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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Jun 16. 2020

같이 여행 가고 싶은 시아버지

#시아버지 자랑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

결혼 후 시댁에서 어른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처음 가장 어렵고 불편한 관계는 시아버지였다. 시어머니와 시누 언니는 그래도 동성이라 가까워지는데 아주 오래 걸리지 않았고, 도련님은 손아래인데 워낙 사교적인 성격이라 친해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애정을 잘 표현하시는 분도 아닌 데다 흡연자 셔서 스칠 때 나는 담배 냄새조차도 힘들었다. 게다가 말 수도 없으셔서 같이 있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은데 딱히 공통의 주제가 있지도 않아서 다가가는데 어려움이 컸다.


시간이 흐르고 첫째 임신 소식을 전했더니 덤덤히 웃으시더니 그 길로 30년 넘게 피우시던 담배를 딱 끊으셨다. 아기 안으려면 담배 냄새가 나면 안 된다 하시면서. 그리고는 틈 날 때마다 아기 태명을 부르시며 '솔이가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봐라.' '이제 솔이가 집에 가고 싶다 하네.' '솔이가 어떻게 할지 정하자.' 하시며 티 나게 임신한 며느리를 챙겨주시곤 했다. 아버님은 언젠가 육아에 지쳐 있던 어느 날, 우리 부부만 좋은 고깃집에 데려가셔서 한우에 술을 한 번 사주신 적이 있다. 특히 어머님 때문에 마음고생 심한 날, 어머님 몰래 술도 한 잔 사주시고 어깨도 두드려 주시며 그저 문제를 다 본인 탓으로 돌리곤 하셨다. 그러면 시집살이에 마음을 짓누르던 돌이 스르륵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머님에 대한 어려움, 시댁 살이의 서러움, 시누 언니의 철없음을 하소연하고 나면 아버님은 그저 잘 들어주시며 빈 술잔을 채워주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함께하는 시간은 어머님과 더 길었음에도 아버님이 더 편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셔도 마음으로 이해가 되었고, 또 내 입장을 이해해주실 것이라 믿어졌다.


그렇게 관계가 쌓인 후에는 아버님께서 정해주시는 때론 고리타분한 규칙들이나 '출필곡 반필면' 따위의 예를 차리는 것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규칙이나 예의도 결국엔 신뢰와 애정이 쌓인 관계 위에서는 별스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나서서 어디 다녀오면 뵙고 싶어 지고 그동안 잘 계셨나 궁금하고, 아이들 앞에서 어른으로서 대우해드려야 우리 아이들도 예의를 배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고, 맞는 방식을 알려주시면 따르고 싶어 졌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관계에서 '전통'이나 '예의'라는 이름을 붙여 강요하시는 것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시어머니께서 임신 소식을 들으시고는 내 무릎 위에 족보를 올려놓으시며 이 가문의 몇 대 돌림자를 알려 주시고, 아이 이름을 강요하셨을 때 절로 반감부터 들었다. 그게 그렇게 급하게 강요하실 일인가 싶었다. 가끔 시아버지와 싸우신 후엔 본인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시곤 갑작스럽게 아들을 불러내어 한참 아버지 욕을 하시곤 하셨다. 차라리 나를 같이 불러 주셨으면 위로라도 해드리고 같이 방법이라도 찾아보거나 했을 텐데... 아무리 한 건물에 살지만 본인 필요하실 때, 아들만 쏙 불러내시면 아이를 데리고 주말이고 평일 저녁이고 한참씩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나는 속이 타고 힘들었다. 그럴 때면 시댁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참 어려웠다. 따로 멀리 살아도 그렇게 본인 필요할 때면 아무 때나 불러 내시고 하실까... 그렇게 결혼 후에도 종종 아들이 아들로서 역할을, 남편으로서의 역할보다 우선하여 해 주길 원하셨는데 그럴 때는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웠다.


아버님은 소위 '낄낄 빠빠'를 눈치껏 잘해주셨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 모시는 것도 별로 부담되지 않았다. 가족들이 시간이 함께 보내는 자리엔 함께 해주셨고, 적당히 형제들끼리 놀고 싶어 할 때는 카드를 슬쩍 맏이에게 쥐어주고 피곤하다 하시며 들어가셨다. 돈을 내주셔서 멋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때는 정말 이런 것이 멋있게 돈을 쓰는 것이구나 하고 느끼곤 했다. 나도 훗날 어른이 되어 돈이 있으면 그렇게 써야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또 아버님을 모시고서 우리가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졌다. 이렇게 자꾸 비교하면 나쁘지만 어머님은 어디에나 끝까지 끼고 싶어 하셨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이 놀러 갈라 치면 '어딜 가는지, 언제 출발하는지' 자세히 물어보셔서 예의상 '같이 가실래요' 여쭤보면 두 번 더 여쭙기 전에 바로 따라나서셨다. 아버님 안 계실 때는 모든 운전과 식사 및 여행 비용은 다 우리 부부의 몫이었다. 한 번도 직접 운전을 하시거나, 아니면 멋있게 밥을 사주셨던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아버님께서 어머님께 경제권에 제약을 두시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부분이 참 아쉬웠다. 같이 살다 보니 너무 잘 알아서 서운함도 생기곤 했다. 어머님 본인 볼 일이 있으시면 항상 직접 운전해서 전국을 다니시고, 어머님 친구들 앞에서는 밥을 수시로 쏘시곤 하셨기에, 씀씀이가 적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아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싶으셨던 것일까. 자존심보다는 지갑을 지켜주셨다면 더 따스했을 텐데 싶었다. 나는 단순히 밥을 잘 안 사주셔서 어머님께 서운했던 것일까.


그래서 가족 여행을 가려고 계획을 하다 보면 '주말에 아버님은 뭐하시는지, 같이 가실 수 없는지' 내가 먼저 묻곤 했다. 함께 여행을 가면 운전은 항상 아버님께서 직접 하시고 싶어 하셨다. 아버님 차로 자주 가기 때문이기도 했고 미국에서 오래 사셔서 장거리 운전을 두려워하시지 않았다. 당연히 교포인 신랑보다 한국 구석구석을 잘 알고 계셨다. 네비가 알려주지 않는 숨은 길을 잘 알고 계셔서 항상 기대 시간보다 안전하게 빠르게 우리를 '모셔다' 주셨다. 출발 전에 머그컵 가득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채워드리면 되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재미있어하시는 주제의 이야기가 꽂히면 한참씩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는데, 나랑 코드가 잘 맞아서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새롭고 재밌었다. 아버님은 말수가 많으시진 않지만 관심 주제에 봇물이 터지시면 몇 시간이고 혼자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셨다. 그래서 아버님이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가족들은 대놓고 자버렸다. 하지만 나는 재밌어서 맞장구치며 들었다. 주제들이 어떤 날은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12가지 제언'에 대하여 또는 '미래에 없어질 직업들' 그리고 '돈의 기원' 같은 것들이었는데 정말 배울 것도 많고 재미있었다.


아버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편하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은 늘 고생하는 며느리에게 제일 먼저 물어 봐 주신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때는 본인이 빨리 드시고 우리 편하게 먹으라며, 아기들을 데리고 나가셔서 한참씩 봐주시기도 하셨다. 마지막으로 계산은 '아빠 있을 때는 아빠가 한다'며 신랑이 절대 못하게 하신다. 뒤로 용돈을 보태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님 계실 때는 아버님이 늘 계산을 해주셨다. 한 번, 두 번, 세 번 큰 절 올리고 싶다. 밥 잘 사 주는 시아버지는 사랑이다. 그런데도 아버님은 허세가 없으셨다. 꾸며내서 무언가를 하시거나 입에 바른말을 하시지도 못하셨다. 그냥 마음 가시는 대로 하셨고, 그런 뭉근한 애정은 시집살이 내내 나를 버티게 하는 큰 힘이 되었다. 입으로 우리 며느리 곱다 예쁘다 하신 적 없으시지만 나는 믿는다. 아버님은 나를 예뻐하셨을 것임을. 왜 과거형이냐 하면 우리는 지금 이민을 와서 타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민을 왔다고 가족 간 애정이 쉽게 끊기겠느냐만은 또 아버님이 정은 많으시지만 뒤끝은 없으셔서, 쿨하기가 아주 사시미 저리가라로 칼 같으시다. 그래서 눈에 안 보이는 자식 내외를 얼마나 그리워하실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아껴주시고, 없을 때는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누구에게도 미련을 갖지 않으신다. 나도 우리 시아버지 같은 멋있는 어른으로 늙고 싶다.


그렇게 꿈꾸던 우리 가족만의 공간이 생겼다. 이제 아무 눈치 안 보고 예의상 여쭤볼 필요도 없이 우리끼리 여행을 마음껏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여행 준비를 하다 말고 생뚱맞게 시아버지가 무척 보고 싶네.


"아버님~ 이번 주말에 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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