇게 강박적으로 씻어내고 있을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앞섰다. 대체 뭘 그렇게 씻을 것이 많다는 말인가.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씻는 행위를 습관적으로 하게 된 것일까. 집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도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자주 씻고 씻기고 있는 것일까. 돌봄 행위의 팔 할도 씻기는 것과 직접 연관이 되어 있었다. 아니 좀 덜 씻기고 좀 덜 씻으면 어떤가. 우린 너무 많은 물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 같다. 하루 종일 얼마나 많은 물을 소비한 것인지 돌아본다. 나 하나 그리고 내 새끼들 돌보는데 너무 과한 양의 물을 씻는데 쓰고 있다. 매일 내가 만든 오폐수만 모아도 상상할 수 없는 양이될 터였다. 직접 씻는 것뿐만 아니라 기계들도 물이 있어야 돌아가는 놈들 뿐이다.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고 식기 세척기를 돌린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습관적으로 씻어대고 있다. 지금 코비드 19를 두고 지구 입장에선 잘 만들어진 엄청난 백신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지구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바이러스처럼 느껴질 테지. 그래서 환경의 보복이라 하기도 한다. 마음이 아프다. 물론 지금은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서라도 외출 후에 반드시 손을 씻어야겠지만.
보슬보슬 종일 내리는 봄비를 내려다본다. 이 곳의 비는 아직 맑다. 상쾌하게 빗 속 공기를 들이키며 감사함을 느낀다. 이 곳 사람들은 우산을 잘 안 들고 다닌다. 대중교통보다 거의 차를 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비 속에도 꿋꿋이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다. 한국에선 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오늘 내가 더럽힌 오폐수를 생각하니 마음이 혼탁해진다. 이 나라에 와서 눈에 가장 거슬렸던 것 중 하나가 싱크대에 설치된 음식물 분쇄기. 양심도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무지막지하게 물에 갈아 버릴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 편리함에 길들여지면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의식적으로 사용을 자제한다. 음식물 쓰레기 자체를 최소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 좀 덜 씻어도 되지 않을까.
신랑이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난 좀 덜 씻어야겠다. 아니 오염된 것은 씻어야겠지만 습관적으로 씻는 행위는 멈춰야겠다. 우리 아이들이 그리고 또 그 아이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부디 지금보다 더 맑은 물이 부족하지 않기를, 더 숨 쉬기 어렵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